◈ 92. 브랫 로이드의 소원 (1)
아이른 파레이라가 신성왕국의 초대장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몇 달 전.
쿤의 거처에 머무는 주디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몸이야 버릇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머리는 조금 있으면 도착할 브랫 로이드 생각에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이 자식, 도대체 뭘…… 뭘 하고 싶은데 이렇게 준비가 오래 걸려?’
묘했다.
녀석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패배를 겪었다.
평소의 자신을 생각하면 짜증을 넘어 분노가 넘실거려야 정상인 상황이다.
허나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한 번 졌다고 풀 죽으면 죽여 버린다. 다음에 네가 이기면…… 원하는 거 뭐든 들어줄 테니까, 열심히 수련해.’
응원을 위해 무심한 듯, 짤막하게 써 보냈던 편지.
고작 그것 하나에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되어 실력이 급상승한 자기 연인을 보니, 숨길 수 없는 기쁜 얼굴로 ‘준비 좀 하고 오겠다’라고 말하던 그를 생각하니…… 조금이지만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개 같은 생각이야.’
주디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귄 건 아직 2년도 되지 않았지만,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 가까운 둘이다.
연인 이전에 오랫동안 이어져 온 라이벌 관계로서, 브랫이 어떤 성격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가 원하는 소원은…….
‘아마, 내가 엄청 부끄러워할 만한…… 그런 거 아닐까?’
주디스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많은 광장에서 ‘브랫 로이드 사랑해!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여러 번 외치기.
마찬가지로 사람 많은 장소에서 낯부끄러운 애정 표현하기.
그것 외에도 온갖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허나 뻔뻔한 브랫이라면 좋아할 만한 상황들이 생각났다. 그것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의 검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아악!”
퍼어어엉!
“아, 깜짝이야. 뭐냐? 아, 오늘이구만? 그 녀석이 오는 날.”
불꽃처럼 기운을 터뜨리는 주디스의 모습에, 명상을 이어 가던 쿤이 번쩍하고 눈을 떴다.
예전에는 오로지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방식으로만 수련에 임했으나, 최근에는 이안처럼 정적인 수련도 종종 하는 그였다.
물론 이런 재미있는 일을 앞두고까지 계속 그럴 생각은 없었다.
빙긋 웃은 그가 놀리듯이 말을 건넸다.
“1년 365일 수련에 집중하는 나지만, 오늘은 하루 쉬어야겠다. 제자 구경하는 것만 해도 무척 재밌겠구나. 암,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닥쳐요, 제발.”
“싫은데? 싫은데?”
“닥치라고 좀! 스승이고 뭐고 죽여 버린다!”
“하하! 그럴 실력은 있고?”
슉
슈슉
슉, 슈슉, 슉!
자리에서 일어난 쿤이 빠르게 움직였다.
‘번개 같다’, ‘질풍 같다’ 따위의 묘사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소드마스터 급의 실력인 주디스였으나, 저 미친 스승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방법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젠장!’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낀 주디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짜증 났다. 연인도, 스승도.
허나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브랫의 머리를 쥐어박고 쿤을 날려 버릴 정도로 실력이 높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이그넷 크레센시아, 이안, 율리우스 휼, 그밖에도 강자라고 소문난 대륙의 모든 검사들.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독기를 충전한 주디스가 뜨거운 숨결을 뱉은 뒤, 자신의 검에 집중하였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우웅-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우아한 자태로 착지하는 전설의 동물, 그리핀.
키릴 파레이라의 요술 소환수인 앵두였다.
그런데 평소와 조금 모습이 달랐다.
다소 정리되지 않았던 털이 고르게 빗겨져 있었고, 앵무새를 닮은 머리에도 장신구가 달렸다.
목에는 멋들어진 리본도 묶여 있었다.
그야말로 한껏 멋을 낸 그리핀의 외관을 보며 당황스러워할 때, 브랫 로이드가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헌데,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폴짝
“오랜만이에요, 주디스 언니.”
대륙 최고의 요술사 유망주, 키릴 파레이라.
풀쩍
“반갑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단 왕국의 제일가는 멋쟁이이자 사교의 스페셜리스트, 빌 스탠튼이라고 합니다.”
……왠지 모르게 뺀질거리는 느낌의 귀족 남성, 빌 스탠튼.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주디스가 고개를 돌려 연인을 쳐다봤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
이를 웃는 얼굴로 마주한 브랫이 말했다.
“주디스.”
“어? 응?”
“함께 갈 곳이 있는데 말이야.”
“……어, 어딘데? 아니, 근데 이 사람들은 뭐야? 너 혼자 오는 거 아니었어? 왜…….”
“아아. 그게 말이지.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드레스 코드가 있거든. 간단한 매너 같은 것도 필요하고.”
“아니, 그게 뭔…….”
“어쨌든, 여기 두 명은 그걸 위해서 모셔온 사람들이야. 특히 이쪽.”
브랫이 빌 스탠튼을 쳐다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스타일링의 달인이니까, 안심해도 좋아.”
“뭐? 스타일링? 그게 무슨…….”
“하하,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체형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감추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살려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도 옆에서 열심히 보조할게요, 언니.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아니, 아니, 아니, 다들 지금 뭐 하는…… 내 말 안 들려? 어이, 야! 야!”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선, 주디스의 양팔을 잡고 쿤의 거처를 향해 끌고 가는 두 남녀.
놀라운 일이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검사라면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존재인 대륙의 3대 검사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니.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던 쿤이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주 괴상한 친구들이로군.”
“키릴이 좀 그렇죠. 아시지 않습니까.”
“저 빌 뭐시기란 녀석도 마찬가지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실력도 꽤 좋아 보이고, 재능은 그보다도 더 나아 보이고…… 하여튼 신기한 놈이구만.”
“그렇습니까?”
브랫이 살짝 놀랐다.
이안과 주디스 정도 말고는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쿤이었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허나 화제는 곧바로 바뀌었다.
개구쟁이처럼 실실 미소를 흘린 노인이 한창때의 청년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딜 갈 생각이냐고.
브랫은 감추지 않았고 곧바로 대답했다.
“무도회에 갈 생각입니다.”
그가 키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작년, 아이른과 일리아가 아직 연인이 되기 전에 있었던, 린제이 가문에서의 일.
당시의 로맨틱하고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상상하던 브랫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을 휘두르며 하는 데이트도 좋지만…….’
가끔은, 귀족의 방식으로도 즐기고 싶은 법이니까.
* * *
대륙 중부에서 손꼽히는 강대국 중 하나인 거베라 왕국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마인이 많아졌고, 그 배후에 ‘진짜 악마’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보는 나라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지만, 이는 남의 이야기였다.
160년간 내실을 단단히 다진 거베라 왕국은 아직은 큰 탈 없이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휘유, 사람 많구만.”
“그럴 수밖에 없지. 공작께서 개최한 무도회인데.”
그러한 와중에, 왕국에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예로부터 높은 지위의 귀족이 개최한 파티는 콩고물을 주워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법.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더라도 올 사람은 많았다.
예술을 특별히 사랑하는 공작의 연회를 마다할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급박한 일이 있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변 귀족들이 걸음을 옮겼다.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사교를 즐기기 위해.
마지막으로 운명의 연인을 찾기 위해.
젊은이들은 한껏 자신을 치장한 채 공작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와, 휘황찬란하구만.”
“저게 그건가? 이번에 룬텔 왕국에서 나왔다는 마도구?”
“그런 거 같은데. 와, 진짜로 말이 없는데 움직이잖아?”
“바퀴도 뭔가 달라. 엄청나게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뽐내기 위해 남성들은 어떤 것에 신경을 쓰는가?
많은 요소가 있을 것이다.
허나 돈처럼 확 티가 나는 것도 없었다. 비단 문지기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옛날보다 신분과 계급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현시대에 있어, 막대한 부는 능력을 증명해 줄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무도회에 참가하는 이들은 고급 브랜드의 의복을 입거나 값비싼 장신구, 손목시계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최근에 한 가지 품목이 더 추가되었다.
탈것.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고급 마차(馬車)를 넘어,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특급 이동수단.
룬텔 제 마차(魔車)를 타고 등장한 스펜서 백작가의 막내, 로젤리오 스펜서가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의식했다.
‘지른 보람이 있네.’
솔직히 말해 많이 무리했다.
제작이 어려워 룬텔 왕국 내에서조차 보기 힘들 정도인 이 마법 마차를 구하기 위해, 로젤리오 스펜서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께 손까지 벌렸다.
그 때문에 백작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가난하게 지내야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듯한 행인들의 시선.
수많은 귀족들을 맞이한 공작가의 문지기들조차 숨기지 못하는 표정.
무엇보다, 아닌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레이디들의 뜨거운 눈빛!
짜릿했다. 이거야말로 무도회에 참가하는 즐거움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될 것 같군.’
거베라 왕국 제1호 룬텔제 마법 마차주, 로젤리오 스펜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들어찰 무도회를 상상하며 열심히 표정을 관리했다.
몇몇은 그런 그를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몇몇은 숨길 수 없는 백작가 자제의 재력에 혹한 모습을 보였다.
허나 로젤리오 스펜서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화려하고, 경악스럽고, 신비로운.
마치 신화나 전설 속에서 나올 법한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
“저건 뭐지?”
“저것도 룬텔에서 만든 마법 이동수단인가?”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닌데…….”
‘뭐야?’
소란을 느낀 백작가의 막내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자신이 받을 관심을 빼앗아간단 말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을 타고 왔기에!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룬텔제 마법 마차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우아하게, 하늘을 날아서 도착한 그리핀 마차.
질투심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광경에, 로젤리오 스펜서를 포함한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안에 타고 있던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브랫 로이드!’
‘로이드 가의 장남…… 요술사와 친분이 있다더니, 요술 마차를 타고 온 거였구나!’
‘아니, 마법 마차만 해도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데…… 오늘 좋은 구경을 했군.’
‘그런데 옆엔 누구지? 여자잖아?’
20대 초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명실상부 거베라 최고의 신랑감이 된 브랫 로이드.
그런 그의 곁에 서서 쭈뼛거리고 있는, 아직은 대륙에 명성이 퍼지지 않은 주디스.
후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의아함이 담겼다. 특히 여성들의 눈빛이 매서웠다.
“읏……!”
주디스는 당황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장소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
쏟아지는 시선도 힘들었다.
슬쩍 옆을 돌아본 그녀가 연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 나 못 하겠어. 진짜, 아…… 진짜 못 있겠어. 그러니까…….”
……부탁인데, 다른 소원으로 바꾸면 안 될까?
브랫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깐깐한 얼굴로.
꽤 오랫동안 주디스를 바라보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꼬우면 이겼어야지.”
“시…… 팔…….”
주디스의 얼굴이 옷보다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