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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81화 (281/388)

◈ 91. 다섯 번째 기운 (6)

흑기사단장이 긴 수행에서 돌아왔다.

여전히 최고기사는 율리우스 휼이다.

전대 적기사단장인 퀸시 마이어스도, 현 적기사단장인 알렉시스 크리스티안도 그녀보다 보여 준 것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왕국은 이그넷의 합류로 인해 상상 이상의 용기를 얻었다.

‘설령 시간이 지나, 아빌리우스를 이끄는 중진들이 사라지더라도…….’

‘문제 없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희망, 그리고 미래.

그녀가 가져온 새로운 불꽃을 가슴에 품고, 성기사단은 더욱 단단한 각오로 악마 토벌에 임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찾을 수는 없겠죠.”

그런 신성왕국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이 정도야 예상했던 바였다. 인간의 저력을 그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대비를 철저히 해 뒀다.

광대 악마를 포섭한 것도 계획의 일환이었다. 1년 정도 시간을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제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검사에게, 그가 나직이 말했다.

“들어오시죠, 칼 린제이.”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스며들듯 구덩이 속으로 사라지는 악마.

칼 린제이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래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연이 끊어진 가족을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며칠 전에 있었던 싸움을 떠올린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훌륭한 실력이었다.

허나 이그넷에 비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형편없는 패배를 당했듯, 그 역시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린 끝에 정신을 잃었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게, 의식하게 만들었지.’

칼 린제이의 기억이 과거를 더듬었다.

바람처럼 나타나서 순식간에 자신을 주저앉힌 뒤,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눈빛으로 사라져가던 이그넷의 뒷모습.

그때의 일과 며칠 전의 일이 교차하자 마음이 들끓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것을 느낀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돌아보게 만들어 주마.”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마.

나직이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끊임없는 다짐과 함께, 칼 린제이가 심연으로 몸을 던졌다.

사제의 등을 바라보며, 햇살이 미치지 않는 어둠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어쩌다 이 길을 걷게 됐는지.

언제부터 이 길을 걷게 됐는지, 제대로 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완연히 어둠에 물든 사제와 그의 모습을, 광대 악마조차 한동안 찾지 못했다.

* * *

이그넷 크레센시아와의 대결이 있고 보름 후.

아이른 파레이라는 긴 명상에 빠져들었다.

무려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계속해서 생각과 고민을 이어 나갔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초조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들어온 새로운 자극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을 골똘히 생각할 따름이었다.

‘아직 한참 부족하구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 그녀가 대단한 검사라는 부분이었다.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룩한 자신이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이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그넷을 이기지 못했다. 패배한 것을 넘어,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방적인 흐름을 겪었다.

재능만을 놓고 비교하자면 자신도, 일리아도 그녀를 넘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잠시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허나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검을 든 이유는 최강의 검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꺾기 위함도 아니었다.

물론 자연스레 일어나는 투지와 경쟁심을 무시할 건 아니었다.

허나 그러한 불길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가져야 할 생각.

허나 잠시 방향을 잘못 들면 잊을 수도 있는 신념.

이를 다시금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비로소 명상에서 깨어났다.

“오빠! 일어났어?”

“아이른! 괜찮아, 아이른?”

“괜찮니?”

염려 가득한 얼굴로 달려온 키릴, 루루, 어머니. 그리고 한 발짝 뒤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그들의 마음이 아이른을 지탱했고, 치유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감사를 담은 자신의 마음 역시, 그들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건강하고 맑은 감정의 교류, 마음의 순환이 과해질 뻔했던 불길을 무사히 잡아 냈다.

그 뒤의 나날은 평범했다.

어떤 날은 검을 수련하고.

어떤 날은 가족들과 나들이를 떠나고.

어떤 날은 일리아와 시간을 보내고, 브랫과 검을 나누기도 한다.

루루와 보내는 시간은 뜸해졌다.

무언가 일이 있는 모양인지 자주 영지를 비우는 그를 보며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먼저 말해 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하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후우우웅!

계절이 바뀌었다.

여전히 아이른의 생활은 변함이 적었다.

검을 휘두르고, 소중한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물론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전보다 일리아를 만나는 빈도가, 브랫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각자의 검술에서 중요한 시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연인으로서의 아쉬움이 있긴 했으나, 버틸 만했다.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일리아가 건넸던 말들이 흐르고 있었고,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고, 검술을 나누고,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나누며 불어난 물줄기가 끊임없이 아이른의 내부를 휘돌았다.

그녀의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나태 공자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마음.

이를 담뿍 머금은 아이른의 토양에서, 조그마한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후웅-!

후우웅-!

또다시 계절이 바뀌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검술 역시 그러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이어 갔으나 눈에 띄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허나 조급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완전히 놓아 버린 것도, 포기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경쟁에 매몰되어 자신을 불사르는 것은 경계할 일이지만, 건전한 향상심과 투쟁심마저 터부시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때 이그넷의 검이 어땠더라.’

그러한 의미에서, 이그넷과 있었던 대련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태 공자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너무나도 강렬한 열기에 고개 숙인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여 현재를 소홀히 했던, 주변을 소홀히 했던 시절의 자신이라면 역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괜찮았다.

더욱 넓어진 물줄기.

그러한 물줄기를 능히 품어 낼 정도로 넓어진, 단단해진 대지.

그러한 마음에 날아든 이그넷의 자극은, 아이른의 세상을 망칠 불길이라기보다는…… 하늘에서 따사롭게 내려오는 햇살과도 같았다.

새싹은 그조차도 양분으로 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후웅

후우웅!

후웅-!

아직은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착실히, 그저 우직하게. 천천히 하루하루 나아갈 뿐이었다.

가끔 실망감도 들고, 어떨 때는 힘에 부쳐 처질 때도 있었으나 길게 보면 잠시였다.

아이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한 마음으로 전진했고, 움직였다.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또다시,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파레이라 가문에 변화가 찾아왔다.

“키릴? 평소랑 옷이 다르네? 어디 외출이라도…….”

“응? 아아! 그럴 일이 있어서.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긴 한데…….”

“그래? 무슨 일…….”

“응! 나중에 얘기하자! 그럼 안녕!”

슈우우웅-!

“…….”

자신의 말을 끊고 황급히 날아가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며, 아이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키릴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틱틱대거나 짜증을 내긴 했어도, 이렇게 귀찮다는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어느 순간부터 자식들을 방치한 채 데이트에 푹 빠지셨고, 루루는 여전히 얼굴을 잘 안 비쳤다.

심지어 마르쿠스도 그랬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챙겨 주던 그마저 새로운 하인들을 관리하느라 바빠진 와중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아이른은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뢰하는 거였다.

예전의, 잠깐이라도 눈길을 떼면 사달이 날 듯 위태로웠던…… ‘나태 공자’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각자의 일조차 제쳐 놓고,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종일 자신만을 쳐다봤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내가 많이 달라지긴 했구나.’

바뀐 건 다른 이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른 자신도 정말 많이 바뀌었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사고와 마음 자체가 훨씬 단단해졌다.

비단 나태 공자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의 막바지였던 로이드 영지 때와 비교해도 그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커다란 신념을 품고 있는 것은 같았지만, 현재가 훨씬 더 안정적이었으니까.

‘더는 조급하지도, 불안하지도. 걱정되지도 않아.’

이루지 못할 꿈을 품은 게 아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시절이 있었다.

분수에 넘치는 신념이었다.

현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드는, 지켜보는 이들조차 피곤하고 지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그 뜻을 응원해 줄 수 있겠는가.

두르칼리에서 ‘영웅의 길’을 걷겠다고 감히 다짐했을 때, 카라쿰이 불같이 화를 냈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그렇다.

여전히 누군가는 오만하다 꾸짖을 수 있는, 그런 목표이자 꿈이지만…….

이제는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을 위해 검을 들고 싶어.”

아무것도 모른 채, 전생의 이야기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다.

완벽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여전히 자신은 모자랐고, 부족했다. 허나 이를 숨긴 채 고독하게 앞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었다.

타인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들이며, 생각과 신념을 교류할 수 있는 여유와 안정된 마음을 갖고 함께 걸어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복도, 주변의 행복도, 더 나아가 세상의 행복도 찾아갈 것이다.

물론 한참 멀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감도 오지 않지만…….

조금 편해지기로 했다.

모든 것이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품은 신념만큼은…….

‘결과뿐만이 아니라 나아가는 과정조차도 가치 있는, 그런 마음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연무장을 떠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명상하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도, 그보다 더 예전에도 항시 품었던 꿈이자 신념.

허나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상세계로 진입한 그의 눈에,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왔다.

‘……나무.’

그것은, 홀로 자라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과 마음을 주고받고, 그로 인해 물길이 흐르고.

이를 거뜬히 품을 수 있도록 넓은 토양을, 단단한 지반을 일궈 내었다.

그렇다.

이것은 혼자서 틔워 낸 싹이 아니라, 함께 틔워 낸 싹이었다.

그렇기에 튼튼했다. 건강했고, 푸르렀다.

아이른이 웃었다.

햇살이 맺힌 잎사귀가 유달리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스르륵……

허리께나 겨우 올 법한 낮은 높이에, 자라나는 속도 역시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허나 괜찮았다. 빠르면 좋지만, 느리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얼마나 올곧게 자라나느냐다.

이를 명심한 채, 아이른이 오행신공을 운용했다. 마음으로 운용했다.

마침내 자리잡힌 다섯 가지 기운.

금(金), 화(火), 수(水), 토(土), 목(木).

형성된 원이 흘렀다.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며 깊이를 더해갔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이그넷과의 대결이 있은 뒤로 1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으로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용사의…… 제전?”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로부터 날아온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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