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다섯 번째 기운 (5)
화륵-!
불길이 인다.
세상 전부를 태워 버릴 듯한, 흑(黑)이라기보다는 적(赤)기사단에 가까운 듯한 붉디붉은 오러.
한 번, 두 번. 뜨거운 숨결을 내뱉은 이그넷이 명멸했다. 순식간에 쏘아진 검격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쒜엑-!
그리고 그었다.
가르고, 휘두르고, 베어 버렸다.
점점 더 속도를 더해 가는 와중에 상대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명료히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오러의 운용, 심리, 의도, 호흡까지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확실히 벽을 넘어섰다.
희게 웃은 이그넷의 검에서 더욱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대륙의 강자들을 상대로 싸워 왔다.
마스터 중에서도 그 강함이 남다른 이들.
그들을 넘어 10대 검사라고 추앙받는 존재들.
마지막으로, 대 악마의 목을 자른 영웅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3대 검사인 이안, 쿤, 율리우스 휼까지.
그녀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으나, 성과는 확실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깨달음의 파도 속에서 이그넷은 자신의 검을 돌아보았고, 보완했고, 완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허물어 버린 뒤 더 커다란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하늘 위의 존재가 될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감을 준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마룡왕의 목을 벤 대 영웅의 유지를 잇는 조슈아 린제이?
대륙의 가장 위대한 검술 스승이자 크로노의 주인인 이안?
그도 아니라면 다른 3대 검사?
이그넷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더욱 강하게 검 손잡이를 잡은 그녀가 몸을 움직였고, 공격을 이어 갔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불의 폭풍.
그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단단하게 서 있는 금발의 검사.
그의 맑고 푸른 눈이 점차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이그넷이 속으로 속삭였다.
‘고맙구나.’
용병대를 결성한 이후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전부터 혼자만의 길을 걸어왔다.
누구도 그녀를 쫓아오지 못했고, 그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믿음은 있었다.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떠받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고독한 왕관을 쓰고도 약한 모습 따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허나 그것은 최선이 아니었다.
홀로 능히 할 수 있더라도,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았다.
모두를 업고 갈 능력이 있더라도, 가끔 업혀 가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1년간의 수행에 돌입한 것도 그러한 생각 덕분이었다.
악마 토벌의 책임에서 잠시 벗어나 개인의 수행을 이어 간 것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존재.
홀로는 결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으나, 수많은 이들과 마음, 신념을 교류하며 지고한 경지까지 올라온 젊은 영웅.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며, 그녀가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흘렸다.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다.’
펑! 퍼벙!
퍼퍼펑! 퍼엉!
이그넷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연쇄적인 폭발, 이를 통한 가속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꺾여서 들어오는 검날의 각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웬만한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기묘한 검술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아이른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제 겨우 1분가량 지났을 뿐인데 눈썹을 타고 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고 강하게 검을 뻗었다.
그것이야말로 제 생각을 트여 준, 시야를 넓혀 준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마친 이그넷은 새로이 쌓아 올린 자신의 검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른의 몰골은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콰아아앙!
“허억, 훅, 크허…….”
그렇게, 깜짝 대련이 시작된 지 약 30분.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허나 아이른의 끝을 모를 체력과 정신력을 생각하면 아주 긴 시간도 아니었다.
허나 더는 싸움을 이어 갈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터지고 갈라진 피부 곳곳에서 피가 흘렀고, 옷이 붉게 물들었다.
터져 나오는 호흡은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하체엔 힘이 풀려 처음처럼 기민한 발걸음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훅 입김을 불면 날아갈 것처럼 위태위태한 컨디션.
“끝났나.”
카라쿰이 조용히 읊조렸다.
쿠바르도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버텨 준 것이 대단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의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지금의 이그넷은 범상치 않았으니까.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뭔가…… 검사로서의 격 자체가 높아진 기분이야.’
쿠바르가 과거를 회상했다.
샬럿과 빅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의 아이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던 둘을 그야말로 압살하며 등장했던 이그넷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찢고, 터뜨리고, 불태워 죽일 것 같은 폭력적이고도 무자비한 분위기는 마치 거대한 불덩이가 코앞까지 짓쳐 드는 듯한 공포감을 심어 줬었다.
지금은 달랐다.
강렬한 존재감은 여전했으나, 마냥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빛과 같은, 그러나 똑바로 올려다볼 수는 없는.
손을 뻗더라도 결코 닿을 수는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존재감.
마치 진짜 태양을 마주한 듯한 느낌에 오크 정령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강해졌다.’
……아이른이 성장한 것 이상으로.
당사자도 아니건만, 쿠바르는 그 사실에 작지 않은 충격과 상실감을 맛보았다.
허나 진짜로 중요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콰아아앙!
“큭……!”
폭발하듯 쏘아지는 상대의 검을 아이른이 가까스로 막아 냈다. 마냥 버티지는 않았다.
충격을 이용하여 멀찍이 거리를 벌린 그가 빠르게 숨을 고르며 이어지는 돌격에 대비했다.
허나 이그넷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지면에 뿌리박힌 듯 단단한 자세를 유지한 채, 오러 운용에 집중했다.
화르르르르륵-!
“……!”
몸 겉으로 드러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진한 오러의 파동.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그녀의 기운이 순식간에 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몇 미터나 늘어났던 오러 소드가 압축되고, 집약되어 구(球)의 형태로 검극에 머물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줄어들며, 밀도를 높여 갔다.
지이이이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길한 소리가 대기를 가르며 아이른의 귀로 꽂혔다.
쿠바르 역시 이를 들을 수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이그넷은 아이른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다.
저건 막아 낼 수 없다. 버텨 낼 수 없다.
친우를 살리려면, 보잘것없는 힘이나마 보태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덥석!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쿠바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이를 부드득 간 그가 정령의 기운을 끌어올려 빠져나오려 했다. 어떻게든 이그넷을 막아야 했다. 자신이 화를 입더라도.
허나 마스터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인 카라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옴짝달싹 못 한 상태에서 이그넷의 검술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퓨슝
찰나의 소음.
퍽
몹시 차분한 타격음.
허나 그 이후에 벌어진 소란은 앞의 조용함을 뇌리에서 날려 버릴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으니.
꽈과과과과과과과광!
“크으아아악…….”
양손으로 귀를 막은 쿠바르가 저 멀리 날아갈 뻔했다.
허나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어느새 앞에 나선 카라쿰이 오행신공을 운용해 충격을 흩어 버렸기 때문이다.
드득, 드드드득!
타닥, 탁, 탁!
부자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한 주변 땅이 움푹 패 스러졌다.
나뭇가지와 돌조각이 비산했다가 우박처럼 떨어졌고, 자욱한 흙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렸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쿠바르가 아버지를 노려봤다.
어째서 자신을 막아섰냐고. 어째서 도중에 개입하지 않았느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몇십 년 만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이른이 목숨의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그리 매정하게 행동할 수 있느냐고.
그러한 말을 하려던 찰나, 카라쿰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봐라.”
아주 짧은 말.
허나 왠지 모르게, 쿠바르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낮은 목소리에서 전해져 오는 신뢰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붉은 구체가 쏘아진 방향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아이른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
정상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넝마가 된 상의가 완전히 뜯겨 나가 맨살이 보였고, 피부 위를 흐르는 핏물이 흡사 시냇물과 같았다.
위에 내려앉은 흙먼지가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막아 냈다.
버텨 냈다.
쿠바르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어. 검술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아이른으로서는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왔었는데…….’
감히 요술사와 견주어도 될 정도로 강렬한 감이었다. 그렇기에 움직이려 했던 거다.
자신의 별거 없는 도움이라도 끼얹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허나 아이른은 무사했다.
엷은 미소까지 띤 얼굴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다음엔…….”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선 채로 정신을 잃어버린 아이른 파레이라.
쿠바르가 황급히 달려가 그를 눕혔다. 그리고 상태를 파악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뜻이었지, 외상은 가볍지 않았다.
주섬주섬 응급처치 도구들을 꺼낸 그가 치료를 시작했다.
“가자.”
“응, 단장!”
“이번엔 안 틀렸구나.”
“아냐라고 맨날 틀리는 건 아니거든! 얍!”
지이이잉-!
아냐 마르타가 포탈을 열었고, 이그넷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봤다.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던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녀석들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겠지.”
희한한 일이었다.
분명 자신과 부대낀 것은, 자신에게 진한 깨달음을 선사한 것은 현재 대륙을 질타하고 있는 상위권 소드마스터들일 진데.
이상하게 자신보다 어린 녀석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린제이 가주의 곁에 있던 은발의 검사가.
쾌검사 쿤의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적발의 검사가.
크로노의 이안과 함께 자리했던 청발의 검사가,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우웅-
허나 이그넷이 향한 곳은 그들의 거처가 아닌,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였다.
앞서 말했듯이,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이른 녀석의 지인들이니. 자신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교류하며 발전해 나갈 터였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다 함께 어울릴 기회가 생겨도 재미있을 것 같구나.’
불과 2년 전에는 절대 하지 못했을 생각을 이어 가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백기사단장을 뵈러 몸을 움직였다.
“…….”
그녀가 떠나간 이후.
카라쿰은 한참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격전이 있었던 장소에 서 있었다.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미 방향을 잡은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과의 대련은 불필요한 일이었을 터. 그녀가 이곳을 찾은 건 온전히 아이른을 위해서였다.
그에게 자극을, 자기 나름의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결과는 괜찮군.’
두르칼리의 대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던 서클(Circle, 五行).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던 아이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그 역시 뒤늦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