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다섯 번째 기운 (4)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는 대륙 최강국이다.
숨겨 뒀던 전력을 포함해 열다섯이 넘어가는 마스터 전력, 그들을 단단하게 받쳐 주는 고위 사제와 엑스퍼트급 기사단원들, 그리고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신도들의 눈.
그야말로 마(魔)에 대적하기 가장 적합한 단체였다.
마룡왕에 비견되는 대 악마인 광대의 출현에 라바트와 팔랑케 왕국이 절망했던 것과 달리, 신성왕국이 침착하게 악마토벌대를 결성했던 건 이러한 이유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악마와 전면전을 벌이는 거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다.
대륙 3대 검사인 율리우스 휼을 필두로, ‘평화의 160년’ 동안 비축했던 힘을 일거에 터뜨린다면 그 어떤 끔찍한 존재라 한들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을 터였다.
허나 악마들은 음습했고, 추잡했고, 끔찍했다. 무엇보다 너무 많았다.
넓디넓은 대륙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서는 힘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고, 녀석들은 그 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조금씩이지만 피해가 쌓여 갔다.
조금씩이지만 혼란이 커져 갔다. 비밀이 새어 나가고, 악마의 태동을 알게 된 이들 역시 늘어났다.
신성왕국은 단독으로 움직이려던 계획을 수정했고, 더 많은 왕국이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소문을 부추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보다 빠르게 악마를 멸절시키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판이었다.
방향을 바꾼 순간 악마들은 더욱 깊이 잠적했고, 다른 존재들이 전면에 드러났다.
계약자.
마인(魔人)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거 들었어? 토르반 산맥에 마인이…….”
“칼벤 쪽에도 나타났다는데. 이거 요즘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성안에만 있어야겠어. 왕국에서 토벌대를 보내면 해결되겠지.”
“모르는 일이야. 듣기로는, 최근 마인들이 늘어난 게…… 악마가 다시 나타나서 그렇다는…….”
“뭐? 그게 진짜야?”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대륙에 휘몰아쳤다.
물론 사회질서가 무너질 정도의 두려움은 아니었다.
평화의 시기 동안 대륙의 전력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전역에 퍼진 검술관 덕에 검사의 수가 대폭 늘어났고, 룬텔 왕국 한정이지만 마법사 전력 역시 엄청나게 상승했다.
전역에 퍼진 교단 역시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직접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으로 인해, 도적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이들이 훨씬 많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시 불안의 씨앗이 심어졌다는 점이 중요하지. 이제는…… 빨리 끝내기엔 늦었어. 이 싸움은 오래갈 거다.’
적기사단의 일원, 크리스토발 블랙웰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사제들의 신앙심이 모여 거대한 기적을 일궈내듯, 민간에 넓게 퍼진 공포 역시 커다란 혼란을 일으킨다.
차원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인간계와 마계를 오갈 수 있는 구멍을 숭숭 뚫어 낼 터였다.
‘……악마와 검을 맞대는 것은, 두렵지 않다.’
거짓이 아니었다.
놈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녀석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따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괜찮았다. 대륙을 위해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거룩하신 신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수 있다면 목숨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그라든다면, 대륙을 떠도는 두려움이 더욱 몸집을 불려 간다면.
그로 인해 마계의 문이 열리고, 더욱 끔찍한 존재들이 인간계로 건너온다면…….
여기까지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저 멀리서, 율리우스 휼이 걸어오고 있었다.
“…….”
“…….”
연무장에 모인 기사 전원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빌리우스에서 가장 신실한 자이자, 신성왕국 최강의 검.
아니.
대륙 제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의 등장에, 크리스토발 블랙웰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50의 나이에 백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라,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장 앞에서 기사들을 이끌었던 존재다.
그런 존재기에 모을 수 있었다. 악에 받쳐 마인을 청소하던, 악마를 추격하는 이들을 전부 소집할 수 있었다.
아빌리우스의 기사들에게 있어서 율리우스 휼은 그 정도로 거대한 인물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고, 희망을 바랄 수 있는.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비책을 전달해 주실지도 모르는 일이지.’
크리스토발 블랙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시야에 다른 이가 끼어든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기운을 발하는 백기사단장이었다.
그렇기에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를 뒤따르는 이가 하나 있다는 것을.
허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조금씩 상황이 바뀌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율리우스 휼의 기세를 뚫고.
성스럽기 그지없는 백색의 성벽을 뚫고, 강렬한 기운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
“…….”
고요가 이어졌다.
여전히 침묵이 이어졌다.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 때문에, 좁지 않은 연무장의 넓이 때문에 더 오래 그렇게 느껴졌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흑백의 기사가 움직임을 멈췄고, 기사들의 시선 역시 중앙에 멈췄다.
그 사이 흑색의 기사는,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더욱 찬란해진 위세로 최강의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작하지.”
대답은 없었다.
스릉-
검을 빼 들었고.
척
자세를 갖췄다.
우우우웅……!
붉은빛의 오러 소드를 발현했고, 율리우스 휼을 쳐다봤다.
몇몇 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허나 넘어가는 것은 없었다.
어느새 연무장을 가득 채운 흑기사단장의 기세가, 그들의 입을 바짝바짝 타들어 가게 하고 있었으니까.
터엉-!
쇄도.
쒜에에에엑-!
그리고 발검. 질풍과도 같은 발이었고, 번개처럼 빠른 공격이었다.
율리우스 휼이 웃었다. 그저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뻐 보이는 노인의 검에서도, 무지막지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 * *
“확실히 효과가 있군.”
“음.”
퀸시 마이어스의 중얼거림에 율리우스 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다. 대련을 보기 전과 후의 기사단원들의 마음가짐이 전혀 달랐다.
잠시 숙고한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게오르그, 자네 말이 맞았어. 무리해서 바쁜 이들을 불러모은 효과가 있다.”
“감사합니다.”
“히히! 우리 대장, 아니, 단장의 멋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힘이 나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 말이 맞다.”
아냐 마르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백기사단장이 생각을 이어갔다.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상대함에 있어 한 치의 두려움도 없는 그였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이야기다.
10년 후의 미래, 20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이어스 선배와 정화단 기사들, 이안과 쿤…… 나와 적기사단장까지도 아슬아슬한 나이라고 보는 게 사실이니까.’
지금 당장 악마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90% 이상의 승산을 확신하는 율리우스 휼이었다.
허나 10년이 지나 정화단 기사들의 수명이 다한다면.
거기서 10년이 더 지나 자신을 비롯한 대륙 3대 검사가 노환을 겪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과연 후배 기사들이 그 공백을 메꿀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점이 왕국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겠지. 하지만…….’
오늘 이후로, 그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직전의 대련을 떠올린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희망.”
그렇다.
오늘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패배했다.
허나 그로 인해 드러난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지금 당장 3대 검사의 자리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아니, 그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신뢰.
대륙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마(魔)를 절멸할 거라는 믿음!
이러한 마음은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터였고, 악마들을 약하게 만들 터였다.
“잠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퀸시 마이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분위기던 율리우스 휼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라면 큰일이지 않은가.
허나 걱정할 필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잠시 후, 백기사단장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기사단원들에게만 보여 줄 필요 있습니까?”
“무엇을?”
“흑기사단장의 검 말입니다.”
“음?”
“이그넷 경의 검술, 실력, 잠재력, 그로 인한 희망.”
“…….”
“이를 우리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가 널리 알 수 있도록 한다면. 그런 자리를 만든다면…….”
세상에 퍼진 두려움보다 더욱 큰 희망을 전하는 것도.
그로 인해 벌어지는 마계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퀸시 마이어스의 눈이 크게 떠지는 순간이었다.
황급히 달려온 평기사 하나가 그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흑기사단장이 사라졌다고? 잠깐…….”
전대 적기사단장이 주변을 살폈다.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아냐 마르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몸도 성하지 않을 텐데 어디를…….”
“괜찮을 겁니다.”
율리우스 휼의 즉답.
퀸시 마이어스가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흑기사단 부단장, 게오르그 포이베를 쳐다봤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걱정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디, 너무 큰 자극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 * *
“오랜만에 봐서 정말 즐거웠네. 다음에 또 와도 반겨 줄 거지?”
“하하, 당연하죠.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여러 명의 강자가 모였던 날로부터 얼마 뒤.
일리아 린제이를 비롯한 모두가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파레이라 영지를 나서는 쿠바르&카라쿰 부자를 향해 아이른이 미소를 건넸다.
이별의 순간은 항상 아쉬웠다. 허나 슬프지는 않았다.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더욱 환한 웃음으로 상대를 보내 주었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이잉-
허공에 선이 그어졌다.
정오의 밝은 햇살보다도 훨씬 선명한 빛.
이는 이내 사람 여럿이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확장되었고, 소녀 하나를 토해 내었다.
아냐 마르타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쿠바르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탁
그 사이, 또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대륙에서 보기 힘든 흑발을 길게 흩날리는, 전과 같이 강렬한 분위기를 품은 존재.
상대를 확인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이그넷!”
스르르릉……
철컥!
카라쿰이 오행신공의 기운을 운용했다. 해머와 도끼로 나뉘어 있던 금속이 하나의 거대한 양날 도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 쿤, 린제이의 가주까지 찾아갔었다지.’
오크족 특유의 투기가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틀렸다.
대결을 청하러 찾아온 것은 맞았지만, 그 대상은 두르칼리의 대전사가 아니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이그넷이 카라쿰을 지나쳤다. 오크들이 당황하건 말건 시선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녀가 말했다.
“한번 붙어 볼 테냐?”
우우우우우웅-!
강렬한 오러를 뿜어 내면서.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발언이었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휘둘리지도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안정된 모습으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응시하던 그가, 요술대검을 소환해 냈다.
우우우우웅-!
“한 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