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다섯 번째 기운 (3)
“…….”
“…….”
파레이라 영지의 접객실에 아홉의 손님들이 모였다. 사전에 계획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하나같이 쟁쟁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이었다.
크로노의 주인 이안.
그의 영원한 호적수 쿤.
이 둘의 이름값만 해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헌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서부 5왕국의 최고수라 알려진 조슈아 린제이와, 오크족을 통틀어도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대전사 카라쿰.
그리고 그들 이상의 잠재력을 가졌다 평가받는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크로노의 황금 세대를 이끄는 브랫 로이드.
‘앞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제트 프로스트 역시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실력자지. 아이른, 원래도 대단했지만 이젠 정말로 거물이 됐구나.’
손님들의 면면을 살펴본 정령사 쿠바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예비 수련생 시절을 함께했던 일리아와 브랫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굉장히 일찍 아이른과 연을 맺은 편이다.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몇 년 전의 아이른은 단단한지만 통제할 수 없는 쇳덩이를 품은 채 하루하루 방황하던 존재였으니까.
그랬던 그가,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더는 불안한 느낌이 보이지 않는다.
초조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새로이 품은 커다란 뜻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달라졌다?
그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른은 여전히 선한 눈빛으로, 푸근한 미소로 자신을 반겨 주고 있었으니까.
‘그릇이 넓어졌다, 올곧게 성장했다…… 이런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 내 깜냥에 아이른을 평가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마친 쿠바르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른 역시 마주 손을 뻗어 악수를 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간단한 인사.
허나 섭섭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진했으니까.
“쿠바르, 오랜만이에요. 사실 그리핀을 타고 두르칼리에 한번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엇갈렸더라고요.”
“그러게 말이야. 괜히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편지라도 보낼 걸 그랬어.”
“괜찮아요.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카라쿰 님도 오랜만입니다.”
“으음.”
카라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워낙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보니 부족에서만큼 편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정쩡하게 싸움을 중단한 상태다 보니 뒷맛이 개운치 않은 면도 있었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쿠바르가 슬쩍 무언가를 꺼냈다.
술병이었다.
“두르칼리에서 만든 전통주입니다.”
“…….”
“가볍게 한 잔씩, 어떠십니까?”
“찬성입니다.”
“흐음.”
브랫 로이드가 재빨리 입을 열었고, 조슈아 린제이가 나쁘지 않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이들도 딱히 반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쿠바르가 3병을 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눈치 빠른 하인이 잔과 얼음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조금 이른 시간의 음주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네. 그러니까 그때…….”
“음. 생각보다 산미가 있는데? 탄산감도 느껴지고…….”
“자네, 술 좀 아나?”
“안다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자주 즐기는 편이긴 합니다, 가주님.”
“아이른, 그런데 루루는 왜 안 보여? 키릴은?”
“아, 루루는 요즘 잘 안 보여. 뭔가 따로 하는 게 있나 봐. 키릴은 랜스 만나러 갔고.”
“아아…….”
“…….”
“…….”
조금씩 대화의 물꼬가 트이며 어색함이 사라지는 가운데, 제트 프로스트와 존 드류만이 섞이지 못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제트 프로스트는 그렇지 않았다.
친한 이도 없고, 살가운 편도 아닌 그였으나 브랫과 쿠바르에 비견될 정도로 애주가인 그였다.
그 때문에 낯선 지역의 술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존 드류는 그럴 수 없었다.
술에 취미가 적어서?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격지심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일까?’
지금 손님방에 모여 있는 이들은 자신을 포함해 전부 열 명.
그중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존재가 무려 8명이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륙에 100명 정도밖에 없다고 알려진 마스터 중 10분의 1에 가까운 인원이 이런 시골 영지에 몰려 있다니!
물론 최근 마스터의 숫자가 늘어나 150은 넘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긴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건 사실이었다.
‘나도, 나도…… 나름 잘 나가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존 드류가 힐끔 테이블의 건너편을 쳐다봤다.
쿠바르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마스터가 아닌, 이곳에 모인 이들에 비하면 이름값이 떨어지는 존재.
허나 그조차도 자신과는 달랐다.
오늘의 주인공인 아이른 파레이라의 정신적인 스승 포지션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대전사 카라쿰의 아들이자, 두르칼리의 족장 타라칸의 형이라는 점!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귀한 혈통을 타고났다는 점!
결국, 능력도 배경도 없는 존재는 자신이 유일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못난 녀석이었다.
백조들 사이에 낀 미운 오리.
아니, 그보다 훨씬 모자란 개구리 같은 존재.
몰아치는 슬픔 속에서, 존 드류는 파레이라 영지까지 찾아온 자신의 선택을 깊이 후회하였다.
그때.
쿠바르와 회포를 풀던 아이른이 따스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존 드류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어? 선생?”
“선생님 맞지 않습니까. 아직도 선생님께 배운 심리전과 수 싸움이 머릿속에 생생한데…… 아아, 말을 너무 딱딱하게 하긴 했네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났다 보니 조금 어색해서…… 하하.”
“아, 어…… 그, 그렇지. 조금 더 편하게 해도 되지, 예전처럼, 예전처럼. 하하하…….”
존 드류가 굳은 얼굴로 웃었다.
고마웠다. 거물들 사이에 낀 쭉정이에 불과한 자신을 신경 써 주는 아이른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허나 착각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이런 걸로 기고만장해져서 신나면 안 돼.’
존 드류가 과거의 일 몇 개를 떠올렸다.
주로 여자와 관련된 기억이었다.
자신이 건넨 농담에 상대가 예의상 웃어 주고, 그것도 모른 채 잔뜩 신이 나서 더 많은 헛소리를 늘어놓고, 목소리는 높아지고, 말은 빨라지고, 여자 쪽 표정은 조금씩 썩어 가고…….
이번에는 그래서는 안 됐다.
주제 파악을 잘해야 했다.
괜히 상대가 호의를 보인다고 선을 넘었다간, 친한 척을 했다간.
그랬다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정식으로 검술관을 냈다고 들었어요.”
“어?”
“아, 아닌가요?”
“아니, 맞는데…….”
존 드류가 당황했다.
숨겼던 사실은 아니다. 실제로 자신의 검술이 진일보했다는 걸 느꼈고, 확신이 생겼다.
터도 확보해 뒀다. 아이젠마르크트에서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륙 서부의 일일 뿐.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파레이라 영지에서까지 알고 있으려면, 그저 들려오는 소문만을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큰 관심이 필요했다.
‘……어쩌면 나, 생각보다 아이른하고 친한 거 아니야?’
그러한 생각이, 그의 땅굴을 파고 들어갔던 자존감을 조금씩 높여 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른과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단순히 안부와 근황을 묻는 수준이 아니라, 검술에 대해, 특히 존 드류가 깊이 파고든 분야 쪽으로 흘러가는 화제.
이에 다른 이들도 귀를 기울였다.
무려 마스터들이 보이는 관심에 그의 자신감이 다시 쭈그러들려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존 드류 씨의 사고 전개는 저보다 훨씬 자유롭네요.”
“으, 응?”
“똑같은 위기 상황이 주어져도 훨씬 다양한 방식의 해결책이 나오니까요. 개중 몇 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쪽이고, 접근법인데…….”
“…….”
가식 없이, 진심으로 상대의 검술 철학을 이해하고 감탄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의 태도에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전보다 훨씬 열의에 차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내는 존 드류.
그리고 그런 흐름에 합류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제트 프로스트.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대전사 카라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쇠(金)와 불(火)을 넘어 물(水)…… 그리고 땅(土)의 기운에까지 접어들었다.’
대화란 단순히 언어가 오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교류다. 감정의 교류였으며, 서로가 품은 마음의 교류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은 물과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흐르고, 번지고, 젖어 들게 만들고.
그렇기에 과해지면 문제가 생긴다.
‘타인의 감정에 물들어 자신의 색을 잃고, 타인의 감정에 젖어 들어 자신의 마음조차 지쳐 버리는 것이지. 무거우니까. 또 혼란스러우니까. 그것이 두렵기에 다들 교류의 문을 닫는 것이고.’
허나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존재들 사이에서, 당당히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더 나아가 닫힌 마음마저 열어젖히게 한다.
굳건한 지반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철과는 다른 종류의 단단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끈히 만인의 감정과 뜻을 품어 가는 젊은 영웅의 모습을 보니…….
‘……굳이 내가 거들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다섯 정령의 기운(五行)을 완성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긴, 애초에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뿌리는 같을지언정, 현재 아이른이 키워 나가는 힘은 두르칼리의 것과 꽤 차이가 있으니까.
그저 지켜보자.
싹을 틔우는 것을.
희미한 웃음을 지은 카라쿰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술을 들이켰다.
“자네는 안 마시나?”
“안 당긴다.”
“희안하군. 틀어박혀 있을 때라면 몰라도, 오랜만에 외출인데 술을 마다하다니…….”
“너나 마시든가.”
“나는 원래 술보단 차를 좋아하니까. 그보다…….”
대전사 카라쿰과 달리, 이안과 쿤은 아이른의 성장에 크게 감탄하지 않았다.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거듭나고 있는지. 그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젊은이들 모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자리에 없는 주디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이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목소리를 낮춘 이안이 빙글거리며 속삭였다.
“저 둘.”
“누구?”
“아이른하고 일리아. 자네도 듣지 않았나? 연인 사이라네.”
“듣긴 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니, 재밌지 않나? 연을 맺은 지 반년도 훌쩍 넘은 20대 청춘들이, 아직도 저런 풋풋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게 말이야.”
“오지랖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쿤 역시 이안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여럿이 함께다 보니 심하게 티를 내진 않는다.
허나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달라지는 표정만은, 눈빛만은 어쩔 수 없었다.
100살이 넘은 노인조차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다만…….
“저게 뭐야?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음?”
“그렇잖아. 꼬맹이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저렇게 풋풋하게만 있을 건데?”
“허허, 트집이 심하군.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뭘 할 수 있겠나?”
“분위기만 봐도 알지. 다른 곳에서도 똑같아.”
“허허허…….”
할 말이 없어진 이안이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해도, 둘이 따로 있다고 화끈한 뭔가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이는 두 노인들만의 의견일 뿐이었다.
조용히 술을 마시며, 귀를 열고 둘의 속삭임을 엿듣던 브랫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시는구만.’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재차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단번에 들이켰다.
보고 싶다, 주디스.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시각.
악마 추적을 위해 각지에 퍼져 있던 신성왕국의 토벌대원이, 전원 수도로 집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