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다섯 번째 기운 (2)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존 드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알았다. 어째서 파레이라 영지의 문지기가 자신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지.
어째서 제트 프로스트의 이름을 듣고도 그저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이렇게 많은 마스터를 봐 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것도 그냥 마스터가 아니었다.
연무장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 깜짝 놀랐다.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최근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브랫 로이드.
둘 다 젊은 것을 넘어 어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다.
대륙의 3대 검사인 이안조차 25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으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눈앞의 둘은 그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마스터들조차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격이 다른 천재.’
그런 대단한 이들이, 잘 알려지지도 않은 약소국의 변방 영지에서 대련을 하고 있다고?
허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훨씬 놀라운 존재들은 따로 있었다. 존 드류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느새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조슈아 린제이, 그리고 대전사 카라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대륙의 10대 강자 중 둘이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 숨조차 쉬기 힘든 압박감이 전해졌다.
“……어쩌면, 오늘 좋은 구경 할 수도 있겠군.”
제트 프로스트의 중얼거림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의 눈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전에 악연이라도 있던 것일까?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크와 인간이 서로를 존중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신성왕국이 대륙의 패권을 잡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위대한 검술 가문의 가주와 오크족의 최고 전사라면 서로가 서로를 피해야 하는 관계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투사 대 투사로서.
강자 대 강자로서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픈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었다.
둘은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고,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퍼어어어어엉!
“큭!”
“으읏…….”
존 드류와 쿠바르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검술 쪽에서, 정령 분야에서 나름 한가락씩 하는 둘이었다.
허나 두 절대자의 격돌을 가까이서 지켜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둘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고, 제트 역시 그들을 따랐다.
일리아 린제이와 브랫 로이드 역시 대련을 멈추고 조슈아와 카라쿰의 격돌을 관전했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베고 찌르는 느낌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부수기 위해 몽둥이로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야만적이고도 원시적인 힘 싸움이 주변을 폐허로 만들었다. 지면이 재해라도 만난 듯 처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그러한 국면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조슈아 린제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순간부터였다.
‘린제이 가주가 밀린다!’
제트 프로스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들은 것은 많다.
가주의 하늘검은 폭풍과도 같아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고.
반면 이를 상대하는 쪽에서는 바람을 후려치는 듯 공허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뒤로 물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반대였다.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오크 대전사의 폭력성이 바람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그것을 증명하듯, 땅에 못 박힌 듯하던 카라쿰의 발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퍼엉!
공기가 터진다.
퍼어어엉!
공간이 터져 버린다.
상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듯 강렬한 공격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때마다 조슈아는 겁에 질린 야생동물처럼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뒤로 향하는 발걸음이 하나에서 둘, 셋 이상으로 늘어 갔다.
어느새 연무장의 구석에 몰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카라쿰이 도끼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앙!
대지를 반으로 쪼개 버릴 듯한 강격!
허나 실패였다. 조슈아의 걸음이 또, 또다시 뒤로 향했다. 지켜보던 제트 프로스트와 존 드류의 시선이 멍해졌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적어도 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자유롭게, 허나 흩날리지 않게.
묵직함과 경쾌함을 함께 품은 채로, 하늘 위로 날아오른 가주가 충격파를 타고 한참 뒤로 물러섰다.
그때부터 싸움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아아아아압!”
뜨거운 기합과 함께, 조슈아 린제이가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이 아니었다.
감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공격이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쏟아져 내렸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무지막지한 참격, 참격, 참격!
마치 천공을 상대하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카라쿰이 사납게 웃었다. 지축이 울릴 듯 강하게 발을 굴렀고, 낮은 자세를 갖췄다.
찰나지간,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복압을 유지한 그가 무아지경으로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엉!
펑!
퍼버버버버버버버벙!
“큭……!”
고막이 떨어져 나갈 듯한 폭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아니,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러로 귀를 보호한 제트가 옆을 쳐다봤다.
존 드류와 쿠바르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고, 그의 일행들은 이미 연무장 밖으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브랫 로이드는 그렇지 않았다.
일리아 린제이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잠시 그들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싸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타하아아아아앗!”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참격이 쏟아졌다. 오러와 강풍을 잔뜩 머금은 공격이 쉴 새 없이, 쉴 틈 없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카라쿰이 서 있는 곳 주변이 움푹하게 깎여 나갔다.
마치 사과 꼭지만 남은 듯 좁은 지면이 그의 위태로운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니었다.
그는 위태롭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강력한 태풍이 몰아치건만, 자세를 낮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안정되어 보였다.
마치 깊숙이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말이다.
‘인내심 싸움인가.’
제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카라쿰은 멀쩡했다.
앞으로도 한참 더 모진 바람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함이 엿보였다.
린제이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여력이 있어 보였다.
계속해서 강해지는 바람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허나 싸움은 제트 프로스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잠시, 아주 잠시 조슈아 린제이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중심을 바짝 낮추고 있던 카라쿰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대지에 뿌리박힌 나무에서 쇳덩이로. 그리고 그것을 예리하게 가다듬을 불꽃으로.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도를 보인 대전사가 비단 폭을 찢어가듯 날렵하게 허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쒜에에에엑-!
퍼어어어어엉!
린제이 가주의 대처 역시 기민했다.
바람을 찢고 쇄도하는 상대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역수로 검을 잡은 그가 허공에 이를 내려찍자, 가죽 북 수십 개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이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직선으로 쏘아지던 카라쿰의 신형이 아주 조금 옆으로 틀어졌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알맞은 타이밍에 회피에 성공한 가주는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검풍을 날렸고, 카라쿰은 불과 쇠의 기운을 거두고 물의 정령을 받아들였다.
출렁
부드럽게 공격을 흘려 버린 대전사 역시 바닥에 착지했다.
엉망진창이 된 연무장 위로, 두 절대강자가 재차 사나운 투기를 흩뿌리던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하지.”
“…….”
“……!”
새로이 등장한 노인의 얼굴을 본 제트 프로스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존 드류는 그보다 한술 더 떴다.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새고 있는데도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허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주 이안.
대륙에서 가장 강한 3명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존재까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곳이야, 여기는……!’
“이안 관주님을 뵙습니다.”
“……관주, 오랜만이군.”
“허허, 그렇지. 둘 다 오랜만이오. 특히 대전사 양반, 자네는 한 50년 만에 보는 것 같군. 그래도 다행이야. 죽기 전에 이렇게 다시 얼굴도 보고, 좋구만.”
“……해후는 나중에 하지. 보다시피 할 일이 있어서.”
말을 마친 카라쿰이 양날 도끼를 치켜올렸다.
조슈아 린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격전으로 인해 머리칼이 흐트러진 상태였으나, 몸 상태는 멀쩡했다.
흉흉한 눈빛은 이안이 아닌 오크족 대전사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둘이 재차 싸움을 이어 가려 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스르릉
교묘하게 사이에 끼어든 이안이 검을 빼 드는 순간, 둘은 전보다 훨씬 큰 압박감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만 하지.”
“…….”
“딱히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러다가 영지 다 부서지겠어.”
“이미 다 부서졌는데, 굳이 멈출 필요가 있나?”
“……!”
“……!”
“……!”
이번에는 존 드류와 제트 프로스트, 둘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브랫과 일리아, 쿠바르는 물론이고 싸움의 당사자들인 대전사 카라쿰, 린제이 가주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을 다루는 또 하나의 절대강자가 파레이라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존 드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놀랄 기력도, 말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그는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이제는 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약간 실성한 듯한 표정이 되어, 멍하니 연무장의 중앙을 바라봤다.
존 드류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황은 꽤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싸움을 말리려는 이안.
그런 그를 말리려는 쿤.
조용히 시작했던 둘의 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격해졌다. 험한 말이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약간, 아주 약간의 자극만 더해진다면…….
린제이 가주와 대전사 카라쿰의 싸움보다도 더 격렬한 일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걸 응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트 프로스트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보고 싶었다.
직전의 싸움만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받은 그였다.
대륙 10대 강자끼리의 대결이라니, 그야말로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구경거리가 아닌가.
허나 그런 그들의 싸움조차도, 이안과 쿤의 대결과 비교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의 싸움을 제대로 관전할 수 있느냐는 다른 얘기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절로 떠올랐다.
그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연무장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인데, 둘이 격돌한다면 영주관 전체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저 둘을 막을 수도 없는데.
‘아니, 저 둘은 물론이고…… 카라쿰과 린제이 가주도 막을 수 없지. 아마…….’
저들조차도.
일리아와 브랫이 서 있는 곳을 힐끔 쳐다본 조슈아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고민할 필요 없다. 상황을 주도할 깜냥이 없다면 그냥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
어쩌다 보니 존 드류와 비슷한 결론을 낸 제트가 다시금 이안, 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저 멀리서 조용히 걸어오는.
햇살을 품은 듯 따스한 금발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허나 이 자리의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듯한 단단함이 느껴지는 이.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다툼은 여기까지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
“…….”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싸움의 주인공이 아닌 제트와 쿠바르, 존 드류, 브랫, 일리아는 물론이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는 가주와 대전사의 눈빛도 그를 향해 거칠게 날아들었다.
이안과 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쿤의 경우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비협조적인 표정까지 더해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음…….”
아이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단단하며 차분한 분위기로,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춘 그가 재차 말했다.
“집주인은 아니지만, 집주인 아들의 말인데…….”
“…….”
“…….”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어조.
허나 말에 실린 힘은 부족하지 않았다.
결과가 이를 증명했다.
헛기침하며, 딸의 표정을 살짝 확인하며 검을 집어넣는 조슈아 린제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묘한 눈빛으로 아이른 쪽을 연신 쳐다보며 무기를 내려놓는 대전사 카라쿰.
풀풀 웃으며 검을 집어넣는 이안 관주와, 이러한 분위기가 마뜩잖으면서도 흐름에 순응하는 쿤.
비로소 찾아온 평화 속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존 드류가 생각했다.
‘겁나…… 있어 보여…….’
눈에는 선망의 감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