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다섯 번째 기운 (1)
“흐음, 앞으로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면…… 도착인가?”
대륙 중부의 평원을 여유로이 걷고 있는 사내.
그의 모습은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목에 세 개씩이나 걸려 있는 황금 목걸이.
고급스러운 재질에 고급스러운 자수로 꾸며져 있는 고급 의복.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값비싼, 왼손에 차고 있는 드워프제 손목시계.
바로 아이젠마르크트의 최고 검술 강사, 존 드류였다.
물론 이러한 차림으로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비교적 치안이 좋은 대륙 중부라고는 하나, 범죄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최근 대륙의 상황이 어떤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포해진 몬스터.
과거에 비견될 정도로 폭증한 마물,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는 마인들.
그런 불온한 분위기 덕분에 도시를 오가던 여행자들이 급감했고, 상인들은 실력 좋은 용병을 구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 정도의 실력자라면, 문제 될 것 없지. 암, 그렇고말고.’
존 드류가 씨익 웃었다.
물론 호위를 대동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변수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니까.
허나 그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었으니, 그것이 예전과 가장 달라진 점이었다.
재능의 격차를 메워 주는 화려한 꼼수.
오러의 총량을 무시하는 압도적인 수 싸움.
그렇다.
비로소 ‘존 드류 식 검술’을 완성한 그에게 있어서, 남의 시선과 눈치만 잔뜩 신경 썼던 못났던 자신은 이미 과거일 뿐이었다.
여전히 화려한 장신구를 좋아하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른 파레이라……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그가 검투사들의 천국, 아이젠마르크트에서 한참 떨어진 파레이라 영지를 찾아가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깨달음을 아이른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고, 돈에 집착했던 자신이다.
헌데 어째서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
돈을 받기는커녕, 가는데 한 달도 훨씬 넘는 거리를 움직이며 파레이라 영지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존 드류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나라는 사람을 가장 인정해 준 사람.’
자신의 검술을 누구보다 훌륭히 소화했으며.
자신의 검술에 누구보다 진심 어린 감탄을 쏟아 냈던 사람.
그것이야말로 금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미 마스터에 오른 실력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움 될 구석은 분명히 있을…… 으음?”
그때였다.
존 드류의 귀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도적단인 것 같다. 가 보자.”
“예, 알겠습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싸움에 끼어든다니, 평범한 용병들이라면 내키지 않았을 행동이다.
허나 존 드류와 함께한 이들은 대부분 그에게 검술 조언을 받은 제자와 다름없는 이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이는 다른 이를 돕는 데 있어서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순식간에 말을 몰아 격전지로 이동했다. 어느새 빼든 검이 햇살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허나 그것을 휘두를 기회는 없었다.
써걱-
“크아아악!”
서겅-
“끄아아아어!”
일검, 그리고 또 일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도적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몸을 뉜 이들이 열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습격당한 사내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에 도적단을 전멸시켰다.
허나 존 드류 일행 중 누구도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놀란 부분은 따로 있었다.
검날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백색의 광채.
오러 소드를,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존 드류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101번째 검사, 제트 프로스트!”
“이젠 101번째는 아니오.”
“아, 그렇지.”
멋쩍은 미소를 지은 그가 제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강하게 악수하며, 둘이 인사를 나누었다.
“존,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이오. 한…… 10년 됐나?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에…….”
“으음, 파레이라 영지에 가고 있었네만…….”
“응? 파레이라? 그대도?”
자연스레 일행에 합류한 제트, 그리고 그의 파레이라 행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존 드류.
둘은 순식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같은 이유로 아이른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존 드류가 말했다.
“하긴, 그 청년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갖고 있긴 하지.”
“맞는 말이오.”
제트 프로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의 대련을 본 뒤,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갔던 그였다.
허나 그 뒤에도 아이른을 못 보고 왔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그가 보였던 열정과 노력, 검에 대한 재능과 알 수 없는 매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또다시 찾아온 벽을 깰 단서를 찾기 위해?
그런 이유도 분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냥,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으음, 맞군. 따지고 보면 나도 그 이유가 가장 큰 것 같소.”
존 드류가 동의했다.
동시에, 그의 어깨에 조금씩 힘이 차올랐다.
생각해 보니, 지금 자신의 상황이 굉장히 ‘있어 보인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와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라니!’
전보다 남의 눈치를 덜 보고, 오롯이 자신의 장점을 마주하게 된 존 드류다.
허나 완전히 예전 성향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없어 보이기보다는 있어 보이고 싶었고, 잘난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는 현재 상황에 벅찬 기분을 느꼈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어깨가 올라간 존 드류가, 살짝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 * *
소드마스터 제트 프로스트와 합류한 이후, 존 드류의 행동거지는 조금 더 당당해졌다.
가게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의 목소리도 조금 더 굵어졌고, 성문 검문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조금 더 거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제트 프로스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나름의 명성이 있는 존재였다.
최근에 가르친 몇몇 엑스퍼트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과연, 존 드류 님! 대륙 중부에서도 이렇게 유명하실 줄이야…….”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허허, 뭘 이 정도 가지고. 옆에 제트 프로스트 선생이야 대단한 게 맞지만, 나 같은 무지렁이는…….”
이렇게 겸양을 떨면서도, 표정을 숨기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목적지인 파레이라 영지에 도착했을 때도 조금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중부의 소국.
그중에서도 남작위 정도밖에 안 되는 영지라면, 자신 정도의 거물이 방문했을 때는 꽤 소란이 일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검문은 빠르고 신속하게 끝났다.
“통과.”
“…….”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음…… 아니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건조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문지기를 보며, 존 드류가 성문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봤는데, 놀랍게도 제트 프로스트 역시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존 드류는 당황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제트 프로스트는 차원이 다른 유명인이다.
마스터가 되기 전에도 대륙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그였으니, 문지기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어째서 저 문지기는, 자신과 제트를 흔한 방랑기사 보듯 담백하게 대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성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존 드류가 재차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뭐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문지기와 주변인들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이윽고 인파를 뚫고 두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존 드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하나는 낯이 익고, 다른 하나는 아니다.
그러나 후자 역시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2미터를 한참 넘는 거대한 키에, 아름드리나무가 떠오를 정도로 커다란 흉통,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뿜어내는 거대 도끼에, 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정도로 강렬한 분위기.
대전사 카라쿰이었다.
오크족 최고 영웅의 등장에, 그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존 드류 선생, 제트 프로스트 경!”
“아, 아아! 쿠바르! 오,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올시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쿠바르를 보며, 존 드류와 제트 프로스트가 마주 인사를 건넸다.
허나 편하게 하지는 못했다.
쿠바르의 뒤에 바위처럼 서 있는 카라쿰을 보고 있자니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쿠바르가 그런 분위기를 해소할 정도로 넉살 좋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거였다.
“하하, 그렇구만. 이거 참 기막힌 우연이군. 우리도 아이른을 보러 왔는데 말이지.”
아이른 일행이 두르칼리를 떠나고 얼마 후, 쿠바르와 카라쿰 역시 부족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혹시라도 있을 파벌 싸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부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둘에게 꽤 뜻깊은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어느새 헤일 왕국까지 오게 됐고, 뭐 그렇게 된 이상 한번 들르는 게 좋겠다 싶어서 말이오.”
“아아, 그, 그렇군…….”
존 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며 쿠바르의 말에 대꾸했다.
허나 신경은 온통 카라쿰을 향해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허나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묵직한 눈빛으로 자신, 그리고 제트 프로스트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그, 저, 다 왔구만! 빠, 빨리 아이른이 보고 싶은데?”
“으음, 나도 그렇다네.”
생각을 마친 존 드류가 영주관 쪽을 가리켰다. 제트 프로스트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실력의 엑스퍼트, 그리고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둘이었으나 카라쿰의 분위기를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만큼 아이른의 편안한 얼굴이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둘이 그런 상황이니 다른 일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카, 카라쿰 님? 그, 두르칼리의 대족장 카라쿰 님 말씀이십니까?”
“이젠 아니다. 지금 족장은 내 아들, 타라칸이다.”
“아…… 알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순식간에 일행의 주인공이 바뀌어 버렸다.
그 사실에 존 드류의 기분이 조금 미묘해졌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우선 파레이라 가 하인들의 태도였다.
대전사 카라쿰이라는 거물 중의 거물이 등장했는데도 이토록 침착한 모습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당황한 기색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얌전한 반응이야. 도대체 어떻게?’
아무리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20대 초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대단한 도련님을 모시고 있다고 해도……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 맞는 건가?
허나 이보다도 더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카라쿰의 태도였다.
하인의 안내조차 받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생길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무슨 일로 저 괴물 같은 작자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등에 둘러멨던 도끼를 손에 쥔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후웅!
후우웅-!
콰아아앙!
“크윽!”
“후우…….”
“…….”
“…….”
이제 겨우 스물을 넘었을까?
앳되기 그지없는 청춘들이 연무장 한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를 본 존 드류의 동공이 흔들렸다.
평소라면 후배 검사들이 노력하는 모습에 귀엽다는 반응을 보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푸른 머리 청년의 검에서도.
은발을 휘날리는 처자의 검에서도.
하나같이 휘황찬란한 오러 소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보다 더 강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
“…….”
두 소드마스터의 대련을 잠자코 지켜보던, 또 다른 은발의 검사.
그가 저벅저벅 카라쿰을 향해 다가왔다.
카라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무거운 기운을 흩뿌리며 몸을 움직이는 오크 영웅.
시대의 걸물 둘이 3미터 간격을 두고 마주한 순간, 존 드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내가 낄 곳이 아니었나?’
제트 프로스트.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조슈아 린제이.
대전사 카라쿰.
마스터들이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기세에 짓눌린 그가, 몹시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