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가장 위대한 엑스퍼트 (2)
“…….”
대륙의 101번째 검사.
아니, 이제는 어엿한 소드마스터가 된 제트 프로스트가, 며칠 전의 일을 상기했다.
20대 초반에 위대한 경지에 도달한 마스터 브랫 로이드.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지만, 그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다고 판단했던…… 엑스퍼트 주디스.
두 검사 간의 놀랍기 그지없었던 대련.
이윽고 회상을 마친 그가 푸후우, 참았던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군.
억지로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이 났다.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밥을 먹을 때도, 걸음을 옮길 때도, 잠을 자기 전에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의 싸움은 제트 프로스트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예상 밖의 결과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설마, 엑스퍼트가 마스터를 꺾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물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극히 희귀한 일이긴 하지만, 역사상 엑스퍼트가 마스터를 이겼던 전례가 없지는 않다.
엑스퍼트의 극에 달한 검사는 마스터와 검술에서의 차이가 크지 않으니까.
오러 소드의 파괴력을 견뎌 낼 만큼 훌륭한 검을 가지고 있더라면, 그리고 얼마간의 운이 따른다면…… 주디스가 승리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허나 당시의 싸움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운’이 아니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제트 프로스트가 보기에.
아니, 자신이 아닌 그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일방적인 결과.
당시의 그녀를 다시 한번 떠올린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쿤 님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검의 천재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소드마스터의 경지다.
허나 개중에도 재능의 차이는 있었다.
누군가는 20대에 경지에 도달하는 한편, 쿤과 같은 경우는 70세에 겨우 오러 소드를 발현하였다.
그렇기에, 호사가들은 그의 재능이 마스터 중 가장 별로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게 맞을 수도 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허나 일주일 전의 싸움을 보고 확실해진 사실은.
쿤과 주디스, 두 검사의 경지는……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엑스퍼트 - 마스터의 틀과는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오러 소드는 검의 궁극으로 향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어. 그보다 효율적이고 위력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갈고닦아 극한의 경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엑스퍼트와 마스터의 구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스터가 되기 전의 쿤 님도, 평범한 마스터 정도는 압도할 정도로 강했을지도 모르겠군…….”
제트 프로스트의 고민이 깊어졌다.
마스터에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를 이루었다.
허나 만족할 수 없었다.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전혀 다른 것처럼, 그는 어느새 더 높은 경지를 꿈꾸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새로이 제시된 방향성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앞의 감정들보다 훨씬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흠.”
그렇듯, 또다시 주디스의 검술을 떠올리던 제트 프로스트가 표정을 굳혔다.
문득 브랫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가 현재 품고 있을 감정과 생각 말이다.
‘엑스퍼트에게 진 마스터…… 충격이 매우 크겠어.’
마스터에게 이긴 엑스퍼트가 손에 꼽을 만큼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 반면.
엑스퍼트에게 진 마스터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주디스와 쿤, 두 검사의 경지를 그런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브랫 역시 알 만한 사람이라 해도, 감정적인 부분은 별개의 문제일 터였다.
“……부디,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트 프로스트가 입맛을 다셨다.
탄탄대로를 거침없이 달려가던 천재들이 별거 아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경우는 꽤 많다.
들은 것만이 아니다. 보기도 꽤 봤다.
잠시 푸른 머리의 검사를 떠올리던 그가 걸음을 옮겼다.
빨리 파르티잔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 * *
“이거 어떻게 하죠?”
“…….”
“……뭐야, 그거 무슨 표정이야.”
질문을 청해 오는 제자의 눈을 보며, 쿤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세고, 고집은 더 세고.
그야말로 지랄 맞은 성격 그 자체인 주디스가 이런 감정을 품는 것도, 그로 인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으니까.
‘시발.’
주디스 또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만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보다 뛰어난 녀석들을 고꾸라뜨릴 수 있을까, 그 생각만 가득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자신이었다.
그러한 화를, 분노를, 열등감을 장작 삼아 검술의 방향성을 잡았고, 쿤의 가르침을 받아 성과를 보았다.
브랫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그 덕분이었다.
‘그런데 왜…….’
기쁜 것보다, 찝찝하고 불편한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질까?
황당했다.
혼란스러웠고, 당혹스러웠다. 낯설기 그지없는 자기 모습에 주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브랫 말고도 꺾어 줘야 할 녀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이 마당에, 녀석의 어두웠던 표정을 자꾸만 떠올리면 어쩌자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주디스가 홱홱 고개를 저었다.
짜증 났다. ‘어떻게 해야 브랫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조금 전의 자신을 패고 싶었다.
후우, 숨을 몰아쉰 그녀가 재차 스승을 쳐다봤다.
잠시 후, 새로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아까 건 취소.”
“취소?”
“네. 대신 알려 줘요. 이런 감정, 이런 생각을 끊어 낼 수 있는 거.”
“…….”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승도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다 집어던지고 이런 오지에서 혼자, 몇십 년 동안 수련만 계속하고 있지.”
그러니까, 빨리 알려 줘요.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죠?
계속해서 쏟아지는 제자의 질문 공세에, 쿤이 또다시 묘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전의 웃음은 밝았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감정에 취해 있던 주디스조차 느낄 정도로 그 간극이 컸다. 살짝 뒤로 물러난 그녀가 스승의 눈치를 봤다.
맞는 말이지.
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싸가지없는 제자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이안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해 모든 것을 놔 버렸다.
친우를 놓고.
아내를 놓았다.
그 밖에도 정말 많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손에서 놓았다. 마음에서 놓았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를 온통 검에 관한 생각으로 채워 넣었다.
재능이 부족한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억지로라도 검을 위한 여유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도저히 이안을 따라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놓지 마라.”
“예?”
“인연을 놓지 마라.”
그랬던 쿤의 입에서, 예상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주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스승을 바라봤고, 그가 또다시 미소지었다.
씁쓸한.
허나 아까보다는 한결 밝은 표정.
그 상태로 잠시 제자를 바라보던 스승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적당히 강한…… 그러니까, 대륙 10대 검사 정도에서 멈추고 싶다면 내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와도 된다. 실제로 꽤 도움이 됐어. 이것저것 다 내팽개친 덕분에 검에만 온전히 매진할 수 있었고,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사가 될 수 있었지.”
“근데 왜 나는 10대 검사죠? 스승은 3대 검사인데.”
“하아, 그게 불만인가? 널 깔봐서 그러는 게 아니다. 지금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지. 내 말 틀려?”
“……아뇨.”
“그래. 그러니까 10대 검사라고 한 거다. 하지만, 너처럼 욕심 많은 녀석이 그 정도에서 만족할 리 없지.”
“그거야 당연…….”
“그러니까.”
주디스의 말을 끊은 쿤이, 깊은 눈빛과 함께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라. 친구도 놓지 말고, 연인도 놓지 마라. 크로노 검술관과의 끈도 놓지 말고, 검을 위해 앞으로 있을 모든 인연을 희생하지 마라. 욕심부려라. 무엇 하나 손에서 놓지 말고, 다 끌어안고 가라.”
“…….”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 나는 물론이고, 이그넷이나 아이른 같은 녀석들을 상대로도 승산이 있을 거다.”
여기까지 말한 그가 별안간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것이 다르다.
‘똑바로 살아라!’라는 말을 존경받는 지도자가 했을 때와, 주정뱅이 도박꾼이 했을 때가 천지 차이인 것이 그 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신만큼 이런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터.
“하하, 하하하…… 후우, 간만에 많이 웃었군.”
“…….”
“대충 흘려들어라. 검이나 휘둘러. 난 들어가서 조금 쉴 테니.”
“아, 머리 만지지 마요.”
한참을 웃어 재낀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집으로 들어섰다.
직후 쿤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천으로 이를 닦아 낸 그가 숨을 헐떡이다가, 또다시 웃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던가?
갑자기 자신의 아내, 케이라 핀이 생각났다.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뭐라고 하려나.”
모르겠다.
영원히 모를 터였다.
너무 멀리 와 버린 자신은,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몇 번 더 피를 토해 냈고, 그때마다 웃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물로 입을 헹궈 낸 쿤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 검을 쥐었다.
“……그럴 줄 알았다. 쉬기는 무슨.”
“하하! 검사에게 휴식은 죽은 이후면 충분하다!”
“헛소리 그만 좀…….”
“하압! 핫! 하압! 죽어라, 이안! 타핫!”
“후…….”
주디스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특이한 사람이지만, 저 사람은 더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의 말을 허투루 들을 것은 아니었다.
검에 관한 한, 그는 최고였으니까.
그녀에겐 그랬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이안보다 쿤이 더 나은 스승이었다.
물론 방금 전의 이야기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하는 부분이지만…….
‘그건 이따 잘 때 생각하고, 지금은 검에 집중하자.’
천천히 심호흡을 한 주디스가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광경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자신과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쿤의 검술.
자신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연인, 브랫 로이드의 검술.
그리고 그보다 조금 일찍 이곳을 찾았던 흑발 검사의 검술.
‘……너도 언젠가 떨어뜨린다.’
쿤의 검에 만신창이가 되는 와중에도 위엄을 잃지 않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주디스가 불꽃을 피워 냈다.
적검의 날이 붉게 물들었고, 겨울 날씨가 무색할 정도의 열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일리아를 뛰어넘는다.
아이른을 뛰어넘는다.
이그넷도 뛰어넘을 거고, 브랫 녀석은 주저앉으면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에 다시 패 준다.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 패 준다.
‘어라? 이러면 방금 전의 고민, 해결된 것 같은데?’
화르르륵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주디스가 씨익 미소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검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그녀는 신이 나서 검을 휘둘렀고, 그 모습을 쿤이 즐거이 쳐다봤다.
그 역시 이내 자신의 검에 빠져들어 무아지경의 시간을 보냈다. 그 제자에 그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
사제가 있었다.
지금의 그는 혼자였다. 광대와 검사는 한발 먼저 이그넷을 따라갔다.
자신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에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으나, 큰 문제는 아닐 터였다. 은밀의 가호를 내려주었으니까.
그렇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상대.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누구도 듣지 못할, 조용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