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가장 위대한 엑스퍼트 (1)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부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동서로, 또 남북으로 향하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영향권 안이다.
게다가 크로노 검술관의 졸업자와 거베라 왕국의 검사들 역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부의 모든 지역이 안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주변 영지로부터 보호받고, 잘 정비된 길을 이용한다면 별 탈이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순찰대의 빈틈을 노린 대형 도적단의 기습도 벌어지고, 도로 이용비를 아까워한 상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길을 찾기도 한다.
노라 도적단은 그런 소규모 상인과 여행자들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시야에 중년의 남성 하나가 들어왔다.
“단장, 저 사람 어때?”
“어떻긴 뭘 어때? 우리가 사람 가린 적 있어? 등에 메고 있는 검만 팔아도 밥 한 끼는 먹겠구만. 다들 움직여.”
“으음…….”
코가 큰 부하 하나가 표정을 찡그렸다.
뭔가 감이 좋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무장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숫자가 다섯밖에 안 되긴 하나, 석궁과 활로 무장하고 있기에 훨씬 유리하다.
제아무리 수준 높은 검사라 한들 멀리서 쏟아지는 공격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 중년인의 실력이 상식 내의 수준일 때의 이야기.
즉…….
‘그래, 엑스퍼트는 아니겠지.’
강대국의 정규 기사단원 수준이 아닐 경우를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부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괜한 생각일 뿐이다.
근육 좀 붙고 키 좀 크다고,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다 걸러 버리면 될 것도 안 된다.
괜찮은 건수 하나 올려서 오늘 밤에는 술도 마시고, 여자도 품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섬주섬,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볼트를 겨냥하는 와중이었다.
별안간 검을 뽑아 든 중년 사내가, 오러 소드를 뽑아 내었다.
우우우우웅-!
“…….”
“…….”
“……?”
“지금…….”
꿈인가?
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터엉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증발한 것처럼 감쪽같이 모습을 지워 버렸다. 도적단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곧바로 목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찾기만 했을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거거걱-!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사내가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원래도 커다란 검에 푸른빛의 오러 소드가 더해져 더욱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이를 제대로 느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이상을 느낀 것은, 자신들의 근처에 있던 나무가 짚단처럼 베어져 넘어간 것을 확인한 이후였다.
콰광
콰과과과광-!
“…….”
“…….”
“…….”
“두 가지만 지키면 살려 준다.”
“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도적단의 장, 노라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을 놓고 가라는 말장난만 아니라면 뭐든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팔 한쪽을 놓고 가라고 해도 알겠다고 할 참이었다.
다행히 상대의 요구는 어렵지 않았다.
첫 번째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를 놓고 갈 것.
두 번째는…….
“예? 제, 제, 제트 프로스…… 그 유명한, 101번째 검사?”
“그래. 내가 그 유명한, 몇십 년째 엑스퍼트에서 머물고 있던 머저리다. 물론…….”
씨익 웃어 보인 제트 프로스트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니지. 100번째 검사, 혹은 소드마스터 제트 프로스트라고 불러라. 이 소식을 널리 알리란 말이야.”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소드마스터 제트 프로스트 님!”
“좋아, 꺼져.”
“네!”
잽싸게 대답한 단장 녀석이 가장 먼저 움직이고, 그 뒤를 부하들이 따랐다.
부리나케 달려가는 녀석들을 지켜보던 제트 프로스트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뒤늦게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나지도 않고 대뜸 석궁부터 쏘려는 놈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니, 살려 둘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금 미안하지만, 발언은 취소다.
조용히 중얼거린 제트 프로스트가 신형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쒜에엑-!
억!
커흑, 꺼허억!
털썩, 투둑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비명,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소리.
볼 것도 없었다. 즉사였다. 제트 프로스트는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쓴 사내를 확인했다.
손속에 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익숙하고 낯익은 모습.
허나 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청년을 보며, 그가 말했다.
“브랫 로이드?”
“오랜만입니다. 제트 프로스트 씨.”
“어, 어어. 그렇지. 오랜만이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 녀석들 전부 현상금이 붙어 있는 질이 나쁜 도적들입니다. 주변 다섯 영지에서 생사 불문하고 처리해 달라는 수배서가 붙어 있죠.”
“아, 그렇군.”
“오해하실까 봐 말했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트 프로스트가 표정을 굳혔다.
처음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허나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딱히 기도를 숨기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믿기 힘들었다.
허탈한 감정도 꽤 들었다.
아마 예전에 이 청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또다시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젠 다르지.’
쉽진 않았다.
하지만 의연한 척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윽고 미소 지은 제트 프로스트가, 한참 후배 검사에게 축하를 건넸다.
“마스터가 되었군. 축하한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제트 프로스트.”
잔잔한 미소를 지은 브랫 로이드 역시, 제트 프로스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 * *
“……그렇게 해서, 쿤 님의 거처로 향하던 거였지.”
브랫과 합류한 이후, 제트 프로스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아이른 일행과 만난 후부터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
허나 그 과정이 절대 순탄치는 않았다는 점.
초심을 찾기로 다짐했음에도 여전히 타인의 성취가 신경 쓰이고, 자신이 세운 검이 이리저리 흔들렸었다는 점.
그렇기에, 70년이라는 세월을…… 아니,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대검호, 쿤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는 점.
“많은 이들이 이안 관주나 율리우스 휼 단장을 최고라고 꼽지만, 내게는 쿤 님이 항상 최고였어. 그래서 관주님께 찾아가 거처를 물었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렇군요.”
“자네는 어쩐 일로? 아, 그렇군. 주디스가 쿤 님의 제자가 되었다지? 그리고…… 자네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도, 크흠, 관주께 들었다.”
“맞습니다.”
“거 참,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제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티격태격하는 것치고 꽤 사이가 좋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둘이 연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였다.
주디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누구보다, 아니 죽기보다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 검에 관해서는 녀석만큼 솔직하게 이기적인 사람도 없을 테지.’
그런 그녀가, 사랑을 한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라이벌과.
……아니.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실력이 된 존재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브랫에게 물었다.
“자네, 주디스를 보러 가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주디스는 자네가 소드마스터가 됐다는 걸 아나?”
“모를 겁니다. 도시라도 왕래한 게 아니라면요. 아니, 왕래했어도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어떻게 할 셈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실력을 전부 드러낼 생각이냐고 묻는 거야.”
질문을 던지는 제트 프로스트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인연에 불과하지만, 주디스의 성격이 어떤지 꽤 잘 아는 그였다.
그녀가 가진 상처도, 트라우마도, 그로 인한 집착과 질투, 분노도.
그렇기에 걱정이 됐다.
같은 수련생이었던 일리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에 더해, 브랫 로이드까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21살에 마스터가 된, 천재 중의 천재인 이 녀석은…….’
……아마 모를 것이다.
제트 프로스트가 심각한 분위기를 잡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흠.”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브랫은 여전히 태연했다.
오히려 쿤의 저택으로 가는 며칠간 끊임없이 검술을 수련했다.
걸어 다니며 검을 휘둘렀고, 때로는 검에 관한 이야기를 건넸다.
제트는 여기에서 또 한 번 놀랐다.
마스터의 초입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푸른 머리 청년을 보며, 그는 또다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보다는 주디스가 문제다!’
자신이야 원래부터 마스터가 목표였다.
그 이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기에, 대륙을 들었다 놨다 할 천재가 자신을 추월했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참고 넘길 수 있었다.
허나 주디스는 아니었다.
진지하게, 진심으로 대륙 최강을 꿈꾸는.
하지만 재능은 그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그런 아이.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이 그녀였다.
만약 지금 시대가 아니었다면.
역사에 남을 천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지금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녀 역시 최고가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세대는…….’
그렇듯, 제트가 한창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브랫 로이드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
“……아.”
브랫의 시선을 따라간 제트 프로스트가 뒤늦게 같은 소리를 냈다.
얼핏 들으면 멍청하게 느껴질 만한 반응.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레이터(Crater).
거대하기 그지없는 구덩이들이, 지평선 너머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중부 평원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견문이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제트 프로스트였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다.
아니, 애초에 이것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그 말은, 누군가의 인위적인 힘이 개입되었다는 뜻인데…….
슈욱
“궁금한가?”
“허억!”
“오랜만이군. 일 년에 두 번 찾아온다더니, 생각보다 늦었는데?”
“……약간의 성취가 있어서, 제대로 정리하고 오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흠, 그렇군.”
“그런 거죠.”
귀신처럼 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백발의 근육질 노인.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제트는 상대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을 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예를 표했고, 자신을 소개했다.
쿤은 귀찮은 표정으로 손사레를 쳤다.
“됐어. 네가 누군지는 나도 안다.”
“저, 저를 아십니까?”
“나랑 비슷한 녀석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 그래도 나만큼 못난 놈은 아닌 모양이야. 아직 60이 안 됐지?”
“예, 예.”
“그 정도면 빨리 됐구만, 소드마스터. 기분이 어때? 좋아?”
“어…….”
제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좋았다.
마스터가 된 게 싫은 검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허나 이를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본 쿤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딱히 괴롭힌 건 아닌데, 그런 것처럼 됐군.”
“아,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고 한 게 아니다. 솔직히 좋겠지. 마스터가 되고 기분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
“…….”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나한테도 있었는데 말이야.”
목표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올라있다면.
그래서 마스터의 경지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더군.
그렇게 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제트와 브랫은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쿤이 느꼈던 열등감, 좌절감, 박탈감, 분노, 답답함, 공허함, 질시,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제트는 숙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열망과 욕심, 그리고 그로 인한 괴리감.
거기에서 나온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뚫고 시대의 거인이 된 쿤에게, 그 누가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할 기회는 없었다.
어느새 도착한 쿤의 거처.
그 앞에 형형한 눈빛으로 서 있는 붉은 머리 검사를 보는 순간, 제트 프로스트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참고로, 주디스는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다. 아직 엑스퍼트지. 하지만…….”
“…….”
“……그렇기에 더 무서울 수도 있지. 예전의 나는 가슴속에 품었던 화를 걷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저 녀석은 그 분노조차 놓지 않아. 움켜쥔 손이 활활 타올라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
브랫 로이드가 검을 뽑았다.
우우우웅, 푸른 검날에 돋아난 푸른색의 오러가 눈이 시릴 듯한 빛을 뿜어냈다.
제트 프로스트가 마른침을 삼켰다. 함께 다니며 봐 왔던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이 느껴졌다.
주디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연인과 정반대의 색인 적검을 들고, 중단세를 취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짧게 내뱉은 순간.
화르륵-!
완벽한 불꽃으로 화한 붉은 머리의 검사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