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몰래 온 손님 (5)
늦은 밤.
린제이 가문의 직계 혈족만이 들어올 수 있는 실내 연무장의 한가운데, 일리아 린제이가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사고의 흐름은 당연히 오늘 있었던 대련, 아니 싸움으로 향했다.
확실히…… 그것을 대련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거칠었다.
아버지의 검에는 살기가 넘쳤고,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검에는 독기가 넘쳤으니까.
‘아니, 그걸 독기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객기는 아니었다.
이그넷의 실력이 여전히 조슈아 린제이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객쩍은 만용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격차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 세대나 차이가 나는 둘일진대, 자신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의 머릿속에,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펼쳐 보였던 검술이 하나도 빠짐없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악착같고, 끈질기고, 독하고…… 이그넷의 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검사를 상대로 버티려면.
더군다나 강력한 바람의 힘을 검에 녹인 린제이 가문의 정점과 맞싸우려면, 어떻게든 버텨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자신의 근간이 뿌리째 뽑혀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고, 손아귀를 꽉 쥐고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그넷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날아들더라도.
그보다 강렬한 폭풍이, 거대한 태풍이 들이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았다.
휘둘리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의 검을 보여 주었다.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당연한 말이지만, 결과는 아버지의 승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납고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검격에 이그넷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그런데도.
빛나 보였다.
여전히 자신을 잃지 않고 담담히 결과에 승복하는 그녀를 보며, 일리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 마치…….’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는, 왕과 같은 인물.
여기까지 생각한 일리아 린제이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슬며시 눈을 떴다.
“…….”
여전히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목숨을 거둘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모습.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발휘했던 이그넷의 모습.
예전이라면 가슴이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을 터였다.
자신의 이상향인 아버지의 하늘검, 그것으로도 완전히 그녀의 빛을 걷어 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현재 일리아의 마음은 전처럼 조급하지도, 괴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조금 더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가 이내 답을 내렸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후웅-!
검을 꺼내 든 일리아 린제이가 매끄럽게 움직임을 이어 갔다.
하늘검이었다.
가문의 비전이자, 혈족만이 이어받을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검사라도 탐을 낼 만한, 영웅 디온 린제이의 검술.
그 무지막지한 위력을 바랐었다.
태산조차 무너뜨리고 바다조차 쓸어버린, 성채만 한 악마의 목조차 단칼에 베어 버릴 절대적인 폭력을…… 간절히 원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악마도, 이그넷 크레센시아도, 오빠인 칼 린제이도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그를 떠올리며, 일리아의 검술이 깊이를 더해 갔다.
후웅
후웅
후우우웅-!
바람이 일었다.
이그넷과의 결투에서 아버지가 보여 줬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과도 많이 달랐다.
선조들은 디온 린제이의 검술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릎 꿇릴, 제왕의 검.
원치 않았다.
그쯤 되어야 태양과도 같다는 평가를 받는 이그넷과 맞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꼭 초대 가주의 경지에 다다라야만 한다고 평생을 되뇌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
일리아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이른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 눈빛, 어색하게 웃는 표정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강철의 의지만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주디스에 비견될 정도로 뜨거운 투지도 보였고.
가문에서 마주했을 때는 물처럼 스며드는 그의 존재감에 가슴이 설렜던 적도 있었다.
최근의 그는 또 달랐다.
넓고도 단단한 대지처럼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품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러고 싶어.’
후우우웅……
일리아의 검이 더욱 천천히, 느리게 흘러갔다.
조슈아 린제이가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세상을 찢어발길 듯한 투지도, 누군가를 찍어 누르겠다는 위압감도 일절 드러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포근함과 따스함.
천공에서 아래를 오시하는 대신.
조금 더 낮은 위치의 하늘이 되어, 친숙한 느낌의 하늘이 되어 대지를 품는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일리아 린제이의 검에서 더욱 진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그녀가 만들어 낸 바람은, 단순히 엑스퍼트들이 발현으로 흘려내는 오러와는 차원이 달랐다.
찬란하게 흩뿌려지는 은색의 빛이 그 증거였다.
검에 두른다면 능히 ‘오러 소드’라고 불릴 만큼 밀도 높은 기운이, 그녀의 주변을 가득 채워 나갔다.
“…….”
일리아 린제이의 신형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과거, 조슈아 린제이가 아이른을 기절시켰을 때 보여 줬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물론 힘의 차이는 있었으나, 당시의 광경이 절로 생각날 정도라는 것은 분명했다.
허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남의 뒤를 쫓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벽을 돌파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어느새 연무장에 들어온 린제이 가주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조슈아 린제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감격스러웠다.
벅차오르는 기쁨을 누를 길이 없었다.
허나 그보다 더 강하게 드는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그가 직전에 있었던 대결을 떠올렸다.
‘……솔직히, 보러 오겠다는 딸을 말리지 않은 걸 후회했었지.’
그 정도로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검은 매서웠다.
무지막지한 성장세를 보였던 아이른 파레이라라 하더라도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는 자신이건만, 그녀를 상대로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날카롭게 빈틈을 찾아내고.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수 싸움을 벌이고.
자신의 단점은 감추고, 장점은 살리기 위해 힘써야 했다.
그 노력이 최선의 노력은 아닐지언정, 결코 허투루 상대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해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들의 원수가 아니라는 점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상대에게 감탄했기에.
악마의 발호니, 대륙의 위기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역사상 최고 천재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꺾는 것은, 검사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자라지 않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조슈아 린제이가 소매로 닦아 냈다.
부녀 관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요술사에게나 찾아온다는 ‘감’이 잠시 자신에게 내려온 것일까?
딸의 검술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칼 린제이로 인한 슬픔.
이그넷 크레센시아에 대한 집착.
오빠에게 유독 엄했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일리아 린제이는, 바람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반면, 나는 어떠한가.’
린제이 가주가 또다시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문제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그넷의 대결 신청 한마디에 평정심이 흐트러져 버렸다.
싸우기 전에도, 싸우면서도, 싸운 후에도 느꼈다.
자신은 평생 자식으로부터 졸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다른 부모들은 어떨지 몰라도, 자기에게는 무리라고.
아들이 멀쩡했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 주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그렇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멋지게 졸업해 버린.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의 딸, 일리아 린제이.
여전히 따스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조슈아 린제이가 다짐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고.
돌이킬 수 없는 예전 일에 사로잡혀 현재의 행복을 옭아매지 않겠다고.
아들의 과거를 떠올리며 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겠다고. 좋은 생각만 하겠다고.
칼 린제이를…….
이만 놓아 주겠다고.
“…….”
정말로, 놓아 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1미터가량 떠올랐던 일리아의 몸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휘청, 살짝 균형을 잃은 그녀를 향해 조슈아가 나는 듯이 움직였다.
빠르게 딸을 부축한 그가 물었다.
“괜찮니?”
“……괜찮은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한 일리아 린제이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조금 수정했다.
“아니, 좋아요. 많이.”
“그래?”
“네. 지금까지 맺혀 있던 뭔가가, 다 날아가 버린 느낌…….”
진심이었다.
정말로 상쾌한 이 기분을 말로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가주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명상하면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요.”
“그래, 대화는 나중에 하자꾸나.”
“예, 고마워요 아빠.”
싱긋 웃어 보인 일리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묘령의 레이디가 보일 행동이라 보기엔 많이 털털했으나, 괜찮았다.
자신의 딸은 사교계의 여인이 아닌 기사니까.
그것도 이그넷 크레센시아에 뒤지지 않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천재 기사.
조슈아 린제이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딸이 깨달음을 수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몰랐지만, 본인의 마음에 있던 응어리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광대 악마의 분신이, 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오, 이런. 기쁘면서도 슬픈 일이군.”
“…….”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행복을 얻었고, 존경에 마지않는 아버지께서 평안을 찾아가고 있군. 좋아, 아주 좋아! 난 저런 화목한 가정이 좋더라. 다만, 네 처지에서도 반가운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걸?”
“…….”
사내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언제고 이렇게 될 거로 생각했다.
아니, 그의 생각보다 훨씬 늦은 타이밍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존재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을 뿐이었다.
“이만 가시죠.”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대도 따라 일어났다. 악마임에도 악마답지 않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면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닐 수 없다.
얌전히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게 맞았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쫓던 이를 계속해서 쫓을 수밖에 없는 존재.
칼 린제이가, 태양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