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몰래 온 손님 (4)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이른 새벽.
잠에서 깬 아이른 파레이라는 오랜만에 정좌에 들었고, 심상 세계로 진입했다.
여전히 우뚝 솟아 있는 철검.
검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
그것이 너무 강하게 번지지 않도록 주변을 흐르는 물줄기까지.
얼핏 보면 로이드 영지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
전보다 훨씬 더 장중하게, 깊고 넓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구나.’
어두운 구덩이 안에서 썩어 가던 감정을 걷어 내고, 흘려 버렸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마음을 쏟아야 할 이들에게, 소중한 이들과 교감하며 평온을 찾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감’이라는 부분이었다.
아이른이 자신의 마음을 전했듯.
상대방 역시 각자의 진심을, 감정을, 생각을 전했다. 오히려 흘려보낸 것보다 훨씬 많이, 진하게.
룬텔 왕국의 대마법사와 같은 악의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선의가 아이른을 향해 끊임없이, 도도하게 흘러들어왔다.
조그마한 물줄기에서 시냇물로.
얇은 시냇물에서 더욱 넓은 강물로.
계속해서 불어나는 물(水)의 기운이 아이른에게 더욱 커다란 힘을 주었다.
이러한 기연이 자신의 덕이 아님을 알았기에.
흐르는 강물에서 느껴지는 마음들을, 인연들을 손으로 잡을 듯 자세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는 더욱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만하면 안 돼. 오히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야.’
억지로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야 몰랐지만, 두르칼리 부족으로부터 오행신공(五行神功)을 익힌 지금은 안다.
부족한 것보다 위험한 것이 넘치는 것이라고. 과한 기운을 견제하기 위한 다른 기운이 필요하다고.
강철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불꽃을 찾았던 것도.
이그넷에게 옮겨 붙었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물의 검을 익혔던 것도 전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과분한 마음들로 인해 불어난 강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향은 알고 있었다.
바로 물의 기운을 떠받칠 대지(土)의 기운을 키우는 것.
그러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이 기울일 노력은 무엇인가?
아직 잘 몰랐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눈에 띌 정도로 대지의 기운이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아이른이 인상을 찌푸렸다.
땅의 기운이 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예전보다 훨씬 넓어진 대지는, 넓고 깊게 흐르는 강물을 거뜬히 떠받칠 정도였으니까.
만약 이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진즉에 문제가 생겼을 터였다.
자신의 감정이 되었든, 타인의 기대가 되었든 감당할 수 없는 물줄기에 잠겨서 난리가 났겠지.
“후우.”
명상은 여기까지.
눈을 뜬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을 보고 미소 짓던 그가, 이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오랫동안 영지에 머물렀던 린제이 부녀가 떠나는 날이었으니까.
조금 더 바깥 풍경을 응시하던 아이른이 이내 배웅할 채비를 갖췄다.
* * *
“다음에 또 올게.”
“아니야. 다음엔 내가 찾아갈게.”
“그래.”
“응.”
아이른과 일리아의 작별 인사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꽤 담담했다.
허나 시선만은 달랐다.
서로를 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둘을 보며 조슈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침착해. 괜찮아. 연인끼리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의 몸에서 은은한 기세가 피어 올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 하룬 파레이라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굳었던 그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다음에는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든지 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짧고 건조한, 그야말로 무뚝뚝한 아버지들끼리의 대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른, 일리아, 아멜리아, 키릴, 루루.
그 밖에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우정을 쌓은 둘이었으니까.
물론 그보다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도 몇 있었다.
마르쿠스가 대표적이었다.
‘이제 파레이라 가문의 위세는…… 더는 남작 가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졌구나!’
원래도 재정 상태로만 보면 자작 가문과 견줄 수 있었던 파레이라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백작가?
아니면 그 이상?
쉽게 계산이 서지 않았다.
확실한 건, 헤일 왕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이 조그마한 영지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조심히 가십시오. 영애도 조심히 가시게.”
“마지막까지 고맙소. 파레이라 양의 그리핀이라면 일주일이면 도착할 테니…… 도착하면 편지라도 목에 매달아서 보내리다.”
“목에 말고, 발에 매달아 주세요! 목에 달면 앵두가 답답해 해요.”
“그러도록 하지.”
“다음에 올 때까진 다 만들어 놓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여력이 되면 린제이 가주 양반 것도 하나 더 만들어 주지.”
“고맙소. 그럼 이제 진짜로…….”
대장장이 불카누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린제이 부녀는 그리핀 앵두의 위에 올라탔다.
손을 흔드는 일리아 린제이와,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슈아 린제이.
그들은 이내 조그마한 점이 되어 저 멀리 사라져 버렸고, 아이른은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쉬웠다.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시선을 내린 아이른이 눈을 감고, 자신의 안을 흐르는 물줄기를 느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루루, 검술관의 친구들과 두르칼리의 인연들, 그 밖의 소중한 인연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진하게, 깊게 흘러들어 온 일리아의 마음.
이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 넓고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제서야 느꼈다.
어째서 최근의 자신이 빠르게 강해졌는지.
어째서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토록 땅의 기운이 강해졌는지.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
더 많은 이들의 기대, 사랑, 마음.
예전에는 이러한 것들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고 회피하고 싶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부응하고 싶었고,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한 의지가 자신을 발전시킨 셈이었다.
“……열심히 하자.”
“응? 뭘?”
“별거 아니야. 아니, 별거 아닌 건 아니지만…….”
“으음?”
루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을 쳐다봤다. 아이른은 그저 웃었다.
검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인에게 집중하는 것도, 세상을 알아가는 것도 모두 수련이고 공부라 했지만.
오늘만큼은 온전히 검에 집중하고 싶었다.
* * *
‘많이 배웠다.’
앵무새 머리의 그리핀을 타고 날아가며, 조슈아 린제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랬다. 분명 처음만 하더라도 자신이 아이른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떠나면서 생각하니 배운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쓰라렸던 과거의 아픔을 흘려보내고.
절대 희망차지만은 않은 미래를 향한 걱정, 불안에도 붙잡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리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반면에 자신은 어떤가?
여전히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도, 미래도 좋지 못한 영향을 받고 있다.
자신의 딸, 일리아 린제이에 대한 과보호가 그 근거였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딸의 안위에, 미래에 집착했던 것은…….
‘아들…… 칼 린제이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조슈아 린제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조금씩 흐릿해지는 얼굴.
그에 반해 선명하게 기억나는 자신의 엄했던 행동과 냉정했던 표정.
그에 따라 점차 어두워져 갔던 아들의 분위기.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과 가문이 바로 설 수 있다. 그편이 딸의 행복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지금껏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비로소 자각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에게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녀석이 펼쳤던 검이 떠올랐다.
그가 보였던 눈빛도 떠올랐고, 그 안에 진하게 담겨 있던 의지도 마찬가지로 떠올랐다.
잠깐이긴 하지만 파레이라 영지에 들어서기 전에 만났던 푸른 머리의 검사도 생각났다.
“아빠. 거의 다 왔어요.”
“……벌써?”
“네. 저기 보여요.”
명상에 잠겨 있던 조슈아 린제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정말이었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영지를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괜찮았다.
그리핀에 처음 탈 때만 하더라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마음이, 지금은 꽤 차분해졌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오랫동안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더 힘들 터였고, 더 느릴 터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더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딸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인 가주가, 순식간에 영주성에 착지한 그리핀의 위에서 휙 뛰어내렸다.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송곳처럼 꽂혔다.
“가주.”
“…….”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5대 검술명가의 수장, 조슈아 린제이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러자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흑발의 기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라바트 왕국에서 처음 검을 겨뤘을 때보다.
아니,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이 거듭났을 때보다도, 훨씬 강하다.
……구태여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표정을 굳힌 가주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다.”
“…….”
“많이, 아주 거칠 거라는 이야기다. 대련 정도로 끝낼 생각이라면…….”
후우우우웅-!
“……여기까지만 떠들고 꺼져라.”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이그넷은 주눅들지 않았다.
하늘이 아무리 드넓어도.
허공을 가득 채우는 바람이 제아무리 드세다 할지라도, 태양은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기세를 잃지 않은 그녀가, 시린 미소와 함께 말했다.
“딱 말씀하신 정도의 강도로 부탁하나이다.”
“…….”
“그 정도의 자극이 아니면, 돌파할 수 없는 벽에 다다른 상태이오니…….”
“장소를 옮기자.”
린제이 가주가 이그넷의 말을 끊었다.
싸움을 회피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싸워 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가문 안에서 싸우면 여기저기 부서질 것이 뻔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것도 없이, 제대로 박살내 주고 싶다는 마음도 꽤 있었다.
그때, 뒤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린제이였다.
“관전하고 싶어요.”
“…….”
“가능할까요?”
“……따라와라.”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슈아 린제이.
그보다 더 긴장한 눈빛을 발하는 일리아 린제이.
강렬한 폭풍 사이에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그넷 크레센시아.
빠르게 영지 밖으로 향하는 그들을 가신들은 차마 뒤쫓지 못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
“…….”
“…….”
사제.
광대.
그리고 그들의 곁에 있는 검사 하나가, 조용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