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70화 (270/388)

◈ 89. 몰래 온 손님 (3)

브랫 로이드가 파레이라 영지를 떠난 직후.

아이른 파레이라와 일리아 린제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매진했다.

특히 일리아가 더욱 그랬는데, 친구의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훨씬 성숙하구나.’

브랫의 목표가 대륙 최고의 검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훌륭한 영주가 되기 위해, 로이드 영지를 잘 이끌어나가기 위해 검을 배울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승부욕도, 투지도 없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주디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녀의 사랑을 얻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자기를 앞서가는 이들이 여럿 생겨도.

그로 인해 괴로운 마음이 들어도 이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이그넷의 그늘 아래에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후우웅!

후웅!

빠르게 검술을 펼치며, 일리아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떠올렸다.

꽤 오랜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떠올렸던 예전에 비하면,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은 이그넷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할 수 있을까?

일리아가 점심조차 거르고 검에 매진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리아.”

“아, 아이른.”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푸른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 무렵, 아이른이 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브랫이 떠난 이후, 내내 자신의 곁을 지켜 주었던 그다. 진한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어지는 말이 예상과는 조금 달랐기에, 일리아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기분 전환 겸, 오늘은 바깥에서 먹을까? 저녁.”

“어? 아…….”

아이른의 고백이 있었던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항상 영지 내에서만 데이트를 즐겼던 둘이다.

검술에 한창 매진했던 탓도 있지만, 타인에게 연인이 된 이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묘하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뭔가 답답해 보여서. 생각해 보니까 한 달 내내 영지에만 있었잖아? 가끔은 옛날에 같이 여행 다니던 때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조금 그런가?”

“……아니. 좋은 것 같아. 좋아. 그렇게 하자!”

“어? 괜찮아?”

“응. 생각해 보니까 아이른 말이 맞아. 나가자, 우리.”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의 관계를 남들에게 숨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랑을 하면 했지 말이야.’

그런데도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여전히 자신이 타인의 반응에 휘둘리고 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브랫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봤기에, 더욱.

그것이 일리아 린제이가 고개를 끄덕인 이유였고, 영주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당당히 아이른의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거닐던 이유였으며, 손님이 많을 것이 분명한 주점의 문을 열어젖힌 이유였다.

하지만 그 결과…….

‘……아빠?’

자신의 아버지, 조슈아 린제이를 만날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확실했다.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턱수염을 붙였지만, 그 밖에도 몇 가지 변장을 추가하긴 했지만, 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

조슈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옆의 아이른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

바로 하룬 파레이라 남작 역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평소의 금발이 아닌 적발을 하고 있었으나, 그 정도로는 날카로운 소드마스터의 안목에서 비껴갈 수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가 왜 있지? 남작님은…… 왜 있고?”

“…….”

아이른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가끔 민생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시찰을 다니시곤 하니까.

하지만 린제이 가주가 이곳에 있는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을 넘어 상황 자체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아단 왕국에 있어야 할 분이?

그것도 혼자서, 변장까지 하고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

‘설마…….’

딸이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생각이 흐른 순간, 아이른은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일리아와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을지라도.

조슈아 린제이의 앞에서는 괜히 주눅이 드는 그였다.

“후읍…… 후우.”

아이른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버지 쪽을 바라봤다.

린제이 가주 쪽은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한 곳으로만 시선을 고정시킨 그가,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영지 시찰 중이셨군요. 소자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뒷걸음질로 가게를 나서는 아이른.

어리둥절하던 일리아가 아! 하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니, 여전히 100%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남아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았기에, 아이른의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

“……남작님과 이야기 잘 마치고, 이따가 봬요. 아빠.”

덜컥

“…….”

“…….”

“…….”

정적이 흘렀다.

그야말로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었다.

하룬 파레이라 남작도, 조슈아 린제이 백작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주점 주인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

“……크흠, 흠. 그…… 미안하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슈아 린제이였다.

따지고 보면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자신이었다.

아버지의 앞에서, 자신의 딸보다 상대의 아들이 못났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셈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의 추태였지만, 이를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수치다.

린제이 가주가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미안합니다. 그…… 하룬 남작 당사자일 거라고 생각을 못 했소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라도 본인이 실언을 한 게 맞소. 정말 미안하오.”

“……나 역시 미안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서 못난 모습을 보였군. 따지고 보면 우리 둘 다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셈이죠.”

“…….”

“…….”

“…….”

“술이나 더 하시겠습니까?”

“으음…… 그러시죠.”

“맥주 말고. 조금 더 독한 거로…… 어떻습니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맨정신으로 있기 힘든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맥주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적어도 증류주는 되어야 파레이라 남작과 대화를 이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장.”

“예, 예! 나리.”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 우리가 전세 좀 내겠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추, 충분합니다. 충분하고 말고요!”

주인에게 금화 두 닢을 더 쥐여 준 파레이라 남작이 다른 멀쩡한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잠시 망설이던 조슈아 린제이 역시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독한 위스키를 커다란 언더락 잔에 콸콸 부은 뒤.

꿀꺽 꿀꺽

한 번에 마셔 버렸다.

파레이라 남작은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조그마한 스트레이트 잔을 한 번.

탁.

두 번.

세 번.

타악

연속으로 빠르게 마신 뒤,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런 그에게, 린제이 가주가 물었다.

“주량이 어떻게 되시오?”

“세지도, 약하지도 않습니다.”

“본인은 강한 편이라 괜찮지만, 남작께선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오?”

“무리하고 싶은 상황이라…….”

“그건 맞지…….”

“…….”

“…….”

“그래도 말입니다.”

쪼로록, 파레이라 남작이 네 번째 스트레이트 잔에 독한 위스키를 따랐다.

조금이지만 벌써 얼굴이 붉어졌다.

그 상태로 잠시간 호박색 액체가 담긴 술잔을 응시하던 그가, 시선을 올려 조슈아를 바라봤다.

“서로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부모로서. 아니,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우리, 팔불출 둘이서.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나는 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남작의 이 말을 들은 조슈아는 순간, 아주 잠시 울컥했다가…….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렇지요?”

“그렇소. 옳소.”

결국, 힘 빠진 목소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의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서로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알고 있는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들 모두가 몰랐던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

어떤 때는 웃었고, 어떤 때는 우울해했다.

화를 낼 때도 있었고, 공감하는 얼굴로 상대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렇듯 길게 이어진 대화의 끝은, 결론은 하나였다.

아들과 딸이 부모로부터 졸업하듯.

아버지 역시 자식으로부터 졸업할 필요가 있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을 더욱 느낀 것은…… 조슈아 린제이였다.

“후우, 이만 일어나시죠.”

“그게 좋겠소. 많이 취하셨군. 나도 취했고. 처음에 말했던 것보다 술이 세신데?”

“하하, 그런가요? 사실 조금 더 마실 수 있긴 합니다. 다만, 더 마실 거면 조금 더 편한 장소에서…… 으음. 그러니까, 영주관에서 조금 더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지. 나는 찬성이오.”

“갑시다, 갑시다.”

얼큰하게 취한 둘이 주점을 나와 영주관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는 웬 모르는 사람이 남작과 함께였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괜찮아, 서부 5대 검술명가 중 최고, 린제이 가의 가주이시다.”

“……예?”

“안으로 모셔라. 나도 모셔라. 하하하.”

“아, 예…….”

당연히 병사는 믿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달리 엄청나게 취하셨구나, 이런 생각만 하며 하인들을 불러모을 뿐.

허나 그들보다 먼저 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와 일리아 린제이였다.

“가주님.”

“…….”

일리아보다 두 발짝 앞으로 나온 아이른.

조슈아 린제이의 앞에 선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도망가 버렸다. 차마 가주의 분노를 정면에서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이 일리아 린제이의 연인으로 남을 수 있으려면.

당당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곁에 서 있으려면, 조슈아 린제이의 인정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우우우웅……

아이른의 몸에서 기세가 흘러나왔다.

악마를 마주했을 때처럼 공격적인 기운은 아니었다.

허나 그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하고, 뜨거운 마음이 일었다.

‘대련을 원하신다면 대련을 하고, 말로 몰아붙이신다면 말로 응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겠다!

단단하게 결의를 다진 그가, 부릅뜬 눈으로 가주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딸을 잘 부탁한다.”

“……?”

너무도 쉽게 허락의 말을 내뱉는 조슈아 린제이.

그는 웃는 얼굴로 파레이라 남작과 함께 건물로 들어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

“……?”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아이른과 일리아가 서로를 쳐다봤지만,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기운을 가라앉힌 아이른이 말했다.

“하아, 아직도 긴장이 안 풀리네…….”

“그래도 다행이야. 나는 아빠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진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엄청 걱정했는데…….”

“그러게. 근데 우리 보러 온 게 맞겠지?”

“……아무래도?”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른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슈아의 마음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둘은 아직 어렸으니까.

지금의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아버지인 하룬 파레이라 남작뿐이었다.

물론.

‘아이른 녀석…… 볼 때마다 더 강해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직 부족해. 내일부터 조금 더 훈련을 시켜 줄 필요가 있겠어. 조금 더 내 딸에 어울리는 남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술을 마시는 내내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남작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파레이라 영지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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