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몰래 온 손님 (2)
‘잠시 헤일 왕국 좀 다녀오겠습니다.’
‘뭐? 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뭣? 어? 자, 잠깐! 기다려!’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 일리아 린제이가 돌연 파레이라 영지로 떠나 버렸을 때.
조슈아 린제이가 느낀 공허함과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틀 후, 가족과 함께하는 가벼운 나들이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에도 그랬다.
악마가 처음 출현했던 라바트 영지.
그곳에서 조슈아는 참으로 오랜만에 딸을 위한 상담을 해 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썩 마음에 들 만큼 괜찮은 내용이었다. 실제로 딸은 그날 이후로 꽤 기운을 차린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도…….’
일리아는 자신이 아니라, 아이른을 보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갔었지.
……조슈아가 가문을 떠나 대륙 중부로 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소드마스터, 그중에서도 대륙의 10대 검사라고 불리는 이가 바로 그였다.
몇몇은 이견을 제기하겠지만, 가주는 자신이 5대 검사 안에도 충분히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단독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에만 집중하니 이동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서부에서 중부로 넘어오기까지 고작 2주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미친 듯한 속도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딸내미의 애정사에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 쓰는 이유가 뭘까?’
물론 신경 쓸 수는 있다.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딸이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일리아가 별 볼 일 없는 놈팽이에게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개인적으로 섭섭한 일이 몇 개 있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말로 훌륭한 청년이다.
검술로 보나, 인성으로 보나, 외모적으로 보나 흠잡을 곳이 없는.
그런데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가주의 체면도 무릅쓰고 혼자서 대륙 중부로 넘어온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러한 생각에 잠긴 이후부터, 조슈아 린제이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빠른 이동 대신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집중했고,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가졌다.
도중에 만난 푸른 머리의 청년을 도와준 것도 그 덕분이었다.
처음 가문을 뛰쳐나왔을 때처럼 딸 생각, 아이른 생각만이 가득했다면 그럴 수 없었을 터였다.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청년.
아마도 로이드가의 장자였겠지.
조슈아가 그의 부드러웠던 검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세대는 인재가 많았다.
자신의 어릴 적을 생각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청춘들이 대륙 각지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영웅의 탄생은 위기의 태동을 의미하는 법.
광대 외의 다른 악마들 역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과연 이 사실을 언제까지 대륙에 숨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여기까지 달려온 나는 뭐지.’
“…….”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조슈아 린제이가 쾅! 하고 발을 굴렀다.
이미 늦었다. 파레이라 영지가 코앞이었다.
여기까지 온 주제에 후회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나아가야 했다.
마주해야 했다.
누구를?
자신의 딸을.
그리고 그 녀석을.
후우,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은 가주가 빠른 속도로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서부에서 오셨군…… 좋은 여행 되시오.”
“감사하오.”
변장과 위조 신분 덕분에 성문에서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경비병은 푸근한 미소를 보였고, 조슈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성 내부로 들어섰다.
목적지는 영주관.
목표는 두 청춘.
허나 그는 곧바로 그쪽으로 움직이는 대신, 다소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영지를 한 바퀴 돌았다.
대륙 중부에 도착한 이후 생긴 버릇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또 자신의 영지가 아닌 다른 곳은 어떤 분위기를,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구경하기 위해, 조슈아는 이처럼 살짝 느린 걸음걸이로 도시의 풍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상을 조금 더 깊이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화.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기름칠.
즉, 술이다.
여름보다 짧아진 낮 덕분에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조슈아는 멀끔해 보이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젠장, 완전 공쳤어.”
“뭔 소리야, 또? 잘 안 됐어?”
“아오! 또 잃었잖아!”
“핫하, 내 상대가 되기엔 십 년은 이르다고!”
가을의 공기보다 따스한 바람, 이를 타고 밀려오는 맛있는 냄새와 약간의 알콜향.
그리고 어느 주점과도 같은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
맥주 한 잔과 요깃거리를 시킨 가주는 천천히 이 장소에 젖어 들었다.
소드마스터의 감각을 동원할 필요조차 없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떠드는 주정뱅이들 사이에서, 조슈아는 조용히 자신의 식사를 이어 가다가…….
“괜찮은 곳이군.”
짧게, 허공에 툭 던지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직후, 한 중년 남성이 맥주를 들고 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걸쳤다.
“확실히, 꽤 괜찮은 곳입니다.”
“…….”
“안주도 괜찮고, 가격은 더 괜찮고. 무엇보다 주종이 다양하다 보니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골라 마시기 좋죠. 아, 혹시 합석은 불편하십니까?”
“괜찮소.”
가주가 짧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자신이 휙 던진 말을 누군가 받아 줄 거란 생각은 못 했지만, 이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잔잔하고, 차분하고. 왠지 모르게 연륜이 깊은 듯한 눈을 가지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잠시 그를 응시하던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툭 던지듯이.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괜찮은 곳이라고 한 건, 주점을 얘기한 게 아니외다.”
“음? 그러면…….”
“이 영지를 얘기한 것이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주변 영지들에 비해 훨씬 나아 보이는군.”
“여행객인 듯한데, 어떤 연유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들려줄 수 있습니까?”
“흠. 좋소.”
이윽고, 조슈아의 입에서 파레이라 영지에 대한 평이 흘러나왔다.
“우선 치안이 훌륭하오. 경비병들의 장비 상태가 괜찮고 절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주민들 또한 불안감이 없어 보이고. 도시 환경은 더욱 괜찮아 보이는군. 영지 주변의 도로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성 내부도 깨끗하게 잘 유지되어 냄새나는 곳이 거의 없더군.”
“호오.”
“주점의 목소리도 인상적이었소. 술 들어가면 앓는 소리 하는 거야 만국 공통이긴 하지만, 하루하루의 걱정보다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으니 나쁜 방향은 아닌 것 같소. 영주께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는 모양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평입니다.”
“빈말은 아니오.”
맥주 한 모금을 마신 조슈아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치안, 도시 정비, 복지.
이것들이 영지의 평판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성 대부분이 골머리를 앓는다.
혹은 영지민들의 삶 따위는 아예 무시해 버리는 썩은 귀족들도 존재하고.
그렇다면, 파레이라 남작은 도대체 어디서 난 돈으로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걸까?
‘아마 영지 차원에서 고수익 사업을 지원하고 있겠지. 유리 공예 조합도 그렇고, 꽤 많은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자들을 많이 유치한 듯 싶으니…….’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가주가 관심을 품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파레이라 남작과 그의 영지에 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차였다.
허나 겉핥기로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풍부한 교역량.
잘 계획된 장인 조합.
이를 가능케 한 사업 수완과, 트러블 없이 굴려 가는 균형 감각.
그리고 이를 영지민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인심까지 있으니,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조슈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들의 유명세와 별개로 말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고, 눈앞의 사내는 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곳 토박이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얼굴을 할 수가 없었다.
다소 당황스러운 것은, 그 토박이가 조슈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영지가 지금보다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음?”
“아, 이런.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데, 주변에는 다들 질려 하는지라…… 꺼려진다면 그만하겠습니다.”
“……그건 아니지만, 너무 넓고 추상적인 질문이라.”
“아, 그것이 문제였군요.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넘어가지요. 최근 영지에 눌러앉은 대장장이들을 활용할 방안을 생각해 봤는데…….”
난데없이 시작된 영지 발전에 관한 토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즐거웠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이와 이 정도로 깊게, 합이 맞게 토론을 이어 간 경우가 처음이었기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의 말솜씨와 태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대 린제이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그조차도 놀랄 정도로 훌륭했기에, 조슈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중년 남성과의 이야기를 즐겼다.
한 시간 후.
가주는 처음 주점에 들어왔을 때와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당신, 대단하군. 혹시 영지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소?”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좀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런 수준이 아닌데…….”
조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탐이 났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린제이 가문으로 영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은 대화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는 식견뿐만이 아니라 인성, 태도까지 올곧은 참된 인재라는 사실을.
마음이 달아오른 가주는 자신이 어째서 이곳까지 왔는지도 잊은 채, 정체를 밝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애꿎은 맥주잔만 계속해서 옆에 쌓여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런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만한 화제가, 옆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자네, 그거 들었나?”
“뭐 말인가?”
“파레이라 도련님 말이야. 린제이 가문의 영애와 맺어졌다는 소문이 있어. 아니, 소문이 아니라 거의 확실한 이야기 같…….”
“뭐라고오오!”
콰아앙!
“…….”
“…….”
“…….”
주점이 정적에 휩싸였다.
주먹 한 방에 테이블을 박살 낸 중년 남성을 보며,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대노했는가.
그 전에,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런 괴력을 발휘했는가.
대부분은 후자를 더 신경 썼고, 그렇기에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 가게를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셈을 치르고 도망가는 이들을 보며 주인이 울상을 지었다.
잠시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붉은 머리 사내가 그에게 금화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일행이 민폐를 끼쳐서…… 약소하지만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부숴도 괜찮습니다.”
금화를 꼭 손에 쥔 주인이 평온을 되찾았다.
적발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가 조슈아 린제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아이른 파레이라 도련님과 일리아 린제이 영애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신 겁니까?”
“……크흠.”
“맞습니까?”
“그렇소만…….”
“그렇군요. 저는 이미 알고 있는 얘기지만, 여행객께서는 아직 모르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하지만, 이렇게까지 흥분하신 이유는…… 쉬이 이해가 안 가는군요.”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희 영지의…… 파레이라 도련님께서, 린제이 영애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언짢기라도 하신 겁니까?
……이렇게 물어 오는 적발 사내의 표정은, 전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딱딱했다.
‘뭐지? 왜 이래?’
조슈아 린제이가 당황했다.
물론 자기 행동이 이상해 보였을 거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다.
충분히 놀랄 일이긴 하지만, 화를 낼 일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일리아의 아버지라는 것은 여기 있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건 뭔데?’
영지의 토박이여서?
존경하는 파레이라 남작의 아들인, 역시나 존경받아 마땅할 명성을 쌓아 가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그래서 기분이 나빴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해.’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기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날 선 분위기를 해소할 방법 역시 명확하다.
사과하면 된다.
미안하다고.
자신이 아단 출신이기에, 린제이 영애는 아단 왕국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조금 흥분했다고.
다른 누군가와 이어졌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인데…….
“당연히 언짢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단 최고의 천재이자, 역대 최연소 소드마스터인 일리아 린제이 아가씨라면……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
오히려 말하면서 더 열이 올라서. 감정이 차올라서.
그래서 상대가 이곳 토박이라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더 모진 말을 쏟아 내던 와중이었다.
그런 가주가 입을 다문 것은, 상대의 눈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꿀꺽, 조슈아가 침을 삼켰다.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다. 검사는 절대 아니었고, 마법사나 요술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선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긴장됐다.
그런데도 기세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단단해 보이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가주가 당혹스러움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벌컥.
“여기 괜찮아. 어때? 가끔은 밖에서 하는 데이트도…….”
“어? 사람이 아무도 없…….”
우뚝.
새로이 주점에 들어온 커플 한 쌍이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듯 따스한 금발을 가진 남성.
밤하늘의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은발이 흐르는 여성.
부서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눈싸움을 하는 두 중년인을 보며, 둘이 동시에 생각했다.
‘아버지?’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