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몰래 온 손님 (1)
파레이라 영지의 아침이 밝았다.
평소와 같은 바람, 평소와 같은 하늘, 평소와 같은 분위기.
아니,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제와 비슷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무언가 달랐다.
적어도 아이른 파레이라와 연이 깊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하루였으니…….
“어이, 아이른. 연애를 시작하게 된 소감이 어떠한가?”
바로 전날에 있었던 뜻 깊고도 중요한 이벤트 때문이었다.
“하하…….”
“음. 그렇게 대충 얼버무릴 셈인가? 괜찮다. 너 말고도 물어볼 사람은 있으니. 일리아?”
“조용히 해.”
“싫다.”
브랫 로이드가 깐족거렸고, 아이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는 날 선 반응을 보였으나 말투만 그럴 뿐, 그와 별다를 것 없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몹시 부끄러워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무척 재미있었기에, 브랫은 한동안 둘을 놀려댔다.
집요하고도 유치한 그의 질문에 키릴은 고개를 저었고, 루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처럼 놀리는 쪽이나, 애들처럼 부끄러워하는 쪽이나.’
정신연령이 10대에서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허나 검술 실력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채앵
“브랫, 대련할까?”
“…….”
“거절은 거절할게.”
“……어쩔 수 없군.”
참다 못한 일리아 린제이가 검을 꺼내 들었고, 브랫 로이드 역시 자세를 갖췄다.
급작스러운 전개였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연무장에 온 거니까.
다만 키릴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떻게 사귀고 다음 날인데, 둘 다 연무장부터 출근하는 거야?’
오빠도 오빠지만, 일리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만한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저 나이에 저만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겠지만, 그래도 연애 초기의 알콩달콩한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진짜, 검 밖에 모르는 바보들…….”
카앙!
카아앙-!
“크윽……!”
“후웁!”
“와, 진짜 하네.”
결국, 브랫과 일리아는 진짜로 대련을 시작했다.
검에 진심인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빠인 아이른의 눈빛 역시 더없이 진지해졌다.
누가 봐도 둘의 대련에 몰입한 모습이었다.
키릴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졌음을 직감한 그녀가 루루를 품에 안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은 치열하게 검을 나누는 둘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일리아의 실력이 늘고 있어.’
린제이 가문에 방문했을 때도 느끼긴 했다.
최근의 그녀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허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오늘의 모습은 놀라웠다.
초입이긴 하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브랫을 압도적으로, 여유롭게 찍어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갑자기 깨달음이라도 찾아온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이 이내 해답을 찾았다.
이그넷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검.
바로 영웅의 검, 아니 마음의 검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마음의 검’은 악마의 파괴 욕구에 상반하는 수호 의지를 검술로 빚어 낸 것이다.
즉,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클수록 그 잠재력이 향상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른이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였다.
원래도 그랬지만, 언어와 약속을 통해 둘의 사이는 더욱 깊어졌고, 단단해졌다.
그 효과가 연인의 검을 통해 발휘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일리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애틋해졌다.
연심을 숨기고, 모른 척하고, 외면했던 지난날들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당장 능숙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끝이 아니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어제보다 더 예뻐 보이는 자신의 연인을 지켜보며, 아이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일리아의 공격을 받아 내느라 저 멀리 날아갔던 브랫이 말했다.
“……더러운 커플 놈들.”
“……?”
“……?”
“날 상대하면서 눈빛 교환을 하는 여유를 보이다니, 치욕스럽기 그지없구나.”
“음…….”
“어…….”
“간다! 타하아앗!”
콰앙!
기합을 내지른 브랫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연무장 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길 정도로 강렬한 돌격, 그리고 찌르기!
그야말로 부모님의 원수를 상대하는 듯한 기세였으나, 일리아에게는 닿지 않았다.
터엉!
휘리리릭……
카강!
군더더기 없는 반격에 당한 브랫이 무기를 놓쳤고, 허무하게 날아간 청검은 듣기 싫은 금속음을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
“…….”
정적이 감돌았다.
마스터의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도, 연무장을 관리하는 병사들도, 딱히 할 일이 없어 되돌아온 키릴과 루루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자신의 검을 집어 든 브랫이 재차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내 검이 하늘에 닿을 때까지, 오늘의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아이른과 일리아가 연인이 된 지 이틀째 되는 날.
브랫은 늦은 오후까지 끈질기게 그들을 붙들고 늘어졌다.
* * *
시간이 흘렀다.
영지는 평소와 같았고, 아이른 커플 역시 평소와 같았다.
저녁 식사 이후의 짧은 데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종일 연무장에서 검술을 갈고닦았다.
특출나게 성실한 몇몇 기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열한 나날이었다.
허나 그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검술에 매진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거베라의 고위 귀족인 브랫 로이드였다.
후웅-!
“허억, 후웁.”
후우웅-!
“하아, 하아…….”
체력 소모가 강한 오러 소드를 항시 유지한 채 검을 휘두르고.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른, 일리아와의 대련을 꺼리지 않는다. 오히려 맹렬하게 원한다.
그야말로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파레이라 영지의 모든 이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키릴 파레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의 놀람은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더욱 컸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브랫 로이드 역시 굉장한 수련을 해 왔을 거란 사실을.
소드마스터의 경지가 재능만으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허나 지금까지 보여 왔던 브랫의 모습은 꽤 여유 넘치고, 진지한 듯하면서도 장난스럽고, 짓궂은 면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그의 노력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오빠의 노력에 절대 뒤지지 않아.’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일리아에게 툭툭 장난을 거는 모습보다, 그 뒤에서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더 크게 보였다.
오빠에게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광경보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대련에 집중하는 모습이 더 깊이 눈에 박혔다.
그렇게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고.
마침내 한 달이 지났음에도 무뎌지지 않은 그의 의지를 보며, 젊은 요술사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누가 봐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천재의 앞을 가로막는, 그보다 더욱 뛰어난 천재.
그들의 앞에서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브랫 로이드를 보며, 키릴이 생각했다.
이 사람이 오빠의 친구여서 다행이라고.
“다음에 또 봐요, 브랫 오빠.”
“……!”
그래서였다.
파레이라 영지를 떠나는 브랫 로이드에게, 키릴이 오빠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이런 그녀의 심경변화를 몰랐다.
브랫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의 당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씨익 웃어 보인 푸른 머리의 검사가, 키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게 반하지 마라.”
“…….”
“나의 친구, 랜스 페터슨을 볼 낯이 없으니까.”
“……그냥, 꺼져요.”
“하하. 다음에 보자. 그리고…… 너희 둘.”
순식간에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간 브랫이 아이른, 일리아 커플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려라. 조만간 브랫&주디스 커플이 너희들을 박살 낼 테니까.”
“…….”
“…….”
“조만간은 좀 힘든가? 아무튼…… 그럴 때가 올 테니까, 긴장하고들 있으라고.”
그럼, 간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브랫 로이드는 영지를 떠났다. 그 흔한 수행원조차 없이, 검 한 자루만 달랑 든 채로.
그 모습은 강대국의 고위 귀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누구도 그를 가벼이 생각하지 못했다.
“……나, 수련 좀 하러 갈게.”
브랫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가 불쑥 말했다. 그리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오늘은 유독 검에 대한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친구가 떠나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물처럼 여유로이 흘러가는 그의 모습을, 아이른은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 * *
영주관을 나서고.
영지의 성문을 나서고.
가을바람이 부는 평원을 유유자적 걸어가던 브랫 로이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자그맣게 변한 파레이라 영지.
허나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커다란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
오래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예비 수련생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의 하늘검을 보며 절망하던 모습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수직 베기를, 녀석이 바닥에 남긴 거대한 흔적을 보며 실의에 빠졌던 모습도…….
이제는, 흘려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잘 흘려 볼까.”
챙-!
브랫 로이드가 검을 빼들었다. 검집을 스치고 나오는 소리가 청명했다. 푸르른 검의 색 역시 마음에 들었다.
슬쩍 미소를 지은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며 천천히, 여유로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웅
검 한 번에,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열등감을 흩어 버리고.
후우웅
검 두 번에, 일리아 린제이에 대한 자격지심을 털어 내었다.
검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걸음걸이에, 숨결에,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을 얽매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 털어 내었다.
이윽고, 브랫의 움직임이 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후우웅
후우우웅
어느새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몸에 머무르고, 검과 어울렸다.
기분 나쁜 바람은 아니었다.
자신을 강제하지 않는다.
막아서지도 않았고.
휘어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부드럽게, 시원하게 자신의 등을 밀어주는 것을 느끼며…….
브랫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고, 걸음을 움직여 나갔다.
그러던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검무를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
누구지?
주변을 돌아보며, 브랫이 생각했다.
유유자적 흐르던 것은 자신의 의지였고, 도중에 불어온 바람을 품은 것도 자신의 뜻이었다.
허나 그 바람을 자신이 만들었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고수.’
소드마스터인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레 녹아들었다가, 도움만 주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의문의 인물.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참 동안 자신과 어울렸던 상대의 검무를 브랫 로이드가 되짚어보고 있을 때.
“……드디어 보이는군. 잘 있겠지, 우리 딸.”
현시대, 하늘에 가장 가까운 검사가 파레이라 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