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67화 (267/388)

◈ 88. 잘 부탁드립니다 (2)

“좋아해, 많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고백은, 브랫 로이드가 주디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정에 없던 고백이 아니었다.

하루의 시간을 두고 충분히 고민했고, 계획을 짰다. 그도 모자라 주변인들의 조언까지 구했다.

하늘을 나는 요술 마차도,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를 고른 것도, 분위기 좋은 저녁 식사 장소를 찾은 것도 전부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랫은 좀, 그렇긴 했지만…….’

선의로 한 행동일 테니 제쳐 두고.

중요한 건,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고백하기 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부분까지라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고백은, 고백을 위한 멘트는 자신이 직접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까지 남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지난밤의 아이른이 오랫동안 잠을 뒤척인 이유였다.

다행히도 소득은 있었다.

아이른이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떨리네.’

자신에 대한 일리아의 마음을 알고 있다.

일리아에 대한 자신의 마음 역시 알고 있다. 그래도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 좋은 모습을, 더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게다가 보통 순간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고백의 순간이지 않은가.

그러나 아이른은 그런 마음을 저 뒤로 미뤘다. 손에서 내려놓았다.

상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세련된 말솜씨와 능숙한 표정, 행동, 태도.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것은, 더 집중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멋있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심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

살짝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도 곁에 없던 내게, 처음 다가와 줬던 일리아를 좋아해.”

검술관에서의 첫 만남을, 아직 제대로 된 인연조차 맺지 못했을 때의 그녀를 떠올린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일리아는 자신에게 친절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자신을 도와줬고,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봐 줬다.

오해가 있을 때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 주고, 꺼내기 쉽지 않은 자신의 옛일도 멋있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5년 만에 나타난 나를, 환한 미소로 반겨 줬던 일리아를 좋아해.”

증명의 땅에서의 일리아도 생각난다.

힘들고 괴로운 시기. 자신이 나태 공자였을 때보다도 더욱 어두운 시기를 보냈음에도, 그녀는 자신을 밝은 얼굴로 반겨 주었다.

비록 또 한 번의 오해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 순간조차도 일리아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그녀를 좋아했던 건 그때부터인 것 같았다.

“여행에 어색했던 일리아도, 요리를 잘 못 하는 일리아도, 주디스한테 배운 욕을 시원하게 쏟아내던 일리아도…… 좋아해.”

“으읏…….”

이야기를 듣던 일리아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요리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는데, 아이른도 조금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질긴 소고기를 썰려고 오러 소드를 뽑아냈던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았다.

서투른 모습도, 서투른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도 전부 일리아였으니까.

아이른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두르칼리에서 있었던 일과 광대 악마와 벌였던 사투처럼 굵직굵직한 일도 있었고.

나란히 앉아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본다거나, 별거 아닌 잡담을 떨었을 때와 같은 사소한 일도 있었다.

그 모든 추억이 소중했고, 좋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일리아.”

일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문득, 너무 장황하게 말을 쏟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기 지겨웠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아이른의 몸을 잠시 붙잡았다.

떨쳐 냈다.

서툴고 어설픈 건 당연하다. 이제 시작이니까. 처음에는 다 그런 거니까.

친구의 조언을 떠올린 그가, 마음에 품은 대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품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사귀어 줄래? 아니…….”

후우.

짧게 숨을 내쉰 아이른이, 조금 더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

“사귀자.”

“…….”

아이른 파레이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눈빛을 보고, 감정을 느끼며.

일리아 역시, 잠시 동안 예전 생각에 빠졌다.

그와 비슷했으나 조금은 달랐다.

아이른은 자신이 언제부터 상대를 좋아했는지,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떠올렸다면.

일리아는 상대가 아닌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는, 나는…….’

아이른이 말해 준 것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 걸까?

예전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질문조차 품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오빠밖에 없었고, 가문밖에 없었다. 이그넷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니다.

광대 악마의 던전에서 탈출하며 깨달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꼭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그때부터 일리아의 감정은 건강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상처만이 가득했던 마음 역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충분할 만큼 나를 사랑하고, 아껴 줄 수 있나?’

편치 않은 질문.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었다.

이 대답을 소홀히 한다면 상처받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마음을 건넨 아이른 역시 힘들고, 괴로울 것이 분명했다.

일리아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응.”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정도로 힘든 질문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수줍게 대답한 그녀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

“아, 방금 되게 바보처럼 웃었다.”

뒤늦게 자기 모습을 자각한 일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대답이 늦어지자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짓는 아이른이.

그러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으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나에 대한 확신이, 자신감이, 자존감이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조금 부족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에게 스며드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 목소리, 마음이라면.

약간의 부족함쯤은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해, 나도.”

일리아 린제이.

이제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연인이 된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여태껏 숨기고 있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이야.

붉어지는 얼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좋아해. 나도…… 많이 좋아해, 아이른.”

“흐…… 앗.”

그 말을 들은 아이른이 멍청한 표정으로 웃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일리아는 그 모습도 좋았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물이 흘러넘치듯, 기분 좋은 감정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모습,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아이른 앞에서만 보여 주고 싶어.’

생각을 마친 일리아 린제이가 손등으로 상대를 툭 쳤다.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아주 느린 속도.

자신을 잡아 달라는 듯한 그녀의 걸음에, 아이른 역시 몸을 움직였다.

툭툭

연인이 되었음에도 어색하게 서로의 손등을 스치다가.

꽈악

긴장한 느낌으로, 약간 땀이 찬 상태로 맞잡아진 손.

둘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이를 놓지 않았다.

연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풋풋한 그들을, 밤하늘의 달만이 또다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손만 잡고 끝이야?”

“왜? 손잡은 게 별로야?”

“아니, 그렇잖아. 분위기가 저렇게 좋은데, 그 뭐냐, 그, 더 진도 빼도 되잖아!”

“진도?”

……아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일리아 린제이, 둘을 지켜보는 이는 달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바로 오늘의 데이트를 주도한 키릴 파레이라와 루루, 브랫 로이드였다.

웬만한 기척은 숨소리조차 잡아낼 정도로 민감한 두 소드마스터들이었지만, 키릴과 루루가 작정하고 펼친 요술을 뚫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곳에 신경이 팔리기도 했고.

그리하여 두 요술사들은 데이트의 결과를 놓고 마음껏, 심도 있게 토론할 수 있었다.

아니, 토론이라고 보긴 조금 그랬다.

지금의 대화는, 그저 키릴의 일방적인 불만으로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응? 저 정도 분위기면, 뽀, 뽀뽀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

“으음. 그런가?”

“당연히 그렇지!”

키릴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는가.

아이른의 스타일링을 해 주고, 요술 마차를 조종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녁 식사 이후에 고백하기 좋은 장소로 유도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산책길은 도시에서 굉장히 신경 써서 조경한 곳으로, 원래라면 사람이 바글바글해야 정상이었다.

허나 둘을 위해 루루가 하루를 전세 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고백은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그거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이것이 키릴의 주장이었고, 검은 고양이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루루는 아이른과 일리아가 맺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성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둘 치고 꽤 노력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브랫 역시 마찬가지였다.

멀어지는 둘을 지켜보던 그가 진중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둘 다 이런 쪽으로는 워낙 내성적이다 보니, 키릴 말처럼 쉽게, 빠르게 뭔가가 이뤄지지는 않을 거 같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지 않나? 풋풋하고 순수하게, 조금 답답한 정도로 나아가는 편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브랫의 말을 들은 키릴이 확 인상을 쓰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요. 로이드 씨가 억지 부려서 둘 테이블을 담당하니까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잖아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분위기가 좋았을 텐데.”

“뭣…… 그렇지 않다. 나의 메뉴에 어울리는 적절한 주류 페어링 덕분에, 둘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브랫, 그건 아닌 거 같아.”

루루가 고개를 저었고, 키릴 역시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눈빛이 몹시 진지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의 감정도 담겨 있었다.

“안 되겠어. 유심히 지켜보다가, 또 너무 지지부진한 느낌 들면…….”

“들면?”

“그때 다시 소집하자. 긴급회의.”

“오, 좋아! 나 그런 거 엄청 좋아! 재밌어!”

“재미로 하는 거 아니거든!”

“히잉…….”

잔뜩 신이 난 루루와, 그런 루루를 혼내는 키릴.

둘 중 누구 하나 자신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문득 쓸쓸함을 느낀 브랫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연인을 떠올렸다.

‘보고 싶다. 주디스…….’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평소처럼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겠지?

오늘따라 가을바람이 차다고 생각하며, 그가 고독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 시각.

“……왜 이렇게 가렵지?”

“어이! 딴짓하지 마라! 스승의 가르침이 우습나!”

“아니, 잠깐! 지금 이상하게 귀가 너무 가려워서…….”

“핑계 대지 마라! 쉬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 다 안…….”

“아니, 이 미친 영감아! 진짜 엄청 가려워서 그렇다니까, 사람 말 좀 믿어!”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고 있나? 브랫이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귀가 가려워진 주디스 역시, 자신의 연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