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잘 부탁드립니다 (1)
‘이게 무슨 일이지?’
아이른 파레이라의 초대에 응한 일리아 린제이.
그녀는 기대와 설렘, 당황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벌인 실수를 만회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러니까 예전처럼 어색하지 않은 느낌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것만 잔뜩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리아의 머릿속에는, 곧이어 있을 데이트에 관한 생각만이 가득할 뿐.
복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옷, 어울리나…….’
무도회에서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함께 여행을 다닐 때처럼 편의성에만 신경 쓴 것도 아니다.
과하게 힘을 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선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을 골랐다. 그런데도 걱정이 됐다.
옅게 뿌린 향수.
스치듯 가볍게 한 화장.
평소엔 하지 않는 귀걸이까지.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는 어떻게 봐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일리아.”
“……아, 아이른.”
“오랜만이네.”
“응, 오, 오랜만이야. 그러게.”
일리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실 오랜만은 아니었다. 바로 어제 만나지 않았는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날이긴 했지만,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아이른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보고 싶던 아이른의 모습.
아니, 마음에 품고 있던 모습보다도 조금 더 멋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잘 어울리네?”
“어? 어?”
“귀걸이. 예전에는 한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아? 아아, 응, 그냥…….”
화악
일리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머릿속의 생각도 훨씬 더 복잡해졌다.
무슨 의미지?
자신을 칭찬한 건가? 예쁘다고 한 건가?
그게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귀걸이가 어울린다는 뜻? 확대해석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바로 알아보네.’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
별거 아닌 장신구일 뿐이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할까 말까 여러 번 고민했던 부분을, 그만큼 신경 썼던 부분을 바로 알아차려 주는 아이른이…….
조금 낯설었다.
물론 싫은 것은 아니었다.
좋았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될 정도로.
‘……아니, 지금 내 표정 어떻지?’
일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표정을 지웠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엄청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또 한 번 추가된 부끄러움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른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일리아의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되었다.
저 하늘에서, 마차가 내려오고 있었다.
“…….”
엄밀히 말하면 마차는 아니었다.
앵무새 머리의, 그것도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는 특이하기 그지없는 그리핀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녀석은 평소와 달리 얌전한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하였다.
요술의 힘인지 뒤에 걸려 있는 수레 부분도 부드럽게 안착해, 일리아와 아이른의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그리핀 앵두의 몸에서 뛰어내린 키릴 파레이라가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두 분의 이동을 책임질 키릴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루루라고 합니다.”
“…….”
“그럼, 마차에 오르실까요?”
“어…….”
“타자, 일리아.”
“아?”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짓는 일리아의 손을, 아이른이 잡았다.
덥석 잡은 것이 아니었다. 살며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행동.
허나 일리아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어, 하는 사이에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고,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자리에 앉아 아이른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 키릴과 루루의 목소리가 흐르고, 마차가 움직였다.
두 요술사가 심혈을 기울여 조종하는 덕분인지, 평소와 같은 거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마차로는 좀 멀어서.”
“…….”
“어때?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지? 아, 그리고 미안해. 물어보지도 않고 내 멋대로 다 정해서.”
“……전혀. 미안해할 필요 하나도 없어.”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일리아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타는 그리핀이 아니었다.
당장 파레이라 영지로 날아올 때만 해도 지겹게 봤던 바깥 풍경이었기에, 색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달랐다.
많이 달랐다.
‘예전의 내 모습은, 그리핀을 타고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모험 소설의 주인공 같았다면, 지금의 나는…….’
일리아의 시선이 다시 아이른 쪽으로 돌아왔다.
요술 고양이가 모는 요술 마차를 타고.
세상 누구보다 멋진, 자신이 마음에 품은 사람과 함께 하늘을 비행하는 지금.
그녀는, 자신이 마치 연애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다 왔다.”
“어?”
벌써?
일리아가 깜짝 놀랐다.
조금 더 지금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높은 하늘 위, 아이른과 자신만이 함께인 듯한 지금 이 순간을 더 길게, 조금만 더 오래 만끽하고 싶었다.
물론 그러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드러낼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
장난스러운 말투지만, 마냥 장난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한 아이른의 말투.
상대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일리아가, 이내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걱정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와 달리, 요술 마차에서 내려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의 곁에.
미소 띤 얼굴로 함께 걸어가는 아이른의 손을, 그녀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걱정 없겠네.”
“응. 걱정 없겠어.”
“걱정 없겠군.”
그런 둘의 뒷모습을 키릴과 루루,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브랫이 흐뭇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 * *
거베라 왕국의 자유도시 세반티노는 예술로 유명하다.
그림, 음악, 조각,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이를 즐기려는 사람들 덕분에 가을에는 항시 축제가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일리아와 아이른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았다.
거리를 거닐며, 둘은 정말로 오랜만에 검 이외의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았다.
“저거 보러 갈까?”
“와, 1분 만에 초상화를 그리네!”
“저쪽 음악 소리가 좋은데…….”
“거리 공연 많이 봤으니까, 안에도 들어갈까?”
처음에는 예술인들의 거리를 즐기는 것이 어색했던 일리아였다.
실제로 데이트 초반만 해도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아이른이 안내하는 곳을 수동적으로 따라다닐 뿐이었다.
허나 그것은 잠시였다.
어제의 부끄러웠던 사건이 잊히고.
자신의 곁에 있던 키릴과 루루가 사라지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현재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고 느낀 순간.
그 순간부터 일리아는 아이른과의 시간을 100퍼센트 만끽하기 시작했다.
아마 예전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의 모습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들키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그렇게 누구도 믿지 못하고, 그런 주제에 자신조차 믿지 못하고 위태롭게 걸어가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의 앞이라 할지라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문득 자리에 멈춰 선 일리아가 아이른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금발의 청년이 물었다.
“왜?”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와 함께.
……그런 그의 얼굴을, 오늘 봐 왔던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진하게 들여다보던 일리아가.
“그냥, 좋아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처음처럼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거나 멍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떨렸다.
오러와 신체를 극한까지 컨트롤했음에도 그랬다.
솔직하고 싶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말해 주고 싶다. 그래서 했다.
하지만 100% 정확하게, 온전하게……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보여 주는 것은, 아직은 무리였다.
“응, 나도 좋아.”
다시 한번 미소를 지은 아이른이 이렇게 대답했다.
큰 의미는 없을 터였다. 아마 지금의 축제 분위기가,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한 때가 좋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아니라.
그 사실에 일리아는 아쉬움을 느꼈고, 또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못하겠어.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가, 저녁 식사를 위해 재차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반글라스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전주부터 대접하겠습니다.”
“전채요리와 어울리는 세반티노의 명주를 페어링하겠습니다. 풍미가 깊으면서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을 즐겨 보시죠.”
“스테이크에 어울리는 레드와인 한 잔 어떠십니까? 마침 굉장히 훌륭한 아이가 가게에 들어왔는데…….”
“디저트와 함께 칵테일 하나 추천드리고 싶군요. 시트러스한 향과 약간의 감칠맛이 느껴지는…….”
“너, 브랫이지.”
“……무슨 소리를.”
“됐으니까 저리 가.”
“실례지만, 브랫이 누구죠? 제 이름은…….”
“브랫, 그만해.”
“……어떻게 알았지.”
“좀 가라, 제발.”
이상하다. 변장은 완벽했는데.
조용히 중얼거리며 사라지는 웨이터, 아니 변장한 브랫을 돌려보낸 둘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식보다 술에 진심인 모습도, 가끔 드러나는 특유의 말투나 몸짓도 거베라의 고위 귀족 그 자체였으니까.
“미안.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재밌었어.”
일리아가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이었다.
식사 전의 자신은, 솔직히 말해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갑자기 날아온 아이른의 초대.
조금은 달라진 아이른의 태도.
그로 인한 설렘과 기대가 사정없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착각하면 안 돼.’
일리아가 자신의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전보다 많이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초대에 응했을 때 떠올렸던 수많은 상상들 중 가장 바라는 순간이 오늘 찾아올 수도 있는 거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겁이 났다. 지금의 행복이 깨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브랫의 황당한 개입에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일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떨리네.’
그런 그녀를, 아이른 파레이라가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계속해서 바라봤다. 끊임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코를, 입술을, 귀를, 평소엔 하지 않던 귀걸이를,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예쁜 눈망울을.
예뻤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이 더 예쁘게 느껴졌다.
‘아마, 내 마음이 전보다 커졌기 때문이겠지.’
오랫동안 자신을 낮춰 왔던 나태 공자였기에.
그 역시 일리아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
“일리아.”
가게에서 나와 걷고, 걷고, 걷던 둘이 발을 멈췄다.
일리아가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아이른 쪽으로 시선을 맞췄다.
인적이 드문 장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
눌려 있던 감정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혹시 하는 생각과 아닐 거야, 하는 생각이 팽팽하게 힘 싸움을 벌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좋아해.”
“…….”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
“좋아해, 많이.”
절대 다른 쪽으로 착각할 수 없도록.
명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