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65화 (265/388)

◈ 87. 처음 뵙겠습니다 (3)

‘분위기가 묘한데?’

채광이 잘 드는 넓은 손님용 방에 들어오며,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 생각했다.

원래라면 가문으로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씻은 뒤, 아내와 차분한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아들이 왕성에서 보였던 멋있는 모습에 관해, 또 아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처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물론 지금 상황이 그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어찌 됐건 후자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허나, 남작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긴급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죠. 브랫 로이드 씨?”

“키릴, 이젠 오빠라고 부를 때도 되지 않았나?”

“전혀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맞닥뜨려서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줄래요? 왜 일리아 언니랑 로이드 씨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 이야기부터 하는 게 순서겠군.”

회의의 주도자인 키릴 파레이라가 질문을 건넸고, 로이드 영지의 장남이 당연하다는 듯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파레이라 남작은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루루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이야기에 몰입하였다.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다만, 나도 듣고 싶군.”

“어떤 걸요?”

“로이드 영지를 떠난 이후의 이야기 말이야. 그 사이에 아이른과 일리아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음, 좋아요.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편이 앞으로의 대책을 이야기하기에도 편하겠네요.”

‘무슨 대책?’

아이른이 또다시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회의가 이어졌고, 키릴 역시 린제이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빠르게 설명하였다.

브랫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말주변이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브랫, 키릴, 루루, 파레이라 내외까지…… 모두가 아이른과 일리아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기류에 대해 완벽하게 숙지하게 되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미묘한 기류도 아니었다.

당사자인 둘에게만 미묘하고 알쏭달쏭한.

허나 지켜보던 모든 이들에게는 속이 터져 죽을 것처럼 확실하고 명료한 연애 감정.

회의에 강제로 참석하게 된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더욱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 역시도.

“아이른 파레이라.”

“……응.”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망설이지는 않겠지?”

브랫 로이드가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단 그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꺼낸 것은 브랫이었지만.

루루와 키릴, 심지어 자세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파레이라 내외까지 같은 눈빛, 같은 생각으로 아이른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선에 금발의 청년은, 아니 소년은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미 알고 있었어.’

정말이었다.

자신이 일리아를 좋아하듯, 그녀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자신에게만 달라지는 말투.

자신에게만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그보다 확실한, 무도회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그런데도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은,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했던 것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태 공자 시절처럼…….’

아이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겁이 나고, 두렵고, 지치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로 인해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던 때를 떠올렸고.

등 떠밀려 시작했으나 마침내 검을 들고, 휘두르고, 넘어지고 부딪힘으로 인해 점차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를 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

무엇이 나은 행동인지는 분명했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가 그리핀을 타고 먼 거리를 날아오고, 술의 도움을 받아서나마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듯.

자신 역시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두렵다고 뒷걸음질 치거나 멍하니 서 있는 대신, 앞으로 내디딜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돌아본 그의 입에서, 결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백해야겠어.”

“오!”

“오오.”

“좋아! 잘 생각했…….”

“……그런데.”

루루, 브랫, 키릴의 환호를 듣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뒤늦게 자신감 없는 듯한 말을 꺼냈다.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하지?”

“…….”

“…….”

“그냥 대뜸 찾아가서 할 수는 없는…… 어, 그러니까, 뭔가 상대의 마음에 들 만한, 그런 뭔가는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또, 뭔가 준비할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하아…….”

급격히 어두워진 분위기 속에서, 키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연애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소심하고, 겁 많고, 답답한 자신의 오빠다.

그렇다 보니 행동 하나를 할 때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 생각의 방향이 걱정으로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쩌면, 지금 오빠의 머릿속에는 고백을 엉망으로 해서 분위기가 완전 싸해지는…… 그런 미래들만 잔뜩 떠오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 반대의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 이전에…… 오빠가 고백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든 일리아가 기뻐할 거란 사실을, 아이른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냥 해, 이 바보야!’라고 말한다 해서 오빠가 곧이곧대로 말을 들을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후우…….”

키릴이 또 한 번 한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저 답답하고 걱정 많은 오빠를 자신감 넘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브랫 로이드가, 아이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른,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워라.”

“어?”

“고백이라는 것은 연인이 결실을 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 물론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

“그 걱정으로 인해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잊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면…… 그게 엉망진창의 고백을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른.”

브랫이 다시 한번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상관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몇 초간 시선을 받아내던 브랫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 네가 처음 검을 들었던 때를 떠올려라. 엉망진창이고, 형편없고, 검술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민망했지만…… 결국, 지금의 너는 소드마스터다.”

“…….”

“연애도 마찬가지야. 일단 시작을 하고, 부딪히고, 노력해라. 그러면서 점차 나아져. 다행히 일리아는 네가 어떤 바보짓을 하든 이해해 줄 만큼 괜찮은 녀석이니까, 그리고 나나 키릴이나, 여기 계신 네 부모님이나. 헤매고 방황하더라도 조언해 줄 사람은 많으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고민을 시작해라.

브랫 로이드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

“…….”

“…….”

방안이 고요해졌다.

말을 마친 브랫도, 조언을 들은 아이른도. 그 외의 이들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흘러갔다.

허나 걱정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모두를 지켜보던 루루가 생각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아이른.’

누군가는 이 요술 고양이의 생각에 반박할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우물쭈물 우유부단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니 똑같은 것 아니냐고.

결국, 남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렇지 않았다.

15살의 나태공자에게는 가족뿐이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그보다 많은 인연이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 같은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노력하여 관계 쌓아 올린 결과였다.

브랫이 아이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쏟아내는 것은, 아이른 역시 브랫에게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그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것 역시, 아이른이 자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 왔기 때문이다.

즉.

지금 아이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이른이 모두에게 잘했기에, 노력했기에 따라온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아마 일리아가 아이른에게 빠진 이유도 이 때문일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루루가 인간처럼 미소를 지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괜히 그러고 싶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소중한 이의 성장을 예감한 듯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살짝 머리를 숙이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봤다.

어딘가 개운해진 듯, 허나 여전히 긴장 한 조각은 품고 있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두 고마워요. 머리가 많이 맑아진 기분입니다. 고백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조금만 더 저를 도와주는 건, 안 될까요?

뒤를 잇는 아이른의 말에, 모두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안 될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아이른의 더욱 적극적인 개입 하에 회의가 재개되었다.

* * *

“아으, 아아!”

뻥!

뻐엉!

위기의 순간에서 도망친 일리아 린제이가 연신 이불을 걷어찼다.

혹시 꿈은 아닐까.

술을 너무 마셔서 헛것을 본 게 아닐까.

그런 희망을 품으며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잠에서 깬 그녀에게 찾아온 건, 어제 일이 진짜였다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일리아가 이불을 걷어차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도저히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가문으로 도망가야 할까?

그러기는 또 싫었다.

드디어 아이른을 만났는데,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해 보고 돌아가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관계로 돌아가자.

그것이 일리아가 원하는 바였다.

물론 방법까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으으으, 으으…….”

뻥! 뻥!

뻐엉!

퍼엉!

“……아, 터졌네.”

그렇게 애꿎은 이불만 괴롭히며,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려는 순간이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몹시 두려운 것이 많았다. 아멜리아 파레이라도 무서웠고, 하룬 파레이라 남작도 무서웠다.

누구보다 보고 싶은 존재인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지금 당장 마주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다행히도 노크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슈루룩-!

요술을 사용해 내부로 들어온 검은 고양이, 루루가 입을 열었다.

“일리아 린제이 아가씨.”

“으, 응?”

일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말투도 말투였지만, 루루의 복장 역시 범상치 않았다.

고양이의 몸에 맞춘 멋스러운 정장, 목에 달린 나비넥타이, 그리고 앙증맞은 모자.

마치 연회의 안내인, 혹은 고급 레스토랑의 지배인과 같은 모습에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공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 일리아 린제이 아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부디 레이디를 모실 영광을 허락해 달라고.”

“…….”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

누구라도 눈을 뗄 수 없는 귀여운 광경이었으나.

일리아 린제이의 눈은 그보다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던 그녀가, 이윽고 답을 주었다.

“……응.”

평소와 달리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