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64화 (264/388)

◈ 87. 처음 뵙겠습니다 (2)

파레이라 영지는 5월의 몬스터 토벌 시기를 제외하면 항시 평화롭다.

최근 규모가 커진 탓에 병력을 증강하고, 덩달아 군 기강을 잡고 있긴 했다.

허나 검에 진심인 서부 왕국들에 비하면, 빈말로라도 열심히 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파레이라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영지의 작은 주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긴 여정에서 복귀한 이후.

가문의 연무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붐비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휘이이익!

카앙-!

“흐읍! 합!”

“허억, 허억…….”

“한 바퀴 더 돌자! 못 따라오는 놈이 저녁 쏘는 거야!”

소문으로만 듣던 소영주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풍문으로만 듣던 소영주의 영향력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파레이라 영지보다 더욱 높은 작위의 가주들도, 훨씬 대단한 나라의 귀족들도 도련님을 어렵게 생각했다.

심지어 한참 아랫사람인 자신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변화가 영지의 기사들을, 병사들을 움직이게 했다.

‘달라진 대우에 합당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당장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도련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념하에, 정말 많은 이들이 자발적인 훈련에 나섰다.

물론 얼마 못 가 관두는 이도 있었고, 처음에 비해 노력의 밀도가 낮아진 이도 있었다.

허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불꽃을 품은 채,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검을 휘두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뜨겁게 움직이는 자들조차, 소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두 청춘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쒜에에엑-!

콰아아아아앙!

쾅, 쾅, 쾅, 콰아아앙!

“크윽!”

“정신 차려! 다시 간다!”

“이런 씨……!”

최연소 소드마스터에 빛나는 린제이 가의 재녀,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크로노 검술관의 황금세대를 이끌고 있는 천재, 브랫 로이드.

파레이라 영지에 도착한 이후, 둘은 그야말로 전쟁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수련, 대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물론 승패는 변함없었다.

이제 막 경지에 오른 브랫과 달리, 일리아는 그 너머의 세계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이상해. 그리고 신기해.’

강한 돌풍을 휘감은 검격을 날리며, 일리아 린제이가 생각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그러니까 아이른에 대한 연정을 자각한 뒤부터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허나 요 며칠은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검술에 탄력이 붙고 있었다.

만약 대련 상대가 아버지인 조슈아 린제이, 혹은 아이른 파레이라였다면 모르겠다.

허나 지금 검을 맞대고 있는 건 브랫이고,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실력은 자신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하수와의, 그렇기에 비교적 여유로운 싸움을 이어 가는 와중에 검술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니.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대충 결론을 내렸다.

‘브랫이 타격감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퍼런 녀석은 정말로 상대하기 괜찮았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듯하다가도 가끔씩 예상치 못한 반격을 해 오고, 평범한 검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일 수 없는 창의성을 보여 줬다.

요컨대, 예전의 그보다 훨씬 검술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것만으로 지금의 성장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일리아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기회가 온 김에 더 패자.’

원래도 그랬지만, 요 며칠 새에 왠지 모르게 더 얄미워진 녀석이다.

슬쩍 웃은 그녀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발에 힘을 주었다.

터엉-!

돌격, 돌격, 또 한 번의 돌격!

끊임없이 몰아치는 태풍을 마주하며, 브랫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적당히 해, 이 자식아!’

콰아앙!

지지지지지직-!

“크으으윽……!”

둔중한 충격을 받아 낸 그가 저 멀리 밀려났다. 손아귀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시큰거렸다.

허나 숨 돌릴 시간조차 부족했다.

어느새 자기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보며, 브랫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사실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도했었다.

그 역시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최근 성장에 탄력을 받고 있었기에, 더욱 뛰어난 상대와의 대련을 통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싶었다.

이를 통해 더욱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 싶었다.

하지만 정도가 심했다.

지금의 일리아는, 마치 아이른을 기다리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모조리 자신에게 푸는 듯 과격했다.

사나웠다. 조금 심한 말이지만 미궁에서 만났던 석상의 악마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그런 나날을 열흘이나 버텨 왔고, 심지어 앞으로도 한참이나 겪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수련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콰아앙!

“커허윽!”

‘안 돼.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 돼!’

옆구리로 쏘아진 검을 막으며, 신음을 흘리며 브랫이 생각했다.

더는 힘들었다. 이 괴물 같은 녀석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아니, 도망칠 수 없다면 잠깐 쉬어갈 시간 정도는 벌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

“쿨럭!”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피를 토하는 모습에 일리아가 검을 거두었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친구를 보며 브랫이 안도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늘은 그만하겠지.

혀를 씹길 잘했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쉴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낸 일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이거…… 룬텔 왕가에서 만든 최고급 포션이야.”

“…….”

“그리 큰 부상 같진 않으니까, 이거면 한 30분만 쉬면 바로 힘이 날…….”

“일리아.”

“어?”

“최근 네 모습,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그게 무슨…….”

무슨 헛소리냐고 내뱉으려던 일리아가, 말을 삼켰다.

친구의 표정이 몹시 심각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순식간에 경청의 자세를 갖추었다.

증명의 땅에서까지의 자신은 이렇지 않았다.

남의 말을 누구보다 의식하는 주제에, 가까운 이의 조언에는 귀를 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괜찮았다. 전부 아이른 덕분이었다.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친한 친구의 조언을 들을 자세가 된 그녀에게, 브랫 로이드가 말했다.

“……대련은 여기까지 하고, 술 한잔하는 건 어때?”

“술?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브랫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약간 다급하게, 다소 절박한 목소리로.

“아니, 오해하지 마라. 절대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대련이 힘이 들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나를 스트레스 해소용 허수아비처럼 다루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화가 난 것도 아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 지금 당장 사과해라. 친구인 브랫 로이드를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대 로이드 가의 소영주를 얕보는 것은 아버지와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아니, 괜찮다. 말할 필요 없다. 이미 네 마음속의 외침을 들었다. 오해해서 미안하고, 날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너의 말, 확실히 받았으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사설이 길었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네게 하고 싶었던 조언은…….”

브랫의 말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조리 있고 논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량의 헛소리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일리아는 쉽사리 상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브랫은 침착하게 한 번 더 헛소리를 늘어놓았고,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지금 자신이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그렇다. 나는 항상 옳은 말만 하지.”

“으음…….”

“깊게 생각하지 마라. 아무튼, 술은 과하게 먹으면 독이지만 적절히 먹으면 약이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쉴 새 없이 자신을 몰아치는 조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벼이 술을 즐기는 것…… 굉장히 현명하고 여유 있는 행위지.”

“그런…….”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파레이라의 영주님도 술을 꽤 즐기신다고 들었다. 어때? 이참에 영주님께서 자주 즐기시는 술을 미리 맛보고, 그에 관한 지식과 정취를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

“그럴까?”

“…….”

“왜?”

“아니, 아니다. 그럼 대련은 여기까지 하지.”

진작 영주님 이야기부터 꺼낼걸.

슬쩍 투덜거린 브랫이었지만, 어찌 됐건 그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위험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술이야 항상 환영인 그였으나,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이 바로 술자리였다.

참고로 주디스의 경우는 후자로 향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의 여자 친구지만, 그녀의 주사는 확실히 범상치 않은 면이 있었다.

‘일리아는…… 괜찮겠지. 딱히 주사 없었으니까.’

자신이나 쿠바르처럼 자주 즐기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여행 도중 몇 번의 술자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브랫은 기분 좋은 얼굴로 위스키 몇 병을 꺼냈고, 향과 맛과 여유를 음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합석한 루루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고, 꿀떡꿀떡 술을 넘기는 일리아를 보며 대견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마음이 평온해진 그는 친구가 주량을 넘겨 버린 것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고.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주사가 지금 튀어나올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른 파레이라, 하룬 파레이라, 키릴 파레이라의 앞에서 튀어나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일리아를 쫓아 나온 브랫과 루루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아아, 늦었나…….”

“늦었어, 브랫.”

‘뭐가 늦었는데?’

그 말을 들은 아이른이 당황 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허나 오래 그럴 수는 없었다.

두 손을 뻗은 일리아가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홱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맞추었다.

“어디 봐. 날 봐.”

“…….”

“따라 해 봐. 일리아만 보겠습니다.”

“…….”

“안 따라 할 거야?”

“이, 일리아만 보겠습……니다…….”

“뭐야. 나만 보라고 말했는데, 왜 자꾸 이리저리 눈 돌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대의 눈을 보며, 일리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은 열흘 내내, 한시도 빠짐없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왜 아이른의 시선은 계속해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있기에?’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었다. 그리고 후자가 이겼다.

귀엽게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아이른이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룬 파레이라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

“…….”

“…….”

정적.

고요.

조용함.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일리아가 아이른의 얼굴로부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발자국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시야가 넓어졌고, 한 사람이 더 눈에 들어왔다.

영지에 머무는 내내 자신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여 줬던 존재.

아이른의 어머니, 아멜리아 파레이라.

그녀의 모습까지 확인한 일리아 린제이는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가.

파앗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분위기는 여전했다.

남작을 포함한 파레이라 가족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영주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던 이들 역시 어쩔 줄 모른 채 주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브랫이 아이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부 네 잘못이다.”

“…….”

“죄를 인정하나, 아이른 파레이라?”

진지하기 그지없는 친구의 말에,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파레이라 내외는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짝!

“……지금부터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손뼉을 친 키릴 파레이라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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