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63화 (263/388)

◈ 87. 처음 뵙겠습니다 (1)

‘대륙의 동쪽’ 하면 생각나는 곳은 마법으로 유명한 룬텔 왕국, 그리고 요술로 유명한 세자르 공국이다.

고도로 발전한 두 왕국 덕분에, 사람들에겐 동부가 꽤 살기 좋은 동네라는 인식이 있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두 왕국을 제외한 소국들은 대륙 남부 뺨치게 혼란스럽고, 그보다 넓은 면적의 땅에는 위험한 몬스터가 득실거린다.

세자르 공국의 동남쪽에 자리한 가비르 숲이 그러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들.

사람의 피를 한 바가지씩 빠는 해충과 스치기만 해도 발작을 유발하는 독초, 그런 것들을 주식으로 삼는 끔찍한 몬스터들까지.

‘가비르 숲에 들어가지 마라. 그곳엔 악마가 산다.’

‘억만금을 얻을 수 있대도 가비르 숲엔 들어가지 않겠다.’

유명한 길잡이들조차 그리 말할 정도였으니, 가비르 숲은 그야말로 몬스터들의 천국과도 같은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 ‘진짜’ 악마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콱!

철퍽-!

콱!

철퍽-!

거대한 식칼로 고블린의 사지를 자르고, 머리를 떼어낸다. 싱싱한 피가 흐르는 몸통은 갈고리에 던져 걸어놓는다.

행동에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재미있으니까 할 뿐이었다.

허나 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일주일 전까지였다. 수백,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을 도살하며 악마가 깨달은 것은 하나였다.

더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다.

‘인간이 필요해.’

악마가 자신의 둥지를 떠나 숲 밖으로 나가려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만약 평범하게 일이 흘러갔더라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커다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터다.

신성왕국의 악마 토벌대에게 발견되기 직전까지는.

“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아직 깽판 부리기 전이구나!”

“……?”

그렇기에.

가비르 숲의 초입에서 광대를 만난 것은, 악마에게 불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좋아, 좋아. 남부 대수림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몸을 숨기고 있기에는 안성맞춤이지. 소란을 일으킬 녀석들은 너 아니어도 많아. 굳이 네 녀석까지 손을 보탤 이유가 없…….”

후우우우웅-!

악마는 광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곧바로 자신의 애병인 대형식칼을 내리쳤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인간의 정취, 인간의 감정, 인간의 공포를 맛보기 위해 조금 더 온건한 행동을 보였을 터.

즉, 악마는 광대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던 것이고.

그러한 감은 정확했다.

하지만 행동마저 정답은 아니었다.

슬쩍 웃은 광대가 앙상한 팔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터엉-!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허공을 짓누르는 듯한 시늉을 했다.

철퍽-!

“음음, 그럭저럭 회복할 정도는 되겠어.”

광대가 쓰러진 악마의 몸 위에 올라갔다.

머리를 잃었음에도 시체는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광대가 배를 쓰다듬자 이내 멈추었다.

즈즈즉, 마기(魔氣)가 흡수됨에 따라 거대했던 몸은 쪼그라들었고, 형편없이 망가졌던 가면은 제 형상을 찾아갔다.

힘을 되찾는 것에 집중하던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서신 한 장이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질 때였다.

“……으음!”

광대 악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편지의 내용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상의 없이 환생자(幻生者)와 내기한 것을 꾸짖을 줄 알았건만, 사제 녀석은 전혀 다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악마보다 강한 마인이라…….”

다른 녀석이었다면 비웃음을 머금었을 터다.

악마와 계약하여 마기를 받아들인 인간과 날 때부터 마(魔) 그 자체인 악마는 격이 다르다.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가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존재들은 에고가 강해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걸 봤으니,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룬텔의 대마법사라.

더럽게 자존심 센 녀석을 어떻게 굴복시킬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했다.

마음에 관한 것은 사제가 자신보다 한 수 위였으니까. 애초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고.

“……으음. 으음.”

콰직! 콰직!

자기 몸만큼이나 거대한 식칼로 사체를 조각내며, 광대 악마가 묘한 신음을 흘렸다.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재회의 시간을 기다리며, 그가 가비르 숲의 내부로 숨어 들어갔다.

* * *

“고맙소, 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 하룬 파레이라 남작! 아, 키릴 파레이라 양도 물론이고. 그대들이 있어서 짐이 얼마나, 얼마나……!”

연회가 무사히 끝나고.

왕성을 떠나는 파레이라 일행을 향해, 헤일의 국왕이 직접 배웅에 나섰다.

원래도 다정다감한 왕이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과 눈빛에 드러난 감정은 평범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끝날 뻔한 연회를 살리고,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더 나아가 국가의 위신을 세운 것이 저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말이 잘 안 나오는구만. 미안하네. 그대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복받치고, 자랑스러움이 샘솟다 보니…….”

“폐하의 후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아쉽구만. 내 어여쁜 딸이라도 있었다면, 마스터 파레이라의 배필이 될 수 있을지 물어라도 보았을 터인데…….”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하룬 파레이라 남작의 예의 바른 반응에 국왕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열심히 거사를 치러 딸을 낳은 다음, 태중 혼약을 맺으면 어떠냐고 떼라도 쓰고 싶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난과 쾰른 왕국에서 흘러나온 은근한 혼담을 마스터 파레이라가 전부 거절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왕국이면 모를까, 저 두 왕국 중 하나와 연을 맺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4왕국은 영원한 라이벌이었으니까.

“이런, 짐이 너무 오래 붙잡았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후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마스터 파레이라, 자네의 동상을 성 한복판에 세워 둘…….”

“……거기까지 하시지요, 폐하.”

그만하겠다면서도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가려는 국왕을 왕비가 제지했고, 파레이라 가족은 가까스로 왕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와 아들, 딸은 조용한 한때를 보냈다.

허나 그러한 고요함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다.

“아들.”

“예.”

“이미 마음에 둔 처자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그러니까,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린제이 가문의…… 그, 맞느냐?”

“…….”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검을 든 이후.

아니 자신의 검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을 때조차도, 아이른은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은 부끄러웠다.

감추고 싶었고, 숨기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이 잘못되고 모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가 뭘까?’

‘이런 면은 아직 어리구나.’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러워하는 아들과는 다르게.

자식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오랜만에 친근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최근의 아이른을 보며 하룬은 적지 않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아들은 어리고 연약한,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다루고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크로노 검술관을 무사히 졸업하고, 마인 토벌에서 활약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허나 2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정확히는 검술 특강에서 자신의 검을 보인 이후, 하룬은 아들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존재로 거듭났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사냥대회에서의 영웅적인 모습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은 이 아비가 도와줄 구석이 있구나.’

하룬 파레이라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연애니, 고백이니 하는 단어들을 언제 마지막으로 떠올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과 행동이 처음인 아들보다는 조금 더 능숙할 터다.

아이른의 다소 내성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생각을 마친 남작이 자신의 딸을 쳐다봤다.

그러자 키릴 역시 그를 쳐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하룬이 말했다.

“딸.”

“네.”

“잠시 나가 있으렴.”

“아니, 왜?”

“너까지 있으면, 아이른이 얘기하기 힘들지 않느냐.”

“아니, 허, 참. 어이없네? 나는 안 되고, 아빠는 되고? 나도 남의 연애 상담 잘해 줄 자신 있거든요?”

“그렇다고 보기엔, 너도 아직 연애 경험이 없지 않으냐.”

“어, 음…… 그렇죠.”

키릴이 말을 더듬었다.

자신의 애정사를 아버지께 말하는 것은 그녀 역시 부담스러웠다.

아이른이 어린 것과 마찬가지로 키릴 역시 어렸으니까.

말문이 막힌 그녀가 툴툴거리면서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달리는 중이었지만, 요술사인 그녀를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둘만 남은 마차 안에서, 하룬이 미소와 함께 재차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다만 궁금하긴 하구나. 아들이 어떻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됐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

“술이라도 한잔할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이 아니었다. 술기운을 빌릴 생각까진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이후의 아이른은 내내 답답했다.

조급했고, 뜨거웠고, 속에 있는 것을 누구에게라도 꺼내 보이고 싶었다. 다만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만큼 든든하고 믿음직한 존재는 없었다.

이윽고, 아이른의 입에서 일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으음…….”

원래도 그렇지만, 오늘의 아이른은 더욱 말주변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니 계속해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검술을 논했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마에서 땀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낀 것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일리아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흐음, 으음.”

그러한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일리아 린제이에 대한 이미지도 조금씩이지만 잡혀 갔다.

단순히 대륙을 진동케 한 검의 천재를 넘어서, 아이른의 마음을 빼앗은 매력적인 여성으로.

‘괜찮은 아이 같군.’

직접 보고 싶었다. 마주 앉아 짧게라도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물론 아들의 연애사에 참견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버지로서의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하룬 파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우습긴 했다.

오래 사귄 사이도 아니다.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아직 사귀지도 않았다. 아들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뿐이다. 차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아이를 직접 만나 볼 생각을 하다니.

이건 마치…….

‘약혼이라도 한 뒤에, 상견례를 확정한 것 같은 느낌이잖아?’

차분하자. 차분해지자.

하룬 파레이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히려 아들보다 자신이 더 들떠 버렸다. 조금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마침 가문이 거의 가까워졌다.

영지의 성문을 지나고, 가까워지는 영주관을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충분히 상의한 후에, 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이른!”

“……?”

“……?”

하룬에게 있어 낯선 목소리.

허나 아이른과 키릴에게 있어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음성의 주인을 깨달은 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아이른의 이름을 외친 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다.

그리고 강하게 아이른을 껴안았다.

“아이른.”

“어, 어?”

“보고 싶었어. 진짜…….”

“어, 응, 나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태도, 목소리 톤, 말투.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술 냄새.

붉게 물든 일리아 린제이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아아, 늦었나…….”

“늦었어, 브랫.”

한 박자 늦게 모습을 드러낸 브랫 로이드와 루루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