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흐르는 물의 아래 (5)
룬텔의 대마법사, 이프레인 슬릭은 대체로 겁이 없는 성격이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배경도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세상 대부분을 마법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
혹은 지금 당장 모르더라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괜찮다.
즉, 그는 ‘미지의 공포’를 가장 두려워하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여 준 행동은 이프레인 슬릭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색무취에, 마력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은밀한, 심지어 대기에 퍼지면 자신조차 감지할 수 없는 마법이다.
헌데 눈앞의 청년은 이를 맨손으로 잡았다.
수십 가닥의 실타래를 움켜쥔 듯, 상대가 손을 휘두르자 자신의 마법이 나풀나풀 움직였다.
있을 수 없는 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마법사의 상식을 초월한 영역.
이프레인 슬릭의 입에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요술…….”
“흠.”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사실, 그는 지금의 능력을 요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수호 의지.
조금 더 범위를 좁힌다면,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수호 의지.
그는 이를 검술의 형태로 빚어 낼 수 있었다. 바로 이그넷으로부터 배운 영웅의 검, 아니 마음의 검이었다.
‘악마의 파괴 욕구에 저항할 수 있는…… 검사의, 아니 인간의 가장 강한 힘.’
그렇다고 이프레인 슬릭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를 온전히 검술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아이른 역시 판단이 안 섰다.
의지, 마음 따위의 것이 엮여 있는 능력이 대개 그렇다.
어쩌면 ‘마음의 검’은 요술과 검술이 하나로 합쳐진 능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이 이프레인 슬릭의 마법을 움켜쥘 수 있는 이유.
마법에 전혀 생소한 자신이 너무나도 쉽게 상대의 마력을 간파할 수 있었던 이유.
악의.
‘진짜 악마’의 것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음습하고 끔찍한 기운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사르르륵……
아이른의 손에서 황금빛 불꽃이 피어났다.
오러였다. 소드마스터가 검날에 덧씌울 때와 마찬가지의 밀도 높은, 완성된 오러. 맨손으로 발휘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수준이 오른 덕분이기도 했지만, 분노로 인해 더 높은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도 있었다.
물론 이는 온전한 성장이 아니었다.
감정과 본능, 직관에 의한 것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니까. 허나 한 번이라도 경험해 봤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젊은 영웅이 강하게 주먹을 쥐자, 황금의 오러가 가마 내부의 마력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퍼엉!
화르르르르르륵!
“으, 어! 어!”
이프레인 슬릭이 비명을 질렀다.
그조차도 시원하게 나오지 못했다. 공포와 패닉으로 인해 가닥가닥 끊어졌다.
물론 그런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노와 증오.
강렬한 적의로 무장한 대마법사가 손을 들어 캐스팅을 준비했다. 대형 가마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이 이를 도왔다.
허사였다.
순식간에 이프레인의 앞에 나타난 아이른이, 강하게 기세를 발하였다.
화아아아아악-!
“……!”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다.
주먹을 먹이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검을 뽑아 내리치는 대신, 아이른은 묵묵히 기운을 발현할 뿐이었다.
오른손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에서 황금의 오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수천 년을 산 고대의 악마조차 괴로워할 만큼 강렬한 빛이었고.
그 끔찍한 악마의 사후 의지조차 걷어 내는 찬란한 빛이었다.
그리고 선량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따스한 불꽃이었다.
허나 이프레인 슬릭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끄으으윽…….”
마인은 아니다.
그의 드높은 자부심은 마계로부터 들려오는 속삭임을 모조리 차단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악마라 한들 그를 노예로 부릴 수는 없었다.
허나 그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인가?
그 또한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악마가 사라진 이후, 대륙에는 인간이면서도 인간 같지 않은 마음을 품은 이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악마가 활개를 치고 다니던 순간조차도.
……두르칼리 부족에서 타라칸, 카라쿰, 쿠바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아이른이 비로소 힘을 거두었다.
“허억! 헉, 허어…….”
“느껴 봐서 알겠지만, 당신의 수작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
허나 눈빛만큼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이를 정면에서 받고 있는 이프레인은, 황금색으로 물든 그의 시선에 마음이 불로 지져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언가 시도할 마음이 들거든, 오늘의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의 나를 기억하십시오.”
“…….”
“배웅은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른은 슬릭의 대형 가마를 빠져나왔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상대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마음이 말해 주었다.
이프레인은 절대로 헤일 왕국을, 파레이라 가문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길목에 64인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른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신형을 돌렸다.
그런 그들을 한참 지켜보던 그가, 공터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이게 최선일까?’
알 수 없었다.
2년 전.
처음 여행을 나섰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이지 세상은 불확실한 것투성이었다.
정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고, 아쉬운 오답만이 가득 들어차 모두를 괴롭게 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어려웠다.
자기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자신의 가문, 자신의 가족이 엮인 일이기에 그러했다.
부당함에 맞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기에 아이른은 검을 든 이후, 뒤로 물러선 적이 없다.
쿠바르를 위해 카라쿰의 앞에서 검을 들었고.
탐사대를 위해 광대 악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관계도 없는 소중한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걷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소중한 이들을 위해 불의를 참아야만 하는가?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야.’
이프레인 슬릭에 대한 처분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1년 전, 타라칸과 했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는 자신과 맞는 사람,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생각이 맞지 않으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 또한 있다고.
허나 가장 위험한 존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자일지니…….
그러한 이들의 위험성은 악마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거라고.
‘저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아이른의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악마에 버금가는 악인.
허나 진짜 악마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의 머릿속엔 수많은 고민이 넘실댈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아닌 인간을 내가 벌하는 것이 맞는가?’
‘벌할 자격이 있다고 한들, 그 뒷감당을 온전히 할 자신이 있는가? 이프레인을 협박하는 수준에서 멈춘다면 가능하지만…….’
‘지금의 방식은 과연 옳은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지금 나의 행동은 룬텔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타협한 결과라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아이른을 괴롭혔고, 흔들었다.
물처럼 먹먹한 감정이 뭉쳐 중수(重水)를 이뤘고, 청년의 마음을 계속해서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후읍-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었다.
그러자 밑으로 침잠해가던 감정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것은 좋아. 치열하게 숙고하고, 고민해서, 앞으로는 더 좋은 답을 찾아내야 해.’
다만, 지금 내린 선택이 최선인지 아닌지에 얽매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은 안 된다.
그것이 광대 악마로부터 얻은 깨달음이었고, 로이드 가문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비교적 빨리 마음의 평화를 찾은 아이른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검술 수련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
마음이 육체에 영향을 주듯.
육체 역시 마음에 영향을 준다.
검술과 오러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순환을 통해 전반적인 발전을 꾀해야 한다.
그러한 다짐을 이어 가는 아이른의 마음속에, 어느새 새로운 기운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그것은.
물(水)만큼 변화무쌍하고 자연스럽지 않았고.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도 않았다.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강철(金)의 기운보다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火)의 기운보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조용히 깔려 있었다.
허나 그 무엇보다 드넓었고.
그렇기에 안정적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았고, 마음의 물줄기가 널리 뻗어가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오행신공 네 번째 기운.
대지(土).
처음 검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든든하면서도 안정적인 존재가 된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시금 왕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터 파레이라?”
“아, 황혼기사단장님. 찾으셨나요? 어쩐 일이십니까?”
“으음. 그것이…….”
“엇? 아이른 파레이라 경. 으음?”
헐레벌떡 달려온 오스왈도 오도네와 한 박자 늦게 아이른을 발견한 힐 버넷.
둘은 오매불망 찾던 이를 눈앞에 두고도 이렇다할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뭔가 달랐다.
검사로서의 분위기를 말함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20대 초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훌륭한 청년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마치…….
‘사람의 그릇 자체가 커진 느낌이…….’
‘아니, 새삼스럽게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혹시…….’
대마법사와의 결투 때문이려나?
속으로 생각한 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른의 출중한 능력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직접 그런 결투를 본 이상 든든함이 안 생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둘은 하려던 말을 곧바로 꺼내지 못했고, 그 사이 아이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른.”
“오빠!”
“아버지. 키릴.”
아주 밝은 미소로 둘을 바라보는 젊은 영웅.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감정 표현에 솔직해진 모습이었다.
오스왈도 오도네는 몰랐지만, 힐 버넷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크흠. 오늘 큰일도 치렀으니, 가족과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방해하지 않겠네.”
“……그도 그렇군. 이만 가 보겠네.”
“아,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빠르게 사라지는 단장과 부단장을 보며, 아이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급해 보였는데,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더욱 가족이 보고 싶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하룬 파레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이 컸구나.’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른을 바라보며, 파레이라 남작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비단 소드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보다 단단해진 모습으로.
전보다 든든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어색한 웃음을 짓던 그가, 아이른에게 말했다.
“아들.”
“예, 아버지.”
“혹시, 결혼 생각은 없느냐?”
“네?”
아이른 파레이라가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