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흐르는 물의 아래 (4)
“…….”
“…….”
고요.
4왕국의 수많은 이들, 그리고 슬릭 가문의 60명이 넘는 마법사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정적의 이유?
처음에는 분명 ‘긴장감’이었다.
초강대국인 룬텔의 마법사와 시비가 붙었다는 긴장감,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일대일 결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오는 긴장감, 자신들과 큰 연관은 없지만…… 어쩌면 이번 결투로 인해 불똥이 튈지도 모르겠다는 긴장감.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1합.
그야말로 단번에 슬릭 가문의 2인자를 제압해 버린 헤일의 젊은 소드마스터를 보며, 모든 이들은 경악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검사와 마법사의 대결이, 전자 쪽이 더 유리하다지만…….’
‘상대는 대마법사인데? 그에 반해 아이른 파레이라는,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겨우 작년에 벽을 깬 수준…….’
‘원래 소드마스터의 오러가 저렇게 큰가?’
‘끝난 거야? 진짜 끝난 건가?’
각 왕국의 왕족들,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주변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에는 ‘지금의 상황이 정상적인가?’ 하는 질문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쳐다봐 봤자…….’
‘나라고 알겠어? 나도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싸우는 건 처음 봤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도 움직이는 걸 못 봤어. 허허, 엑스퍼트와 마스터의 차이가 이 정도였다니…….’
‘아니, 예전에 봤던 마스터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기사들 역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각국의 최고 실력자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4왕국 내에서일 뿐.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정확히 판가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는…….’
‘소드마스터의 초입 수준이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소문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해!’
“아무래도, 마스터 파레이라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제 수준이 부족하여 잘은 모르지만…….”
“흐음…….”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끝나고, 곳곳에서 자그마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아이른 파레이라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연했다.
패자에다가, 이미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는 이프레인 슬릭보다는 새로이 떠오르는 신성이 더욱 흥미로웠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4왕국이다보니 더욱 그러했다.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왕족들은 묘한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전보다 더욱 진한 눈으로 아이른을 바라봤다.
원래도 그랬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인물이었다.
‘향후 룬텔 왕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일단은 원만한 사이를 유지해야겠어.’
‘린제이 가문, 그리고 로이드 가문과도 친분이 깊다지? 그 친분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이번 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은데…….’
‘그런데, 이거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룬텔과 연이 깊은 비사우를 제외하고, 소난과 쾰른의 인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한들, 룬텔과 악연으로 묶인 존재라면 쳐다도 안 보는 것이 맞다.
동부 최강국이 대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22세에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정도로 놀라운 재능에, 심지어 현재 실력조차 소문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렇다면 린제이 가, 로이드 가와 친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 수준을 넘어 훨씬 더 긴밀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동생 역시 세자르 공국과 연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의 위험부담은 감수하고서라도, 먼저 끈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아 보였다.
‘쾰른 녀석들이 먼저 손을 뻗기 전에…….’
‘소난 놈들이 꼬리치기 전에, 먼저 친해져야 한다!’
소난과 쾰른 국왕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원래는 사냥이 끝나자마자 자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내일, 모레까지 이어지는 연회를 끝까지 즐기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어 심히 유감이오.”
“으음.”
“미안하지만, 우리는 먼저 빠져야 할 것 같소. 양해 부탁드리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비사우의 국왕은 예외였다.
결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곤란한 것은 헤일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카일 머독은 대결이 시작되기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대마법사의 패배가 결정된 이후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색을 보였다.
비사우 측 전부가 그랬다.
결국, 그들은 룬텔의 마법사들과 함께 한발 먼저 연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쓸쓸히 떠나가는 비사우 왕국 사람들을 보며, 헤일의 국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4왕국 간의 연회는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비단 비사우 왕국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난도, 쾰른도, 헤일 자신도 문제였다.
함께 나아가기 위해 뭉쳤던 4국이 어느 새부터인가 상대를 기만하고, 무시하고, 위에 올라서기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했으니…… 어쩌면,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소난, 쾰른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게 다행인가.’
그들의 정확한 생각은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분위기는 괜찮았다.
최악의 경우 헤일만 고립되고 3왕국 모두 룬텔에 붙는 것도 염두에 뒀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렇듯 머리 아픈 고민을 이어 가고 있는데,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헤일의 국왕이 억지로 표정을 관리했다.
알 사람들이야 다 아는 순박한 사람이 자신이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기 무섭게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폐하. 제 독단으로 소란을 일으킨 점, 죄송하고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허나 가문을 무시하고, 나아가 헤일 왕국 전체를 무시하는 듯한 이프레인 슬릭의 발언을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슬릭 가문, 나아가 룬텔 왕국이 제국의 위치를 넘볼 만한 강국이라고는 하나, 헤일 역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저의 자랑스러운 고국이기 때문입니다.”
우우우우우웅-!
예를 갖춘, 허나 당당함을 잃지 않은 젊은 소드마스터의 말.
그리고 뒤를 따라 뻗어 나오는 찬란한 황금빛의 오러 소드.
이에 헤일의 국왕을 비롯한 대부분이 몽롱한 표정을 지을 때.
콱!
바닥에 강하게 검을 박은 아이른이 맹세했다.
“제 검을 걸고, 마음을 걸고, 기사의 명예를 걸고 폐하께 맹세합니다. 오늘 이후, 지금의 결투로 인해 벌어지는 그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폐하께, 고국에 폐를 끼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도록 하겠습니다.”
“…….”
헤일의 국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은, 내용만을 두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기특했으나, 구체적인 계획이 없기에 그저 듣기에만 좋은 말이라 치부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다.
그것도 그냥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진 소드마스터가……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보다도 찬란하고 성스러운 오러 소드를 뽑아내, 자신의 앞에 맹세하고 있다.
소국의 왕인 그로서는 꿈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그야말로 주군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로 감격스러운 순간!
그런 진한 감정 앞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책은 필요 없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소난과 쾰른 왕국 쪽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너희는…… 너희는 없지?’
너희 나라엔 이런 소드마스터, 없지?
아마 있어도 우리 아이른, 아니 마스터 파레이라보다는 후달릴걸?
유치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눈빛을 통해 진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소난과 쾰른 측 역시 국왕의 의도를 정확히 느꼈다.
허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럽고, 부럽고, 또 부럽다.
그것이 그들의 솔직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오빠, 좀 멋있네. 그렇죠, 아빠?”
“…….”
“아빠, 아빠? 대답이 왜 없…… 아빠?”
키릴 파레이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과묵하고 진지한 성격의 하룬 파레이라가, 아이른을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키릴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하룬과 비슷한 눈빛으로, 자신의 자랑스러운 오빠를 바라보았다.
“…….”
물론 모두가 좋은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혼기사단장, 오스왈도 오도네가 그러했다.
예상을 웃도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실력에 감탄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룬텔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정당한 결투였고,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상대 쪽이었는 데다가, 어디 가서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일방적인 패배였으니…… 룬텔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이프레인으로서도 면이 서지 않겠지. 왕국의 입장에서도 황당할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일까?
과연 늙은 마법사가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까?
룬텔에서도 가장 선민의식이 강하다고 알려진 슬릭 가문, 거기서도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니는 이프레인 슬릭인데?
‘……대책을 논의할 필요는 있어 보여.’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어수선한 사냥 대회를 마치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밤이나 되어서야 가능할 터였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의 참여는 필수였다.
허나 모든 것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그는 아이른을 만날 수 없었다.
“잠시 산책을 나가신 모양입니다.”
“으음…….”
하인의 이야기를 들은 오스왈도 오도네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왠지 모를 불편함 속에서,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녀석……!”
헤일 왕성의 밖, 한적한 공터에 자리한 슬릭 가문의 대형 가마.
그 안에서 이프레인 슬릭이 연신 욕설을 중얼거렸다.
머리로는 계속해서 마법 연산을 이어가고, 손으로는 마력을 자신이 원하는 성질로 변환시키면서.
원래라면 이는 지양되어야 할 방식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마법 구현의 과정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끼워 넣다니.
그랬다가 마력의 순도가 나빠진다면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 터이니까.
허나 지금은 괜찮았다.
그가 구현할 마법은 상대의 기분과 정신에 영향을 끼칠 마법으로, 이러한 저주 계열에는 시전자의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들어갈수록 효과가 좋았다.
“후우, 끝났다.”
이윽고 작업을 마친 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완성된 마법은 몹시 은밀했다.
무색에 무취였고, 웬만한 마법사도 느끼기 힘들 정도로 마력의 흐름이 잔잔했다.
게다가 공기 중에 흩어져 밀도가 옅어지자 더욱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
아마 가마 밖으로 나가면 자신조차도 감지가 불가능할 터였다.
그렇다면, 시전자조차 감지해 내지 못할 정도로 흐려진 마법이 무슨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문제 없지.’
이프레인 슬릭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결투가 있기 직전에 만들었던 백색의 결계.
그것은 단순히 안과 밖을 차단하는 용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서 흘러나온 은밀한 마력은 자신의 몇몇 타깃을 휘감았고, 이 역시 고위 마법사들조차 간파하기 힘든 은밀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별 볼 일 없는 마법이 지금의 마법을 끌어들일 것이고, 두 마법이 섞이면…….’
고대의 악마가 인간들을 타락시킬 때 사용했던 비약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제는 대부분의 왕국에서조차 잊힌 단어지만, 옛사람들은 이를 ‘마약(痲藥)’이라고 불렀다.
“쓰레기 같은 놈…….”
천천히 퍼져 나가는 무색무취의 마법을 바라보며, 대마법사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슬릭의 가주나 왕국 차원의 도움 따위, 받을 생각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했다. 녀석의 소중한 사람만 수중에 넣으면 만사 해결이었다.
어디, 아비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콰직
대형 가마의 문이 열리는 소리.
아니, 부서지는 소리가 이프레인 슬릭의 귀로 들어왔다. 적은 소리였으나 모를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 데다가, 오감을 강화하는 마법까지 시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여기 들어올 때까지 눈치를 못 챘다는 것이 더 황당했다.
허나 그러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
아이른 파레이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늙은 마법사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내, 내 마법을…….”
손으로 잡아?”
대마법사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이프레인 슬릭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