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60화 (260/388)

◈ 86. 흐르는 물의 아래 (3)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를 지켜보던 헤일의 왕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결투라니. 룬텔의 대마법사와 결투라니.

승리 가능성을 떠나서, 그 뒷감당을 생각하면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젊은 소드마스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프레인 슬릭의 말을 들어 보면 그쪽에서 먼저 제안을 한 모양이었다.

“끝났어…… 다 끝났어.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야. 룬텔 왕국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폐하, 진정하십시오. 사사로운 결투에 개입할 만큼 룬텔의 엉덩이가 가볍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스왈도 경.”

“예, 폐하.”

“짐이 여기서 울어도, 크게 창피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지 마십시오.”

“힝…….”

울상을 짓는 헤일의 국왕을 보며, 황혼기사단장의 안색 역시 어둡게 물들었다.

그 역시 울고 싶었다.

아무리 이프레인 슬릭의 태도가 무례했다지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길 바라지는 않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 마음으로 며칠만 버티면 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성격이 불같은 키릴 파레이라만 잘 막아선다면 말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을 벌일 줄이야.

“힐.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마스터 파레이라가 왜 저런 돌발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나?”

“으음…….”

단장의 질문을 받은 황혼기사단의 부단장, 힐 버넷이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2년 전의 아이른 파레이라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뭔가…….’

단단하다.

아니, 이 표현은 뭔가 이상하다.

단단하다는 느낌은 예전에도 있었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아보자면…….

‘……든든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유야 몰랐다.

마인 토벌의 연이 있다고는 하나, 힐 버넷 역시 아이른과 친한 사이는 아니다.

게다가 2년 사이에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그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터.

하지만, 일단은…….

“……일단 지켜보죠.”

“으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적어도 마스터 파레이라가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일단은 응원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잠시 밀어두고…… 우리 편이 이기길 바라야겠습니다.”

“우리 편……그렇지. 우리 편이지! 신하가 왕국의 체면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데, 짐이 이렇게 우울하게 있어서는 안 되지!”

부단장의 말을 들은 국왕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이프레인 슬릭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으니, 그렇다면 지는 것보다 이기는 쪽이 훨씬 나았다.

응원해야 한다. 격려해야 한다.

우리 편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있도록, 주군된 자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 의지를 다진 그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헤, 헤일의 자랑! 헤일의 신성! 소드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 경, 힘내시게!”

“…….”

그리 크지 않은, 아니 그 수준을 넘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응원을 전하는 헤일의 국왕.

그러한 모습에 곁에 있던 왕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이는 딱히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

소난 왕국도, 쾰른 왕국도.

전부 젊은 소드마스터가 슬릭의 코를 꺾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감히 응원할 용기는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과 별개로, 결투의 향방에 대한 예측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프레인 슬릭이 이기겠지?”

“그렇지. 일대일에서는 검사가 마법사보다 유리하다지만, 그것도 수준이 비슷할 때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마스터에 오른 지 1년밖에 안 됐으니, 실력이 처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슬릭 가문은 실전보다는 이론에 더 강점을 보이지 않나?”

“으음. 하긴, 또 전투가 아니라 연회에 참석하러 온 상황이니, 마법 보조 장비도 부족할 테고…….”

“마스터 파레이라도 가능성이 없진 않을 거야. 페리 마르티네스 같은 전투 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바보들.’

몇몇 이들의 속삭임을 엿듣고 있던 비사우의 공작, 카일 머독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이해는 했다.

룬텔 3가주 > 전투마법사 페리 마르티네스 > 나머지 대마법사.

이것이 세간이 추측하는 마법사들의 순수 전투력으로, 평범한 대마법사는 소드마스터의 초입을 겨우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허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룬텔의 마법사는 강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악마가 자취를 감춘 150년간, 룬텔의 마법은 그야말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이제 이들도 알게 되겠지.’

후우, 찝찝한 표정을 지은 공작이 답답한 듯 숨을 토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프레인 슬릭을.

허나 감정적으로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응원하는 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결투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 *

“준비됐나?”

“됐습니다.”

“불만은 없나? 간격이라든가, 장소라든가. 검사와 마법사의 처지가 다른 것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터인데…….”

“상관없습니다.”

‘건방진 녀석!’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태도에, 이프레인 슬릭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검사가 마법사보다 일대일 상황에서 유리하다는 점?

스스로에 대한 맹신?

아니면, 마법사에 대한 경험 부재?

‘일단 세 번째는 무조건이겠군.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여기까지 생각한 늙은 마법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해는 됐다.

무려 20대 초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다.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이안 관주도, 신성왕국의 율리우스 휼도 25, 26살에 벽을 깼다. 그러니 코가 하늘을 찔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룬텔 왕가에 직접 인정받은 대마법사라고는 하나, 대륙에 명성이 퍼질 정도의 활약상을 보인 적은 없다.

게다가 마력을 마법으로 빚어내기 위한 촉매제인 마법 도구 역시 챙겨 오지 않았기에, 검사로서는 더욱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이른 파레이라의 승을 예측하는 이들은, 이프레인 슬릭이 아무런 아티팩트도 장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무장한 상태다.’

이프레인 슬릭은 보신주의 성향이 강하다.

대부분의 룬텔 마법사가 그렇듯 의심과 불신에 가득 차 있기에, 헤일 같은 소국을 방문할 때도 만전을 다했다.

대형 가마를 타고 온 것이 그 증거였다.

가마에 새겨져 있는 수십 개의 마법진이, 남몰래 그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

‘이놈, 마법사를 잘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만으로도 질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데, 심지어 상황이 계속해서 유리해졌다.

결투가 시작된 지 한참 됐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여전히 자기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요술대검을 치켜든 채, 단단한 자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

아마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니, 방어 위주로 국면을 풀어 갈 생각인 모양인데…….

‘마법사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똑똑히 알려 줘야겠군.’

비릿한 웃음을 지은 이프레인 슬릭이 은밀히 마력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웅-

대형 가마에 새겨진 마법진에 마력이 집중되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프레인의 의도대로, 계산대로 변화하여 온전한 마법의 성질을 갖추었다.

그러한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수십 개의 마법.

번개나 불과 같은 원소 마법도 아니었고, 막대한 질량을 동원한 물리 마법도 아니었다.

정신 계통 마법.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그야말로 상대의 전의 자체를 상실케 만드는 힘이 꼬이고 꼬여 굵은 밧줄을 이루었고, 빠르게 아이른을 향해 날아들었다.

관전하는 입장에서는 별다른 재미가 없는, 그러나 마법을 시전하는 입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상황!

이프레인 슬릭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슬며시 자라난 웃음이 어느새 넓게 번져 표정을 가득 채웠다.

변해 가는 눈매와 입가, 안면의 주름이 그의 인상을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퍼어어엉-!

“응?”

생각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슬릭의 대마법사는 웃는 표정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터엉!

크게 발을 굴러 짓쳐드는 마법을 터뜨려 버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걸음을 옮긴다. 순식간에 쏘아지는 신형이 늙은 마법사와의 거리를 무로 만든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 이프레인 슬릭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허나 그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것은 머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파훼한 거지?’

애석하게도, 상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아이른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프레인 슬릭이 더욱 그러했다. 정말로 많은 부분을 놓쳤지만, 가장 큰 부분을 꼽자면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아이른 파레이라의 실력은 소드마스터의 초입 수준이 아니라는 점.

그가 마지막으로 실력을 공개한 것은 1년도 더 전인 증명의 땅에서의 챔피언 결정전으로, 지금의 그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키웠다.

두 번째.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이른의 정신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점.

당연했다. 전생과 현생의 의지가 합쳐져 불꽃의 대검을 든 순간, 그의 마음은 고대 악마의 저주조차 튕겨 낼 정도로 강인해졌다.

제아무리 대마법사의 정신 공격이라 한들,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를 합친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게 마지막 세 번째 요소였으니.

우우우우우웅-!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수록 유리한 건, 비단 마법사만이 아니라는 점.

그것이 승패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대륙 3대 검사인 쿤의 인정을 받았을 때보다도.

전대 적기사단장인 퀸시 마이어스의 감탄을 자아냈을 때보다도.

대 영웅의 후손인 조슈아 린제이의 최후 절기를 끌어냈을 때보다도 강하고 빨랐다.

찬란한 황금의 빛이 잔뜩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

“…….”

“…….”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내적으로 격렬한 응원을 보내던 헤일의 국왕도, 그를 보좌하던 황혼기사단도.

소난 왕국, 쾰른 왕국, 비사우 왕국도.

심지어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64인의 마법사들마저도, 경악한 표정으로 결투의 결과를 확인했다.

일검(一劍).

단 한 번의 쇄도로 슬릭 가문의 2인자를 기절시킨 헤일 왕국의, 파레이라 가문의 소드마스터.

그가 추레한 모습의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룬텔 행은 거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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