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흐르는 물의 아래 (2)
“히끅.”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대화를 지켜보던 헤일의 국왕이 딸꾹질을 했다.
다행히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관심은 자신이 아닌 둘에게 가 있었으니까.
그가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부드러운 아내의 손길이 등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저렇게 딱딱한 말투로 거절해도 되는 건가?’
따지고 보면, 먼저 무례한 모습을 보인 건 이프레인 슬릭이다.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고 해도 안하무인의 행동으로 분위기를 헤쳤고, 무엇보다 왕이 있는 자리에서 지금처럼 대놓고 영입 제안을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헤일의 국왕은 그것보다도 아이른의 대처를 더욱 걱정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췄고, 빛나는 재능을 가졌고, 훌륭한 인맥을 쌓았다 한들, 이프레인에 비할 수는 없다.
그의 뒤에는 슬릭의 가주가, 더 나아가 초강대국 룬텔의 가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어야 하는데…….’
국왕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그러지는 못했다. 말을 타고 있는 상태였기에 발을 꼼지락거리는 정도에 그쳤다.
그의 불안감이 근처에 있는 황혼기사단의 장과 부단장에게까지 전해졌다.
허나 그들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마법사고 뭐고, 달려가서 단박에 멱살을 잡고 싶지만…….
‘결국,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
자기들 수준에서 나서 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는 냉혹한 현실에, 둘은 이를 악물고 아이른을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아이른을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때, 이프레인 슬릭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지이이이잉-!
순식간에 펼쳐지는 백색의 결계.
4왕국의 인사들이 당황했다.
공격 마법은 아니었지만, 대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이 안 보여.’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소난 왕국도, 쾰른 왕국도.
심지어 마스터와 대마법사를 모셔온 헤일과 비사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할 때.
지금껏 인형처럼 서 있던 64인의 마법사들 중 하나가 대표로 나서 말했다.
“스승님께서 조용한 대화를 원하시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양해가 어렵다면, 사냥을 이어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
그 누구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분위기.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 키릴 파레이라가 그러했다.
하지만.
스윽
“…….”
64인의 마법사가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제아무리 대단한 그녀라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키릴, 일단은 지켜보자꾸나.”
“…….”
세자르의 유망주가 화를 억눌렀다.
만만치 않은 마법 부대의 압박도, 아버지의 부탁도 이유였지만…….
‘고대의 악마까지 때려잡은 오빠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아이른을 향한 강한 믿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흥.”
고개를 끄덕인 키릴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대표로 나선 중년의 마법사와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나머지 마법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스르르륵……
그런 그녀의 시야 밑으로, 백색의 결계에서 은밀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뭐죠?”
“비밀스러운 대화가 하고 싶어서.”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나는 아직 다 못 했네.”
“당신과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내 태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는걸?”
“다른 이들에게…….”
“그들과 자네는 다르지. 나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 예의를 차리는 편일세.”
“…….”
“어찌 보면 자네와 비슷하지. 자네도 나라는 인간을 자네 나름대로 평가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남들에게보다 차가운 모습을 보이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야. 나는 나의 기준으로 여기 모인 이들을 평가했고, 그에 따른 대우를 해 준 것뿐. 만약 나의 이러한 태도가 불만이었다면…… 앞으로 나서서 따졌어야지.”
히죽 웃어 보인 늙은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지. 용기가 없어서. 혹은 능력이 없어서.”
“…….”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말했지 않나. 자네가 룬텔로 왔으면 한다고.”
“그 얘기는 이미…….”
“세상은 슬릭 가문의 마법사를 오만하다고 말하지.”
“…….”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우리의 능력에 걸맞은 이들과 어울리고, 지식을 교류하고, 관계를 쌓아 나가며 발전하고 싶을 뿐. 그 위대한 역사에서 배제된 몇몇 이들이 우리를 착각하고, 헐뜯고, 모욕한다고 한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네. 그렇다고 딱히 위해를 가하지도 않아. 그냥 그렇게 짖으라고 둘 뿐이야.”
아이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에 오기 전에 했던 생각이 맞았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자신은 굉장히 좋은 사람만을 만나고 사귀어 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를 앞에 두니 여실히 느껴졌다.
‘답답하네.’
허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으면 더 답답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그가 한 번 더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프레인 슬릭에게 물었다.
“위대한 슬릭의 마법사께서 날 데려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룬텔에 마법사만 있는 건 아니야. 상대적으로 부족하긴 하지만, 검사 전력도 강하지. 마스터도 셋이나 있네.”
“그럼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하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건 마스터 정도가 아니야. 그 이상이다.”
“그 이상이라면…….”
“룬텔, 슬릭, 코르코란에 비견되는 위대한 검술 가문의 탄생. 서부의 5대 명가보다도 뛰어난…… 역사의 시작.”
“…….”
“나는, 자네가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재라고 생각하네.”
진심이었다.
이프레인 슬릭은, 이 순한 인상의 청년이 정말로 그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거대한 잠재력에 어울리는 최고의 환경.
바로 초강대국 룬텔의 지원이, 그가 생각하고 있는 협상 카드였다.
“여태껏 수많은 천재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들 모두가 위대한 가문을 일구지는 못했지. 허나,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야. 그들이 몸담고 있던 환경이,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인간 군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야. 룬텔은 그렇지 않아.”
이프레인 슬릭의 얼굴에 진한 자부심이 피어났다.
검술과 전혀 연관이 없는 마법사의 나라?
우매한 이들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방대한 자료와 철저한 분석, 집요한 실험을 통해 쌓아 올린 지식은 비단 마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 검술, 오러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추상적인 깨달음에 집중하는 서부의 검술관보다, 룬텔의 방식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요술과 신성력. 두 분야를 제외하면…… 룬텔의 마법사가 정복하지 못할 분야는 없다.’
희망이 아니었다.
목표도 아니었다.
엄연한 사실이었다. 엷은 미소를 지은 이프레인 슬릭이 재차 말했다.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네. 인연을 끊어 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고.”
“…….”
“하지만 현명하게 결정해야 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고. 자네의 곁에 있는 이가 누군가에 따라, 자네를 지원하는 배경이 어떤 곳인지에 따라서 자네 인생이, 자네 검술이 달라질 거야. 의심스럽다면 찬찬히 살펴본 뒤에 결정해도 좋아. 실망하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 자네는 무조건 룬텔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이프레인 슬릭의 설득이 이어졌다.
자신만만하게, 적극적인 눈빛으로. 나른하게만 보였던 직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물론 조급하지는 않았다.
아마 곧바로 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우물 안에 있던 이는, 세상 밖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는 법이니까.
이 청년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기다려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지. 그 평민 녀석과는 다르게.’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
이그넷, 아니 이제는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된 녀석을 떠올린 그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당시에는 그녀를 아빌리우스에 빼앗겼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그넷과 달리 순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고, 혈통 역시 상대적으로 나았다.
룬텔의 역사에 누가 되지 않으면서도 다루기는 훨씬 편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늙은 마법사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설득할 것이다.
생각이 바뀔 때까지, 그럴 수밖에 없을 때까지 다양한 시도를 이어 갈 것이다.
이프레인 슬릭은 자신이 있었다.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얻어 내리란 단단한 믿음이.
그런 기분 좋은 느낌에 균열이 인 것은.
젊은 소드마스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뭘 보는 거지?’
상대의 시선을 좇아간 대마법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안팎을 완전히 분리한 백색의 결계.
그 너머를 보는 듯한 아이른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마법사도 아닌데.’
마법사라고 해도 무리였다.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신이 캐스팅한 마법이다. 이를 뚫고 바닥을 흐르는 마력을 파악한다고?
그건 불가능하다. 아마 라바트의 페리 마르티네스도 쉽지 않을 터.
이프레인은 노파심을 지우기 위해 표정을 관리했고, 그런 그를 향해 아이른의 시선이 다시 꽂혔다.
잠시 후, 젊은 소드마스터의 입이 열렸다.
“사과하십시오.”
“……뭘?”
이프레인 슬릭이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내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사과를 하라고?
아니, 그 전에 태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도 느꼈지만, 자신이 조사한 것과 성격이 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른의 목소리가 재차 흘러나왔다.
“헤일의 국왕께 사과하고, 헤일을 지탱하는 기사단에 사과하고, 나의 아버지께 사과하십시오.”
“…….”
“설마 모른 척하진 않겠죠? 내가 몸담은 환경, 내가 몸담은 나라, 내가 몸담은 가문…… 그리고 누구보다 든든하게, 누구보다 따스하게 나를 품어 줬던 부모님을 욕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대마법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한들,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 한들 아직 애송이일 뿐이다.
10년, 20년 후라면 모를까, 20대 초반의 마스터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도 참고 넘어갈 이프레인 슬릭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고 넘어갈 생각은 아이른 역시 없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어린 시절 가문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더니, 룬텔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모르는 건가? 아니, 그 전에. 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
솔직히,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일리아, 주디스…… 주디스는 본지 꽤 됐네. 수련은 잘되고 있으려나.’
너무나도 소중한.
그러나 불같은 성격을 지녀, 수없이 주변인들을 도발하고 다니는 붉은 머리의 친구.
그녀가 했던 도발적인 대사를 떠올린 그가 이렇게 말했다.
“쫄?”
“……이 미친 검사 나부랭이 자식이.”
쩌적, 쩌저적……
퍼어어엉-!
산산이 부서지는 백색의 결계.
다시금 좌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슬릭의 2인자가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이마, 결투.”
툭
그 말을 들은 헤일의 국왕이, 들고 있던 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