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흐르는 물의 아래 (1)
마법 왕국 룬텔은 강대국이다.
그것도 그냥 강대국이 아니라, 대륙 최강인 신성왕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다.
막강한 성기사와 사제 전력, 신앙심으로 영향력을 넓혀 간 아빌리우스.
강력한 고위 마법사와, 그리고 마도구 판매 수익으로 국력을 키워 간 룬텔.
이 두 왕국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할 것이다.
“룬텔의 고위 마법사들은 폐쇄적이기로 유명하죠. 왕국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잘 없습니다.”
황혼기사단장, 오스왈도 오도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룬텔의 강력한 힘은 마법사에서 나오고, 마법사의 힘은 오랜 시간 집약된 지식, 기록으로부터 나온다.
룬텔 왕가를 포함한 3가문이 몇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명한 것은 그러한 이유다.
그들의 역사를 다른 가문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페리 마르티네스’라는 천재 전투 마법사가 등장하긴 했지만…….
‘룬텔의 마법사들이 그를 인정할까? 그럴 리가 없지.’
몇몇 룬텔 출신 마법사들의 오만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오스왈도 오도네가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 특히…… 헤일과 같은 소국의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룬텔의 마법사입니다. 게다가 슬릭은 개중 가장 혈통, 출신에 민감하다고 들었습니다.”
“신성왕국하고는 완전 딴판이네요.”
“그렇네. 모든 조건을 불문하고 신앙심만을 보는 아빌리우스와 다르게…… 몹시 폐쇄적이지. 아마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대화를 주도하던 황혼기사단장이 지그시 한 사람을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자, 아이른 파레이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이유일 것 같았다.
“오빠랑 나 때문인가?”
“……아, 그렇지. 파레이라 양 때문이기도 하지.”
단장이 키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 박자 늦게 반응하긴 했으나,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폐쇄적이고, 자부심 가득하고, 권위적인 룬텔.
거기서도 가장 고압적인 분위기라 알려진 슬릭 가문.
‘게다가 64명이나 동원되는 가마를 타고 왔을 정도라면…… 어쩌면 비사우 왕의 부마인 이프레인 슬릭이 직접 왔을지도 모른다. 난감하군…….’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마법사가, 콧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만한 소국들의 잔치에 참여했다.
최근 두각을 드러내는 유망주들인 파레이라 남매와 만나기 위해서.
그 의도가 무엇일까?
적대적일까?
호의적일까?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바람은, 그저 별 탈 없이…… 무사히 연회를 치르는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릴, 이 아비가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아! 진짜! 내가 무슨 10살짜리 어린애인 줄 알아요?”
“……아직 별다른 말도 안 했는…….”
“괜히 시비 붙지 마라, 성질 좀 죽여라. 이런 잔소리 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큼흠.”
파레이라 남작이 헛기침을 하며 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키릴이 신경질 난다는 듯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허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진 않았다.
한숨 한 번으로 감정을 털어 버린 그녀가 툴툴대며 말했다.
“조용히 있을 거예요. 아니면, 그냥 아프다고 하고 방에서 쉴까 봐.”
“으음, 그렇게까지는…….”
“뭐, 정 걱정되시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거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키릴은 정말로 꾀병이라도 부릴 마음이 있었다.
불같은 자기 성질을 못 다스릴까 두려운 것도 있지만, 그냥 슬릭 가문의 마법사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게 더 컸다.
‘……인상이 최악이었지.’
그녀가 세자르 공국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슬릭 가문의 고위 마법사였던 늙은이 두 명이 보였던 태도, 분위기, 눈빛.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호의도, 적의도 없는 시선으로. 주변인들을 공허하게 대하던 그들의 모습은…….
“어쨌든, 문제 안 만들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하하, 걱정이라니!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 일절 없었소이다!”
단장이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조금 걱정하긴 했었는데, 저렇게 말하니 한시름 놨다. 껄껄 웃은 그가 아이른 쪽을 살폈다.
‘마스터 파레이라는 걱정 없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강한 신뢰, 느껴지는 든든함.
그의 얼굴에 계속해서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오스왈도 경, 별일 없겠지? 응? 별일 없겠지?”
“……예. 별일 없을 겁니다.”
“후우, 후우. 그렇지? 짐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을 어찌하면 좋을까? 응? 어떻게 해야 할까?”
‘파레이라 쪽이 문제가 아니라, 국왕께서 가장 문제였구만.’
끊임없이 불안을 쏟아내는 헤일의 국왕을 보며, 오스왈도 오도네가 몰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원래도 소심한 성격의 왕이다.
부단장인 힐 버넷이 걱정할 일 없다고 수십 번을 말해 줬는데도 못 믿어서 자신을 몰래 파레이라 가문에 보냈던 그였으니,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람을 모아 온 타 왕국의 행태에 압박을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헤일 왕국 역시 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친다.
유망한 요술사 키릴 파레이라.
소드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
둘을 보라는 단장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하악,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라니! 우리 같은 소국에 소드마스터, 그것도 젊은 소드마스터…… 히익!”
허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회 전의 사냥대회를 위해 모인 4왕국의 인사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슬릭 가문의 대형 가마를 본 순간, 헤일의 국왕은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의 손을 곁에 있던 왕비가 꼭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응, 그렇겠지? 후우, 괜찮겠지?”
“당연히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무탈하게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자, 힘차게 사냥의 시작을 알리시지요.”
“그, 그래.”
뿌우우우-
‘……직접 부실 필요는 없었는데.’
나팔수에게 명령하는 대신, 직접 뿔피리를 불어 재끼는 국왕을 보며 단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런 왕의 긴장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다른 왕국의 인사들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점이랄까.
몰이꾼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다시금 슬릭의 가마를 눈에 담았다.
궁궐이 움직이는 듯 거대한 규모도 놀랍지만, 밑에 깔린 64명이 전원 마법사라는 점이 더 놀라웠다.
“……이랴!”
황혼기사단장이 말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을 끄려는 의도였다.
기왕 조용히 있을 거라면, 부디 끝까지 그렇게 있어 주기를. 지금처럼 아예 밖으로 안 나와 주면 더 좋고. 그가 조용히 생각했다.
아니,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비사우를 포함한 다른 왕국의 인사들 역시, 단장과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사냥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으음.”
“…….”
내내 닫혀 있던 가마의 창문이 열리고, 담담한 모습으로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이프레인 슬릭.
모두가 긴장했다.
지금껏 조용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조용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룬텔의 권력자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까, 악의를 보일까 두려워 시야의 사각으로 움직일 정도였다.
허나 이프레인 슬릭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른하게 하품을 한 그가 잠시간 가을바람을 느끼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마를 지탱하고 있던 64명 중 둘이 안으로 들어섰고, 문이 닫혔다. 모두 여자였다.
잠시 후, 남녀 간의 성애 중에나 들을 법한 낯 뜨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
“…….”
과거, 노예 제도가 존재하던 시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공통으로 발견되는 내용이 있다.
너른 들판에 세워진 중앙 저택에서 귀족들이 종종 성행위를 했다는 부분이다.
시선을 즐기거나 하는 변태적인 의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노예를 인간이 아닌 개나, 소, 말 같은 짐승으로 취급했기에…… 열린 창문으로 모습이 보이든, 소리가 저택 밖으로 새어 나가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이프레인 슬릭이 그러했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몇몇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흠.”
“큼, 흠.”
악의보다도, 조롱보다도 더욱 쓰리게 다가오는 무시에 누군가는 헛기침을 터뜨렸다.
그의 눈길이 자신들에 닿지 않음에 마냥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누구도 상대의 태도를 지적하며 나서지는 못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냥대회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폐하, 몰이꾼들이 짐승을 몰아오는 중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오오, 그런가…… 으음! 꽤 덩치가 있는 멧돼지로군! 좋아, 내 솜씨를 제대로 보여 주겠네!”
말이 대회일 뿐, 지금의 자리는 4왕국이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경쟁의 요소는 거의 없었고, 정해진 차례대로 목표 대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는 규칙이 암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애 이후 내내 조용했던 대형 가마가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윽고 열린 문에서 이프레인 슬릭이 활을 든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슈욱, 쏘아진 화살이 힘차게 날아갔다.
퍼억-!
마법의 영향인지, 원래 힘이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이것들은 확실했다.
이프레인 슬릭이 쏜 화살이 다가오던 멧돼지에 명중했다는 것과.
그가 연회의 주인인 헤일 국왕의 차례를 무시한 채, 아니 의식조차 하지 않고 새치기를 했다는 것.
장내의 분위기가 또다시 싸늘해졌다.
“…….”
“…….”
“…….”
깊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 몇몇 이들이 헤일의 국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
평소라면 경쟁국의 왕이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고소함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소난 왕국도.
쾰른 왕국도.
심지어 슬릭 가문의 지원을 받은 비사우 왕국의 인사들조차도 헤일의 왕에 묘한 동정심, 아니 동질감을 품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었다.
누구도 룬텔의 대마법사를 향해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대마법사님. 죄송하지만, 차례를 지키는 것이 매너입니다.”
한 사람, 아이른 파레이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
황혼기사단장이 깜짝 놀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그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마스터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허나 그보다 더욱 많은 시선이 쏠린 건 룬텔의 권력자, 이프레인 슬릭 쪽이었다.
“…….”
“…….”
대마법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도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림 속의 인물인 듯, 미동도 없이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둘.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의를 받았던 이프레인 슬릭이었다.
“자네, 룬텔로 올 생각은 없나?”
뜬금없는 제안에 좌중이 놀라기도 전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