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그가 없는 사이 (3)
“…….”
올해 초에 파레이라의 경비병이 된 새내기 조반은, 최근 들어 벌어지는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기는 했다.
파레이라가 소국의 남작 영지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말이다.
‘키릴 파레이라 아가씨는 세자르 공국에서 인정받는 유망한 요술사고, 아이른 파레이라 도련님은…… 20대 초반인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지?’
하지만 딱히 그 부분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양반들이어도 직접 봐야 아는 거지, 영지에는 있지도 않고 저 멀리서 소문만 들려오다 보니 자부심을 느낄 새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마침내 도련님이 영지에 복귀하고, 특별 검술 강의에서 자신의 경지를 온전히 보여 준 이후.
경비병 조반은 뒤늦게 몰려오는 격한 감동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지금?”
“대련이라고?”
“린제이 영애의 검술을 직접 볼 수 있는 거야?”
“허어, 살다 살다 이런 구경을 다 할 줄이야!”
지금 벌어진 일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자기 주변에 쏟아지는 기사들과 선임병들의 말을 들으며, 조반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를 만들어 줬다.
파레이라 소영주가 ‘진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보름 전의 일도 놀라웠지만.
파레이라 소영주의 ‘진짜 인맥’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지금의 일 역시 놀라웠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사상 가장 빨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천재 검사, 일리아 린제이!
그녀의 명성에는 모자라지만,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헤일의 왕보다도 높은 거베라의 천재, 브랫 로이드!
그런 거물들이 영지를 찾아올 정도로, 도련님의 인맥이 어마어마하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우우우우웅-!
“…….”
“어…….”
“……오러가?”
로이드 소영주의 검에서 불쑥 솟아난 푸른색의 기운.
엑스퍼트 최상위의 검사가 무리해서 뽑아낸 오러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완성된, 안정적인 오러 소드였다.
마르쿠스와 조반을 포함한 모든 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고, 브랫은 여전히 태연했다.
멋들어지게 자세를 취한 그가 일리아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힘 좀 써 볼까?”
“……언제부터?”
“몇 달 안 됐어. 어때? 조금 더 제대로 해 볼 마음이 생겼나?”
“……그래.”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오러 소드를 뽑아낸 것을 후회하던 그녀였다.
아무리 당황스러웠고, 아무리 얄미웠다고 한들 엑스퍼트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다.
오러 소드를 두른 채로 대련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허나 상대 역시 소드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러 소드를 사용해도 실례가 아니고, 조금 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도 괜찮다.
‘그래. 더 제대로, 조금 더 세게 해도…… 문제없어.’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러움은 가셨지만, 그녀는 여전히 브랫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과 차가운 분위기,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시린 은색의 검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좌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브랫은 이번에도 태연했다.
“내가 먼저 갈까?”
“좋아.”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흥분했다.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꼭 넘어서고 싶은 존재.
예비 수련생 시절을 떠올린 푸른 머리의 검사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콰직
퍼어엉-!
연무장의 바닥이 부서졌다.
강한 반작용에 걸맞는 빠른 속도로 브랫의 몸이 튀어 나갔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검이 휘둘러졌다.
중단 베기였다. 어느새 내려온 일리아의 검이 이를 여유롭게 막아 냈다.
터엉-!
탓-
타다닷!
한 발짝 물러난 일리아와, 멀찌감치 세 걸음 물러난 브랫.
열세를 인정하고 정비할 여유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린제이 영애의 검에서 바람이 일었다.
“……!”
“……!”
애석하게도, 연무장에 모인 이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서부 대륙도 아니고, 강대국도 아니고, 소국의 남작 영지에 고용된 이들이 훌륭한 실력을 갖췄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아단의 천재가 펼쳐 낸 검술이 무엇인지를, 그녀가 일으킨 바람이 무엇인지를.
하늘검(天劍)!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검술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든 이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퍼엉!
펑!
퍼버벙! 펑!
“크윽, 끄윽…….”
태풍처럼 거칠게, 강력하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검격!
그 속에서 브랫이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강하게 어금니를 깨물어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분노한 그가 회심의 일격을 쏟아냈다.
부우우웅-!
휙-
하지만 허사였다.
상대는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물러난 뒤, 다시금 질풍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폭풍과도 같은 연격을 쏟아냈다. 쏟아냈다. 쏟아냈다.
미칠 듯한 압박 속에서 브랫이 신음 대신 웃음을 흘렸다.
“흐, 흐흐흐.”
콰아아앙!
“크흑! 끅, 흐하!”
아팠다. 검을 받아 낼 때마다 시큰거리는 손아귀도 그랬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엄청난 격차가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버틸 만했다.
브랫 로이드가 14살에 얻은 것은 재능도, 잠재력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도도하게 자신의 길을 향해 흘러갈 수 있는 마음이었다.
잔바람이든, 태풍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굳게 다짐한 브랫이, 몸속의 잠력을 단번에 폭발시켜 검을 휘둘렀다.
퍼엉-!
펑, 펑, 펑, 퍼엉!
“……!”
체내에 구축해 뒀던 둑이 터진다. 하나, 둘, 셋,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킨다.
그에 따라 거대해진 물결이, 파도가, 해일이 무지막지한 위력을 품고 날아들었다.
일리아가 대련 후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콰아아아아아앙!
회피하지 않았다.
도망치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일리아는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이겨냈다.
폭풍에 휩쓸린 파도는 산산이 부서져 잔물결이 되었고, 파도의 주인 역시 흩날리는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
저 멀리 날아가 의식을 잃은 자신의 친구, 브랫 로이드.
그를 지켜보던 일리아 린제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르쿠스에게 전달했다.
“이, 이건?”
“포션이에요. 가문의 비전이니, 꽤 효과가 좋을 겁니다. 브랫을 간호하며 사용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거기 둘! 날 따라와라!”
“예, 옙…….”
벌떡!
그때, 연무장에 널브러져 있던 푸른 머리의 검사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다가가던 마르쿠스와 병사들이 히익 하며 뒤로 물러났고, 다른 이들도 깜짝 놀랐다.
로이드 소영주의 눈빛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시선이 엄한 이들에게 쏟아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패퇴시킨 존재, 일리아를 찾아낸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른이 지금 없다고 들었는데…….”
“…….”
“올 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 거지?”
“……그게 왜 궁금한데?”
“이상한 질문인가? 아니잖아. 친구가 친구 만나러 오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나도 친구 만나러 온 거고.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만나면 좋으니까,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묵을 예정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 왜 그러지 친구? 왜 그렇게 고리눈을 뜨고 날 노려보…….”
“닥쳐.”
“그래.”
풀썩
그 말을 끝으로 쓰러진 브랫 로이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정말로 의식을 잃어버린 그를 마르쿠스와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회복실로 옮겼다.
“……루루.”
“……응, 일리아.”
“아이른, 언제 와?”
“어…… 나도 잘 모르는데.”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 린제이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 * *
일리아 린제이와 브랫 로이드가 파레이라 영지에 도착하기 며칠 전.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왕국의 수도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정은 그리 바쁘게 이어지지 않았다.
연회까지 일정이 촉박하지 않기도 했고, 파레이라의 가족이 이를 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이 그들 인생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빠! 여기 마을에서 뭐 하는 거 같은데, 구경 좀 하고 갈까요?”
“어허. 왕께서 내린 명령을 받들러 가는데 어찌…….”
“괜찮습니다. 여유가 꽤 있으니, 이것저것 즐기면서 가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람캄 마을의 축제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규모에 비해 알차고 재미있다고 하니, 저도 흥미가 동하는군요.”
“가시죠? 아버지.”
“흐흠, 그럼…… 그럴까?”
점잖고, 정중하고, 그렇기에 다소 무뚝뚝한 면이 있는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다.
허나 아들, 딸과 함께하는 지금을, 마치 영지 밖 나들이와도 같은 이 순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로서 20년 만에 느끼는 진한 행복감, 그리고 뿌듯함.
주책맞게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영지에 있을 아내 생각이 나자 더욱 그랬다.
‘다음에는 아멜리아와 같이, 꼭…….’
약간의 아쉬움을 삼킨 그가 자상한 얼굴로 자녀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더욱 밝은 웃음으로 화답해주는 아이른, 그리고 키릴.
그런 셋을 바라보는 황혼기사단장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자리했다.
“아버지, 가볍게 술이라도…….”
가족 간의 교류는 낮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른은 일정이 끝난 밤마다 무언가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고, 키릴 역시 슬그머니 자리에 끼어들었다.
눈치 빠른 오스왈도 오도네는 슬며시 빠져 주었다.
대충 알고 있었다. 정말로 좋아 보이는 저 가족이 이러한 행복을 찾은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자리에 외부인이 끼어들 수는 없지. 나는 나대로 병사들하고 한잔할까.’
그 때문에 병사들은 매일 밤을 긴장하며 보내야 했지만, 이는 사소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
가족끼리 노숙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키릴의 어린애 같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결과, 일행은 적당한 평원에서 야영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마을이나 도시만큼 편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었기에 모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행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아이른 파레이라는, 코앞까지 다가온 연회를 생각하며 다소 찜찜한 상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최근 내 주변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사람들만 있었어.’
정말로 그랬다.
어느새 연심을 품은 일리아 린제이도 그렇고,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도 그렇고.
이제는 본 지 1년이 다 돼가는 쿠바르도 정말 좋은 이들이었다. 루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안, 퀸시 마이어스, 조슈아 린제이, 쿤, 이그넷, 카라쿰, 타라칸…….
그 밖에도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을 이끌어 줬고, 배려해 줬고, 가르침을 주었다.
이렇듯 훌륭하고 좋은 이들이 많았기에, 그렇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회에서 만날 이들은, 그들과는 많이 다르겠지.’
아이른이 남부 6가문, 그중에서도 가이른 자작가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아마 4왕국의 인사들도 그들과 비슷한 느낌일 터였다.
어쩔 수 없었다.
견제와 시기, 비교와 정치가 판치는 장소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편안함을 느끼려는 건 욕심에 가까웠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은근슬쩍 다가온 단장이 이러한 고민에 대한 위로를 건넨 덕분이었다.
“걱정이 있으신가?”
“아…… 음, 네.”
“말해 보시게. 내 비록 마스터 파레이라에 비해 검술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쌓아 온 세월이란 게 있으니 말이야.”
“그럴까요?”
아이른은 예전의 아이른이 아니었다.
비단 검술 실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짐을 홀로 감당하지 않을 용기가,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을 용기가 있었다.
오스왈도 오도네의 물음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초가을 밤을 배경으로 잔잔히 퍼졌다.
잠시 후, 웃음과 함께 단장의 말이 흘러나왔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면, 자네의 능력과 인맥만으로도…… 타 왕국 인사들은 자네에게 예를 갖출 수밖에 없을 거야.”
“아…….”
“물론 그것만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세. 중요한 건 자네가 정말 곧고, 올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는 점이지.”
황혼기사단장이 빙긋 미소지었다.
진심이었다.
파레이라 영지에서 머문 며칠간, 그리고 수도까지 오는 며칠간 여실히 느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단순히 검의 재능만이 넘치는 이가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 철학을 쌓아 가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인물이었다.
‘첫 만남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외적인 위치. 그리고 알면 알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내면.’
이 두 개를 함께 가진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누가 감히 무례를 범하겠는가?
“맞지. 우리 오빠 정도면, 그 정도 대접받는 건 당연하지!”
키릴이 발랄하게 동의했고, 파레이라 남작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에 끼진 않았지만, 나머지 일행도 속으로 동의했다. 그들이 본 아이른 역시 흠잡을 곳이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른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반박하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민망했다. 물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조금 피곤하네요. 먼저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마스터에 오른 검사가 벌써 피곤할 리 없었지만, 굳이 그런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렇듯 평온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일행은 잠자리에 들었고, 개운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왕성을 향해 나아갔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엿보였다.
하지만.
“……저자는.”
저 앞에서 수도의 성문을 통과하는 거대한 마차.
아니.
64명의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가마를 확인한 황혼기사단장이, 표정을 굳혔다.
마법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하지만 그렇기에 그 어떤 것보다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이동수단.
거기에 그려진 슬릭 가문의 문양을 본 순간, 오스왈도 오도네의 얼굴에 걱정이 스칠 수밖에 없었다.
‘룬텔 왕국……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