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그가 없는 사이 (2)
“그럼, 다녀오겠소.”
“다녀오겠습니다.”
“선물 사 올게요! 루루도 잘 다녀와!”
“무사히 다녀와요, 여보. 아이른하고 키릴도.”
“응! 그리핀 조심히 탈게!”
“당연하지. 우리 앵두 험하게 다루면 혼난다?”
“그리핀 이름이 앵두였구나…….”
검술 특별 강의가 있고서 일주일 뒤.
파레이라 남작과 아이른, 키릴 남매는 헤일 왕국 수도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그 밖의 일행은 많지 않았다.
왕의 부탁을 전달받은 황혼기사단장과 가문의 기사 둘, 그리고 잡일을 담당할 병사 넷이 전부였다.
시골 영주가 수도로 향할 때면 체면을 위해서라도 많은 인원을 대동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지금의 단출한 구성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드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 그 찬란한 칭호만으로도 왕국에서 견줄 자가 없는 존재라 할 수 있으니…… 굳이 그런 쪽에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사실 대단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키릴 파레이라 역시 헤일 같은 소국으로서는 품기 어려운 인재였다.
요술로 제일 가는 세자르 공국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유망주를 어느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오스왈도 오도네 단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난, 쾰른, 특히 비사우 왕국…… 어디 이번에도 몇 년 전처럼 우리 헤일을 무시할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겠소.’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황혼기사단장의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고급 마차이기에 승차감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연신 파레이라 남작에게 불편한 것이 없는지를 물었다.
알기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도, 뛰어난 요술사도 정말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그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아버지야말로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마차가 아주 편하군요.”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생긴다면 바로바로 말해 주시지요.”
“워낙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사람이야.’
하룬 파레이라의 대답을 들은 단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타인에게 상냥하고 왕국에 도리를 다하는 이유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인품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옆 영지인 가이른 자작, 아니 이제 남작으로 격하된 곳에서 마스터 급의 인재가 나왔더라면…… 과연 지금처럼 일이 잘 풀렸을까?
‘쉽지 않았겠지. 힐 버넷, 자네 말이 맞았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던 황혼기사단 부단장의 말을 떠올리며, 단장이 미소를 지었다.
파레이라 가족을 태운 채, 고급 마차는 열심히 왕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좋아. 나도 슬슬 출발해 볼까? 씽씽 달릴 준비 돼 있지? 아니, 달리는 게 아닌지! 날아가는 거지?”
꽤액-!
“하하,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가 보자, 앵두야! 내 말도 잘 들어 줘야 해!”
꽤애액-!
사자의 몸체에 앵무새의 머리, 독수리의 날개에 귀여운 이름을 가진 날짐승이 오리처럼 꽥꽥 울었다.
이 기묘한 광경에 마중을 나온 마르쿠스와 몇몇 파레이라의 기사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론 루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자기 머릿속을 간지럽혔던 일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검은 고양이는 벌써 주변의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모두 안녕! 나를 잊지 마!”
“사람 말을 하고 요술까지 쓰는 고양이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토 달지 마! 그럼 진짜 간다!”
“다녀오십시오.”
마르쿠스의 친근한 배웅을 뒤로한 채, 루루가 그리핀의 등에 올랐다.
순식간에 이륙해 대륙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기분 좋은 느낌 속에서, 루루가 찬찬히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제일 먼저 아단 왕국에 가서 빌 스탠튼한테 선물 주고, 일리아 만난 다음에 영지 고양이들이랑 낚시 놀이하고, 두르칼리로 가서 쿠바르도 보고, 고르하한테 정령도 다시 배우고, 아! 타이호이 열매가루도 조금 받아오고. 아니, 많이 받아오고. 그리고…….”
더 북쪽으로.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하여 1년 전부터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추적하고, 확인할 것이다.
‘잘하는 일일까?’
뾰로롱
어느새 요술소녀로 변신한 루루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인 줄만 알았다.
대륙 동부에서 태어났고, 북쪽이라고는 아이른과 함께한 작년이 처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나 능력을 각성한 이후,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 오르는 부서진 기억들은…… 그러한 확신에 의심을 끼얹었다.
과연 자신은, 정말로 고양이인가?
동쪽의 숲속에서 태어난 숲고양이가 맞는가?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동굴의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륙 북쪽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추위는, 칼바람은, 눈 덮인 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루루가 아이른에게서 떨어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불확실한 기억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마음이 이끄는 장소로 찾아가야 한다 생각했던 것이다.
“으음, 모르겠다.”
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루루가 변신을 풀고 발라당 드러누웠다.
사실,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너무나도 좋고, 행복한 지금의 나날을 깨면서까지 예전의 기억을 찾는 게 맞는지.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는 것이 좋지 않은지.
하지만.
“뭐어, 이렇게 날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답 아닐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루루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앵두라는 이름의 그리핀을 찰싹찰싹 때렸다.
“앵두야! 더 빨리! 더 빨리 가자!”
꽤액! 꽤애액-!
듣기 싫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얌전히 속도를 높이는 요술 그리핀.
그 위에 얌전히 올라탄 루루가 생각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자고.
그리고 지금의 마음은, 어찌 됐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움직이는 것이 나을 터였다. 멍하니 앉아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민을 마친 루루는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아단 왕국에 도착했고, 아이른이 부탁한 물건들과 편지를 순식간에 배달했다.
그리고 아단 왕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고양이 친구들 만나기’를 하려는데, 변수가 끼어들었다.
“가자.”
“어? 어딜?”
“헤일 왕국으로.”
“지금?”
“응, 지금. 나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데려가 줘. 그럴 수 있지, 루루?”
“어? 어, 응…….”
아이른의 편지를 읽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일리아 린제이가, 루루에게 부탁했다.
아니, 부탁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본 루루가 생각했다.
‘지금의 일리아는…… 말릴 수 없어!’
무서웠다.
도저히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단 왕국 말고도 일정이 있다고, 조금 더 기다려 주면 안 되겠냐고 얘기를 꺼낼 용기가…… 검은 고양이에게는 없었다.
결국, 당초에 세웠던 계획과는 달리 곧바로 파레이라 영지로 돌아오게 된 루루.
그리핀이 날아오는 것을 보며 연무장으로 뛰쳐나오던 마르쿠스가, 고양이의 뒤를 따라 내리는 은발의 검사를 보며 경악했다.
“헉! 호, 호, 혹시, 일리아 린제이 님…… 맞으십니까?”
“예.”
“그, 거, 으, 마, 만나 뵙게 되어 여, 영광,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어…….”
갑작스레 나타난 린제이 가의 천재를 바라보며, 마르쿠스가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과 친분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아이른은 그녀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키릴과 루루로부터는 가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영지에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님 접대고 뭐고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죄송, 죄송하지만, 오시는 줄 미처 몰라서 응대가 미흡할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저, 혹시, 아이른 파레이라 도련님을 뵈러 오신 걸까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마르쿠스가 물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도련님의 친구가 영지에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도련님을 보러 온 것이겠지.
그는 그저 아이른이 현재 이곳에 없으니 조금 기다리셔야 한다고, 그 얘기를 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뿐이었다.
“…….”
하나 일리아 린제이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처음 그리핀에 탔을 때만 하더라도 별 고민이 없었다.
아이른을 보고 싶다.
더 기다리기 싫다. 그러니 네가 기다려라!
이 생각만이 가득했고, 다른 부분은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핀을 타고 이동하는 며칠 새 돌아온 이성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괜찮아?’
‘이렇게 급하게 파레이라 영지로 날아가는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내가 아이른을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축하받을 일이지, 놀림당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일리아의 생각은 약간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하나 그보다 더욱 황당한 점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이 들키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야말로 주변 사람은 모조리 눈치챈 로맨스를, 당사자인 둘만 전전긍긍 숨기려고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어떻게, 어떻게 하지?’
물론 지금의 일리아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이른을 얼마나 깊이 사모하셨기에, 이렇게 급하게 영지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도련님을 보러 오신 건가요?’라는, 지극히 평범한 마르쿠스의 말이 왜곡되어 귀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소녀가 된 일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근대는 심장.
빠르게 도는 피.
뜨겁게 차오르는 열기.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가 전력으로 오러를 운용했다.
파앗-!
“윽!”
“허억!”
“크윽…….”
상대를 압박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일리아 린제이다.
하나 너무나도 정신이 없는 나머지, 또 순간적으로 강하게 오러를 운용한 나머지 미약한 기운이 체외로 발현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르쿠스는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깜짝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연무장에서 훈련에 매진하던 병사들도.
그들을 관리 감독하고 있던 기사들까지도.
하나 같이 일리아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마스터가 되어 돌아온 도련님,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술 특강을 봤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분위기.
그 속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산전수전 다 겪은 요술사인 루루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빠르게 다가온 청년 하나.
흔치 않은 푸른색의 머리칼에, 보는 이가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고귀한 위엄이 배어 있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누구지?’
‘누구?’
‘영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서…….’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어느새 일리아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기세를 뿜어냈다.
파아아앗-!
“음?”
“…….”
“후우…… 으음!”
당황으로 인해 거칠게 흘러나오던 일리아의 기운이, 청년의 기운에 가로막혔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연무장 사람들이 놀란 눈빛으로 푸른 머리의 검사를 바라보았다.
린제이 가의 재녀가 왜 갑자기 오러를 발현했는지는 둘째치고.
대륙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기세를 홀로, 그것도 여유롭게 막아 낸 저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물론 모두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정신없는 상태의 마르쿠스가 빠르게 땀을 닦은 뒤,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브랫 로이드 소영주님?”
“……!”
“……!”
거베라 왕국 최고의 기재이자, 크로노 검술관 황금의 27기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망한 검사!
그의 등장에 또 한 번 좌중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맞소. 그런데, 잠시…….”
브랫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이야 익숙했다. 배경 좋고, 잘생기고, 분위기까지 고상한 자신은 어딜 가든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잘난 사람으로서의 숙명을 생각하며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그리핀을, 루루를, 일리아를 쳐다봤다.
흠칫 놀라는 얼굴.
이에 괜히 장난기가 생긴 브랫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른이 많이 보고 싶었나 보군.”
“…….”
“어째서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보고 싶었던 거지?”
“……조용히 해.”
“어째서 조용히 해야 하지? 그냥 질문을 한 것인데?”
“…….”
“내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혹시 너, 아이른을…….”
우우우우웅-!
그는 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어느새 검을 꺼내 든 아단 왕국 최고의, 아니 대륙 서부 최고의 천재.
소드마스터 일리아 린제이의 오러 소드가 흉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련.”
“…….”
“오랜만에, 대련이나 할까?”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연무장에 울려 퍼지는 일리아의 음성.
대부분 이들에겐 무척 위압적인 목소리였지만, 브랫에게는 아니었다.
씨익 웃어 보인 그가 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