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55화 (255/388)

◈ 85. 그가 없는 사이 (1)

대륙 중부의 헤일 왕국은 소국이다. 강대국들은 물론이고, 대륙에 있는 수많은 나라와 비교해도 무엇 하나 특출난 부분이 없다.

영토도, 재정도, 군사력도 보잘것없는, 서부의 이름난 검술관보다도 영향력이 적은 국가.

그런 헤일이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우방국 때문이었다.

소난 왕국.

쾰른 왕국.

그리고 비사우 왕국.

이 4개의 왕국은 홀로는 도저히 혼란을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나약했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끈끈한 동맹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헤일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소난이 자기 일처럼 들고일어났고, 쾰른이 위기에 처하면 비사우가 자기 일처럼 군사를 파견했다.

형제처럼 서로를 돕는 네 왕국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로서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

그렇게 중부의 소국들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고, 평화의 시대가 지금 역시 과거의 끈끈함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돌아가면서 연회를 벌였다.

하지만…….

‘다 옛날 일일 뿐이지.’

비사우 왕국의 공작, 카일 머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4왕국 사이의 단단한 관계는 더는 없었다.

‘혼란이 악마를 불러온다’는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주장 아래, 대륙 전체가 무기한 평화 협정에 들어선 탓이다.

물론 신성왕국의 대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150년 전의 숭고한 협정 이후 세상이 안정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고대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악마 역시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고.

허나 외세의 침략에서 자유로워진 4왕국의 결속은, 더는 예전만큼 끈끈할 수 없었다.

형제 국가보다 더 잘나가기 위해.

예전의 친구, 예전의 우방보다 앞선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카일 머독이 룬텔 왕국을 찾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공주님과 슬릭 가문의 정략결혼은 역시…… 아니, 그만 생각하자.’

비사우의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게다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이프레인 슬릭.

‘대륙 2강’인 마법 왕국 룬텔의 대마법사이자, 3대 마법 가문 중 하나인 슬릭의 이인자.

웬만한 나라의 왕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하는 권력자를 부마(왕의 사위)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소국의 공작인 자신이 도움을 청하러 올 수 있었을까?

대답은 뻔했다.

“후우.”

카일 머독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점검했다.

복장이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얼룩이 진 곳은 없는지, 웃는 표정은 완벽한지.

잠시 후, 슬릭가의 인물이 다가왔다.

“가시지요.”

“알겠네.”

인형처럼 표정 없는 하인을 따라 긴 복도를 걷고, 걷고, 또 걷고. 어느새 흐르는 땀을 닦고,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문앞에 도착했다.

마음과 달리 빙긋 웃은 비사우의 공작이 방으로 들어섰다.

기이할 정도로 넓은 방의 한가운데, 상석에 위치한 대마법사 이프레인 슬릭이 그를 반겼다.

“왔는가?”

“예. 비사우의 카일 머독이 룬텔의 위대한 마법사, 이프레인 슬릭 님을 뵙니다.”

“과한 예는 필요 없어. 앉지.”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이프레인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공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옷을 입지도, 벗지도 않은 상태의 여인들을 억지로 무시한 카일 머독이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진귀한 요리와 값비싼 술,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뛰어난 미녀들.

공작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모두 갖춰진 자리였으나, 그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당장 그럴 수는 없었다.

적당히 분위기를 살핀 뒤, 조심스레 운을 띄운다.

그리고 바짝 엎드린 자세로 도움을 청한다. 거슬리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허나 그런 시뮬레이션이 무색하게, 본론은 상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헤일 왕국에 소드마스터가 등장했다지?”

“예? 아, 예.”

“나이도 어리다 들었는데, 부담이겠어. 안 그래도 이번 연회가 헤일 왕국에서 열린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그렇습니다.”

“여기 온 이유도 그 때문이겠군. 지원이 필요하겠어. 비사우의 인재만으로는 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

“좋아.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나 가지.”

“예?”

이프레인 슬릭의 말을 들은 카일 머독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낸 거야 그러려니 했다.

슬릭 가문의 정보력이라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테니까.

공작은 그의 말대로 고위 마법사를 두엇 지원받아 연회에 대동하여, 다른 3왕국에 자신들의 위세를 알릴 생각이었다.

룬텔 왕국과의 관계도 과시할 겸 말이다.

헌데…….

‘고작 이런 일에, 이프레인이 직접 움직인다고?’

믿기 힘들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웠다.

도움받는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이프레인 슬릭 본인이 나서는 것은 꼭 사양하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순 없었다.

“지금 되물었나?”

“…….”

“대답이 늦군.”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네.”

“감사합니다.”

“뭘.”

“…….”

“흠, 고기가 조금 질기군.”

대수롭지 않은 물음, 그리고 대화.

허나 그 잠깐의 순간, 공작의 옷은 폭우에 노출된 듯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계속해서 상의를 적셨지만,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예의 미소만을 유지했다.

“그럼, 연회 때 보세.”

“예, 대마법사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30분 뒤, 마침내 식사가 끝이 났다.

허나 이프레인 슬릭은 방을 떠나지 않았다.

뱀처럼 서늘한 노인의 손이 미녀 중 하나를 휘감았다.

옅은 신음, 깨져 가는 표정.

눈길이 갈 만도 하건만, 공작은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예를 표한 그가 조용히 방을 나와, 이프레인의 거처를 떠났다.

“……후우.”

짙은 한숨.

그보다 짙은 안타까움.

오랜만에 옛 공주와 마주했던 비사우의 공작이, 어두운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 * *

“아버님과 저, 그리고 동생까지. 셋이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그렇지. 마스터 파레이라, 고맙네! 정말 고맙네!”

아직 말을 낮추는 게 어색했던 황혼기사단장이 격하게 기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상이 높아진 아이른이 왕의 부탁을 거절할까 두려워 신분까지 숨기고 온 터였으니, 이런 반응이 나와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른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마인 발호 소식을 듣자마자 왕국 최고 기사단을 내려보낸 성군.’

그런 왕의 부탁을.

그것도 겨우 연회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그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아무 부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편한 분위기는 아니겠지.’

인간관계와 정치관계에 무지했던, 16살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제 없었다.

물론 여전히 경험이 얕긴 했다.

그러나 이번 연회가, 그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과시하고.

타 왕국은 견제한다.

마치 크로노 검술관에서 막 돌아왔을 때 겪었던 남부 6가문의 연회처럼, 자신과 가문을, 왕국을 헐뜯으려는 이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자.”

계속해서 번져 가는 생각을 끊으며, 아이른이 중얼거렸다.

마냥 발랄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갈 생각은 아니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사람을, 소중한 이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린제이 가주님, 백작 부인님, 빌 스탠튼 경. 그리고…… 일리아.’

아이른은 불카누스의 대장간으로 향하며 몇몇 이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들, 혹은 신세를 진 이였다.

‘4왕국 연회 때문에 곧바로 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선물이라도 챙기는 게 도리 아닐까?’

일리아한테는…….

편지도 따로 챙기고.

루루가 동행하지 않겠다고 한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편하게 선물 배달 부탁을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의문도 함께 들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대장간에 도착한 순간 뒤로 밀려나 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쇠를 두드리던 불카누스가 아이른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뭐야? 필요한 거 있어? 검?”

“……어떻게 아셨죠?”

“평생 검 만들면서 살아왔는데, 표정만 보면 대충 알지. 근데 이거 웃기는 놈이네. 명검을 공짜로 주겠다고 해도 10개월이나 늦게 찾아온 녀석이, 갑자기 검이 필요하다고? 선물이냐, 혹시?”

“……예.”

“하, 나 참. 대륙 최고 대장장이인 불카누스의 검을 자기가 안 쓰고 남에게 선물하겠다니. 자존심 상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불카누스 님의 검이 아니면 만족시킬 수 없는 이들이라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이기도 하고요.”

“…….”

“저기, 대금은 충분히 치를 테니…….”

“됐어, 대금은 무슨. 돈은 나도 많다.”

“그럼…….”

“아, 됐다니까! 그냥 조용히 따라와. 그리고 골라. 알겠어?”

불카누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쌓인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큰 은혜를 아이른에게 받았다 생각하는 불카누스였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 부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른은 그런 그의 속마음까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걱정했다. 불카누스가 적당한 검 몇 개 대충 던져 주고 끝낼 생각인가? 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대장간 한켠에 위치한 창고의 문을 열고 무기 진열대를 보는 순간.

“…….”

아이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못 한 채, 정신없이 검들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닌데?’

그랬다.

정확히는 엄청난 수준이라는 말도 모자랐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꿀꺽 침을 삼킨 그가, 가주에게 어울릴 법한 중검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감각을 개화했다.

……모자라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다른 넘버링 소드와 비교해도 말이다.

“네게 줄 검을 만들다 보니 실력이 좀 늘었다. 예전엔 심혈을 기울여도 나올까 말까 했던 수준의 검이, 최근엔 꽤 자주 나오더군.”

“…….”

“물론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다. 내 목표는 네가 가진 황금의 요술검이니까. 그걸 뛰어넘는 수준…… 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구석만큼은 능가하는 검을 만들 때까지 나는 안주할 생각이 없어.”

그래도, 이 정도면 선물로 부족하진 않을 거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렇게 물어 오는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앞에서, 아이른이 한 생각은 ‘가주와 스탠튼에게 면이 서겠구나’가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

자신이 연심을 품은 상대를 떠올린 그가, 불카누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아는 검사가 하나 있습니다.”

“음?”

“뛰어난 실력에, 재능도 넘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바람처럼 시원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입니다. 불카누스 님께도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한 검, 만들어 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

“여기 있는 검들도 훌륭하지만, 더 좋은 선물을…… 더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검을 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누군지 알겠구만.’

키릴과 루루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어서 안다. 아마 린제이가의 재녀인 일리아 린제이를 말하는 거겠지.

덤으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도 알게 되었다. 지금 녀석의 눈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이의 눈이었다.

‘나쁘지 않아.’

불카누스가 씨익 웃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둘이 꽤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감 그 자체인 아이른 파레이라와, 녀석이 보증하는 영감 덩어리인 일리아 린제이. 그렇다면…….’

만약에 일이 잘 풀린다면.

둘 사이에서 나올 아이의 재능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그 아이가 자신에게 선사할 영감은 얼마나 거대할 것인가?

‘……그것까지 생각하면, 힘 좀 쓰는 게 맞겠는데?’

연애 당사자도 아니건만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그가, 뒤늦게 대답했다.

“좋아. 힘 좀 써 보지.”

“아!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그렇게까지 신경 써서 만들어야 할 검이라면, 당사자를 직접 보고 시작하고 싶다. 데려와.”

“예?”

“나랑 대장간이 움직일 순 없으니까, 선물 줄 사람 여기로 데리고 오라고.”

“…….”

“왜, 못 데려오나?”

불카누스의 말을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데려올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그때 다시 얘기하지.”

씨익 웃는 드워프 대장장이의 열정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의 곁에 서 있는 검사의 마음 역시, 여느 때보다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