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우리 아들이 (3)
이곳에 모인 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이유로 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까?
어떠한 연유로 검을 수련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이 험난한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가고 있습니까?
아이른 파레이라로부터 질문을 받은 이들 중, 누구도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물론 입을 열기 쉬운 분위기가 아니기는 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대개 그러한 법이니까.
게다가 그 내용은 어떠한가?
몹시 추상적이고, 정답이 없는 물음.
몇몇 검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실전적이고 가슴에 남는 강의를 들은 직후였기에, 그 마지막을 ‘정신론’으로 장식하려는 듯한 마스터의 모습이 잘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누군가의 앞에서,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은 얘기였어.’
속으로 생각한 아이른이, 7년도 더 전에 들었던 이안 관주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 뜻 없이, 그저 다른 이의 길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그것만으로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에 관해 묻지는 않겠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검을 들 생각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검을 드는 이유.
검사로서 살아가는 이유.
자신만의 검, 뜻, 신념, 그리고 의지.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었기에 아이른은 더 강해질 수 있었고,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마침내 맞닿은 자신의 길 앞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휘익-!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무기를 들었다.
전생의 의지만큼이나 단단하고.
현생의 신념만큼이나 뜨거운.
그야말로 마음을 뭉쳐 빚어낸 대검.
……이윽고, 아이른이 ‘자신의 검’을 보여 주었다.
후우웅.
후웅-!
무겁고도 위력적인 검술.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강맹하면서도 부드럽다.
정교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작이 예술 공연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좌중이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흘러나와 연무장을 가득 채우는 황금색의 오러.
어둠을 걷어 내는 새벽녘의 빛처럼 따스하고, 포근하고, 희망찬 기운이 넓고도 짙게 퍼져 나갔다.
세상을 향한 선의.
어둠에 대적하는 찬란한 수호의지가, 좌중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술은, 오래전 이안이 수련생들 앞에서 펼쳤던 검무(劍舞)처럼 다양한 깨달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경험과 연륜으로 빚어진 관주와 비교하면, 이제 겨우 23살이 된 그의 인생은 단조롭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얕지 않았다.
가볍지도 않았고, 흩날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무겁게.
또 진하게.
강철의 의지로 뜨겁게 펼쳐지는 검술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갔다.
아이른이라는 검사의 마음을 담고서.
……그렇게, 30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후우.”
콱.
마침내 검무를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역소환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딘가 개운해진 느낌으로 고개를 든 그가 재차 좌중을 바라봤다.
얼떨떨한 표정의 검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빙긋 미소 지은 오늘의 주인공, 마스터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억지로 검을 시작한 분도 계실 것이고, 오래전에 자신의 검을 들었으나 지친 나머지 내려놓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보다 훨씬 열심히, 치열하게 나아가고 있는 분도 있을지도 모르죠.”
“…….”
“그 모든 분께…… 감히 뭔가를 가르치려는 의도로 지금의 검무를 펼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예전의 가르침이 생각났을 뿐이고, 그로 인한 깨달음이 제 검사로서의 뿌리라고 생각했기에……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넓게 퍼진 시야와 예민하게 다듬어진 감각 속, 다양한 눈빛들이 느껴진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깨닫고.
누군가는 되새기고, 새로이 다짐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조차 지금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언제고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정도면…… 특별 강의 수준에선 괜찮은 성과지 않을까?’
감히 누군가의 정식 스승이 될 자격은 없지만, 일회성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꽤 잘 해낸 것 같다.
나름 후하게 자평한 아이른이 고개를 숙였다.
“특별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짝, 짝짝.
짝짝짝짝짝짝짝짝.
잠깐의 정적 이후 시작된 박수는 전보다도 훨씬 커다랐고, 길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만족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비단 요술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 뒤늦게 눈물을 쏟아 냈다.
“여보, 눈물 닦아요.”
“크흠, 울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럼 손수건 필요 없어요?”
“……미안하오.”
멋쩍은 사과와 함께 아멜리아 부인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남작.
그가 눈물을 닦아 낸 것을 확인한 키릴 파레이라가 루루와 함께 다가왔고, 그 뒤를 마르쿠스가 조용히 따랐다.
“하아, 이제 긴장이 풀리네요. 괘, 괜찮았나요? 아, 떨려서 말도 더듬게 되네.”
“…….”
“어…… 뭔가 잘못했나요?”
말이 없는 가족들을 보며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이는 아이른 파레이라.
엄청나게 성장했으나, 여전히 예전 모습도 엿보이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하룬 파레이라가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다. 잘했다. 아주, 아주 잘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오빠 최고! 이렇게까지 잘할 줄 몰랐어!”
“맞아! 아이른이 최고야! 헤헤헤!”
“도련님, 멋졌습니다!”
뒤를 따라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아이른이 잠시 멍한 기색을 보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누구보다 밝은 웃음을 띤 그가 말했다.
“전부 부모님 덕분입…… 물론 키릴도, 루루도, 마르쿠스도!”
고리눈을 뜨는 동생을 달래 주는 오빠 아이른.
그의 얼굴에, 전보다 더욱 밝은 표정이 번져갔다.
* * *
“감동했습니다. 정말, 정말…… 감동했습니다. 여태껏 많은 기사분께 검을 배웠지만, 오늘처럼 무언가 많이 얻은 적은 처음입니다. 꼬,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도입니다! 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장래에 아이른 파레이라 님처럼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허, 젊은 소영주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흥분한 모습이야.”
“뭐…… 당연하지 않나? 당장 나부터가 돌아가자마자 종일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마당인데 말이야. 50이 넘은 나이에 이런 열정이 다시 생길 줄이야…….”
“대단해. 수준이 천차만별인 검사들 대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가르침을 베풀기가 절대 쉬운 게 아닌데.”
“그렇고 말고.”
오후의 특별 강의가 끝난 뒤, 파레이라 가문은 예정보다 훨씬 성대한 연회로 각지의 귀족들을 대접했다.
실력 좋은 악사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악 속에서, 어린 소영주들과 나이 지긋한 최고기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칭송했다.
검의 초심자부터 엑스퍼트에 가까운 숙련자까지, 그야말로 전원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맞춤형 강의를 한 것은 물론이고.
분위기를 휘어잡았던 첫인상, 그리고 가슴을 찌르르하게 울렸던 마지막 검무까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검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검사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걸어나갈 행보를 떠올리게 만들다니.’
‘추상적인 것을 이토록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힘…… 소드마스터란 자들은 전부 이런 괴물들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존재들이었어.’
아이른의 보여 주었던 특별한 강의 덕분일까.
원래도 높았던 마스터에 대한 존경심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 버린 헤일의 검사들이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아니야. 아이른 파레이라가 오늘 보여 줬던 모습은…… 내가 아는 소드마스터의 모습보다도 훨씬 뛰어난 모습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어!’
대륙 전체로 보면 약소국에 머무는 헤일 왕국이다.
그렇기에 강대국의 검사들, 특히 검으로 유명한 서부 왕국들과 비교하면……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검술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른을 보며 눈을 빛내는 중년인 하나는 달랐다.
헤일 최고의 검사.
차세대 왕국 최고기사인 황혼기사단의 부단장, 힐 버넷보다 한 수 위의 실력으로 평가받는 인물.
황혼기사단장 오스왈도 오도네의 눈에는…… 아이른의 진가가 남들보다 훨씬 진하게, 강렬하게 들어왔다.
‘아니, 그렇지 않지.’
오스왈도 오도네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조차도 아이른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스터를, 그것도 일반적인 마스터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이 예상되는 존재를 파악하기에는…… 그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헤일 왕국 최고의 기사라고 한들, 대륙 전체로 보면 그보다 뛰어난 검사가 하늘의 별처럼 많았으니까.
그래도 소득이 있다면, 아이른 파레이라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는 대충 파악이 되었다는 점이다.
‘젊은 천재 특유의 오만함은 느껴지지 않아. 그 점은 정말 다행이라고 봐야겠어.’
처음 파레이라 영지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소드마스터.
그것도 아단 왕국의 린제이 가문, 거베라 왕국의 로이드 가문과 인연이 깊다고 알려진 소드마스터의 영향력은…… 약소국의 왕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교만하기까지 했다면, 왕의 부름이라 해도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을 테지.’
다행스럽게도 그런 느낌은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시종일관 점잖았고, 예의 발랐다.
검술 특강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행사일 것이라 추측했건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이 정성을 다해 가르침을 베푸는 모습이었다.
‘저런 청년이 우리 헤일 왕국 출신이라니…….’
마지막 검무를 떠올리는 오스왈도 오도네, 그의 눈시울이 조금이지만 붉어졌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무리 건실한 청년처럼 느껴진다 한들,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는 명확했다.
조금 더 지켜보며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여러 가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 왕의 부름에 응할 가능성이 커질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저 멀리서 웃고 있던 마스터 파레이라가, 어느새 자신의 곁까지 다가왔다.
“실례지만, 어쩐 일이신가요?”
“……날 아시오?”
잠시, 아주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눈앞에 나타난 아이른을 보며 황혼기사단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허나 상대는 침착했다.
그가 말했다.
“아니요. 다만…….”
여기 있을 실력이 아닌 것 같아서.
또 무언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서.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나직이 말하는 아이른을 바라보며, 오스왈도 오도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이 정도 눈썰미라니…….’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능력이 아니었다.
아이른이 이상함을 간파한 것은, 그가 이안 관주나 율리우스 휼, 퀸시 마이어스와 같은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오러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면 단장은 더 느긋이 젊은 천재를 관찰할 수 있었을 터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짧게 한숨을 쉰 그가 솔직하게, 허나 남이 들을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여 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또 이렇게 된 마당에 속일 이유도 없어서 말씀드리자면…… 나는 황혼기사단의 장, 오스왈도 오도네라는 사람입니다.”
“…….”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얼굴을 위장한 것은 파레이라 공께 폐를 끼치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궁금해서, 조금 멀리서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숨어서 저를 지켜보신 이유는 뭐죠? 왕국 최고 기사단의 단장이시면, 당당하게 오셔도 됐을 텐데…….”
“죄송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시선이 너무 많아서…….”
황혼기사단장의 말에 아이른이 주변을 돌아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몇몇 이들이 이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따로 뵙죠. 무엇보다…….”
“무엇보다?”
“중요한 말을 하실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는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듣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가볍게, 허나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물러서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 단단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오스왈도 오도네가 생각했다.
‘……보기 드물게 효심이 깊은 청년이야.’
* * *
그 시각.
마법왕국 룬텔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슬릭’의 2인자이자, 대륙에 8명밖에 없다는 ‘대마법사’의 칭호를 수여 받은 강자.
이프레인 슬릭의 처소에, 사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