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우리 아들이 (1)
“……오른 주크란 경.”
“아, 말씀하시오.”
“그, 저, 그러니까…… 소영주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소문이 진짜였냐고 묻고 싶은 거요?”
파레이라 가문의 고참 기사, 오른 주크란이 새로이 가문에 들어온 기사를 쳐다봤다.
상대는 멋쩍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른이 요술 세계에 있을 시절 들어왔던 이들을 포함해, ‘나태공자’ 시절을 겪어 보지 못한 인물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이른의 과거가 믿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나도 안 믿어진다.’
허나 이것은 오른 주크란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천덕꾸러기, 왕국의 조롱거리였던 아이.
그랬던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검을 들더니, 순식간에 성장해 버렸다.
‘나 같은 녀석은…… 이제 도련님과 눈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오른 주크란 역시 나태공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좋지 못한 기색을 내비치는 등, 은연중에 무시의 감정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련님을 평생 전담하면서도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았던 마르쿠스.
배다른 오빠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진한 사랑을 쏟아 냈던 키릴 파레이라.
그리고 누구보다 힘들었을 테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식을 보살폈던 파레이라 내외.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파레이라 도련님의 지금 모습은…… 축복과도 같겠지.’
“……과거가 뭐가 중요하겠소. 지금의 도련님이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짧게 대답한 오른 주크란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갔다.
숙소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 파레이라 가족이 사라진 방향이 스쳤다.
남작님께 있어서 아이른 파레이라의 존재가 얼마나 큰 기쁨으로 다가올까?
자녀가 있는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 * *
“정말, 정말로 그랬단 말이냐?”
“예, 아버지 앞에서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말로 이그넷 크레센시아 공을 만났고…….”
2년 만에 같은 곳에 자리한 하룬 파레이라, 아멜리아 파레이라, 키릴 파레이라,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야 당연히 아이른이 보낸 2년간의 여정이었다.
남들이라면 평생토록 겪어 보지 못했을 일들을 연속으로 겪다 보니, 쏟아 내도 쏟아 내도 이야깃거리가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악마에 대한 이야기는 숨겼다.
루루가 이 자리에 동석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아 광대 악마 일을 말해 버렸다가는,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들을 걱정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덕분에 이야기 중간중간이 삐걱거리는 느낌을 주긴 했지만, 파레이라 내외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악마를 제외한 화제들 역시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허허. 대륙 최고의 천재인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께 영입 제안을 받았다니…… 게다가 오크 부족에서 오러 운용법을 배웠다고?”
“그들은 오행신공이라고 부릅니다.”
“허허……. 이거 술이 조금 필요하겠어.”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파레이라다.
지금이야 좋은 일이 훨씬 많지만, 옛날에는 힘겹고 괴로운 일투성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때마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다 보면 자신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꽤 오래 조절해 왔었다.
허나 지금은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참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 아이른 파레이라.
오랫동안 주저앉아 웅크려 있던 그가 마침내 날개를 펴고 하늘 위로 올라서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기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런 기쁜 날까지 마음을 옥죄고 있을 필요는 없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신이 난 하룬 파레이라의 얼굴에 점차 웃음이 진해졌다.
“로이드 영주님, 정말 좋은 분이구나.”
기분이 좋은 것은 파레이라 남작만이 아니었다.
비교적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멜리아 파레이라 역시, 아들이 로이드 영주와 대화를 나눈 부분에서는 진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외적인 성장, 즉 검사로서의 성장은 이미 남부의 마인을 토벌했을 때부터 더 바랄 것이 없다 생각했었다.
허나 내적인 성장은 다른 이야기였다.
마인 토벌에 멋지게 활약하고 왔음에도 여전히 방황하는 아들을 보며, 아멜리아 파레이라는 남몰래 한숨을 짓고는 했다.
길어질 거로 예상되는 여정 동안, 혹시나 좋지 못한 방향으로 마음이 꺾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염려할 필요 하나도 없었어.’
자신의 아들은, 이미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품고 있었고.
그런 아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선한 인물들이, 훌륭한 인물들이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대기만성이라고 했던가?
외적인 강인함뿐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단단하고 건강한 마음을 갖게 된 아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걸렸던 적지 않은 세월을 떠올린 아멜리아가 눈물을 흘렸다.
“여보, 괜찮소?”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니, 키릴. 너도…….”
“아! 나는 아니라고. 그냥 하품하다가 찔끔 나온…… 아 씨, 먼지도 들어갔나. 계속 나오네.”
급기야는 키릴 파레이라마저 눈물을 흘리는 상황.
그 속에서, 하룬 파레이라와 아이른 파레이라는 끝까지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앞에서 든든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아들은 가족에게 밝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기에.
아주 오랫동안 그들이 내미는 손길을 붙잡아 주지 못했기에.
‘이젠 아니야.’
예전의 과오를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렇기에 당시의 고통과 후회에 매몰되진 않을 생각이다.
허나 그때의 일을 완전히 인지도 않을 것이다.
‘……예전에 못다했던 효도까지,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길지만 짧았던 해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콩콩, 발랄하게 문을 두드린 키릴이 안에 들어와 말했다.
“오빠, 앞으로 효도 열심히 할 거지?”
“어? 응, 그래야지.”
“뭐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어, 어…….”
생각을 하긴 했다.
허나 뭔가 거창한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예전에는 방에 틀어박혀 소통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더 자주 부모님과 대화하고, 행동하고,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 정도가 전부였다.
“으음. 뭐 나쁘지는 않네. 확실히, 오빠는 부모님과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해. 아마 엄청 좋아하실 거야.”
“응, 그렇지. 예전에 못 그런 만큼 더…….”
“근데 그런 평범한 거 말고, 이벤트도 하나쯤 하는 건 어때?”
“이벤트?”
“응, 이벤트. 파레이라 가문의 나태공자가 소드마스터가 돼서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나 이만큼 달라졌다! 자랑이라도 해야지.”
“아니, 그건 좀…….”
아이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애초에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검을 든 이유 역시 명성과 허영심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아이른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갈 터였다.
마치 은퇴한 뒤에도 대륙을 떠돌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힘쓴 정화단의 성기사들처럼.
허나 이어지는 키릴의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오빠 좋으라고 자랑하라는 거 아닌데?”
“응?”
“당연히 부모님 좋으라고 자랑하는 거지.”
“…….”
“값비싼 장신구만 사도 주변에 뽐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20대 초반에 마스터에 오른 잘난 아들은 얼마나 자랑하고 싶겠어? 그렇게 생각 안 해?”
“…….”
아이른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부모님을 한 분씩 떠올렸다.
근엄하신 아버지나, 자애롭고 상냥하지만 말수 적으신 어머니 모두 무언가를 자랑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조슈아 린제이 님도 마찬가지였지.’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로이드가의 백작 내외도.
타라칸의 아버지 대전사 카라쿰도.
하나같이 위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컸다.
린제이 가주는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이번에는 과거를 떠올렸다.
나태공자, 파레이라의 수치, 왕국의 게으름뱅이.
쏟아지던 무시와 조롱은 자신만 괴롭힌 게 아닐 터였다. 아마 부모님의 마음이 훨씬, 훨씬 더 아팠겠지.
그런데도 자신에게 조금의 티도 내지 않고, 든든하고 굳건한 모습을 보여 준 부모님께…….
“……응. 하자, 이벤트.”
……키릴이 말한 이벤트는, 꽤 괜찮은 선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오빠만 허락한다면야, 계획 짜는 건 어렵지 않지. 어디 대륙에서 최고로 잘난 아들을 자랑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아니, 대륙 최고는 좀…….”
“그런 마음가짐도 고쳐! 부모님께 있어서 오빠가 최고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최곤데? 아! 물론 내가 더 귀여운 짓도 많이 하고, 능력도 오빠 못지 않게 좋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오빠가 주인공이야.
그러니까 대츅 최고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해.
알았어?
연속으로 쏟아지는 동생의 말에 아이른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래서, 도대체 준비한 이벤트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질문을 들은 키릴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주변 영지를 대상으로 한, 20대 소드마스터의 특별 검술 강의…… 어때? 이 정도면 나름 노골적인 티 덜 나면서, 세련되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 *
소드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의 가문 복귀.
이 소식은 순식간에 헤일 왕국 전역으로 퍼졌다.
남부 6가문만이 아니었다.
사교계 어느 장소, 어느 때에나 아이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적이 없었다.
“드디어 우리 왕국에도 소드마스터가…….”
“그것도 20대에 됐다지? 엄청나구만!”
“주변국 놈들 등쌀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젠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하겠지!”
“듣기로는 얼굴도 잘생겼다는데?”
“파티에 초대하면, 와 주실까…….”
대부분 칭찬과 동경, 선망으로 가득한 반응들.
허나 모두가 이 화제를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흠흠.”
“우리 요즘 아이른 파레이라 얘기만 너무 많이 하는데…….”
예전부터 ‘나태공자’를 농담거리로 사용했던 몇몇 귀족들은, 지금 와서 안면을 바꿔 아이른을 칭찬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른이 마인을 토벌했을 때부터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활약이 부풀려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문이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얘기했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 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된 이상, 아이른의 명성은 이미 그들이 흠집 낼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버렸다.
지금의 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이야기를 돌리는 것뿐.
허나 며칠 뒤, 파레이라 가문에서 특별 이벤트를 벌인다는 이야기가 퍼진 뒤.
그들은 더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들었나? 파레이라 가문에서, 이번에 특별 검술 강의를 한다는군!”
“뭐? 소드마스터가 직접 검술을 알려 준다고?”
“그렇다니까! 물론 하루 이틀 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게 어디야! 우리 장남이 검에 재능이 있으니,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낼 생각이네.”
“그, 그렇군. 마침 우리 아들도 검에 관심이 많은데…….”
“…….”
안 그래도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궁금증이 하늘까지 치솟던 상황이다.
어떻게든 좋은 인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굴뚝같았다.
그런 와중에 이러한 행사가 벌어지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서신과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얘기 들었어요?”
“……들었지.”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 애도 기사 지망이잖아요.”
“…….”
“말 좀 해 봐욧! 이 기회, 그냥 넘길 거예요?”
“그건 아니지…….”
“그럼 어떻게든 예전 일 사과하고, 성의 표시도 하면서 비벼 봐야 할 거 아니에요!”
“큼, 흠…….”
심지어 예전부터 나태공자를 괄시하던 이들까지 이 흐름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존심 높고 오만하기 그지없던 귀족들이 자식들 때문에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 허허허.”
그러한 분위기를 정면으로 느끼며, 하룬 파레이라 남작은 그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드마스터 아들을 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나.”
목소리와 얼굴, 모두 행복하기 그지없는 파레이라 남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