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50화 (250/388)

◈ 83. 아주 오래 기다렸다고 (2)

드워프 대장장이 불카누스.

검사라면 누구나 알 만큼 대단한 명성을 가진 이였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속에는 더욱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 나를 우승자로 꼽아 줬으니…… 평범한 드워프가 아니긴 했지.’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몰랐을 꿈속 사내의 기운을 파악한 존재.

검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보검을 아홉 자루나 만들었음에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발전을 위해 정진했던 존재.

그야말로 불꽃과 같은 열정으로 철을 두드리던 존재였던 그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분명히…… 1년 안에 찾아가겠다고 말을 했었지.’

아이른이 장인도시 데린쿠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1년 안에 무조건 자신의 요술 대검보다 뛰어난 검을 만들겠다는 불카누스의 얼굴이, 표정이, 포부가 뒤늦게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보통의 검사였다면 작별은커녕 1년 내내 언제 검이 완성될까,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을 만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기에는, 내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지.’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불카누스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겪어 보지 못했을 엄청난 일들이 자신에게 쏟아졌던 탓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대륙 최고의 재능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만나고.

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주디스, 브랫 로이드와 재회하고.

101번째 검사인 제트 프로스트의 밑에서 훈련하고.

너무나도 소중한, 지금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존재인…… 일리아 린제이와 증명의 땅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겨뤘다.

그러면서 마스터의 경지에도 도달했다.

그것이 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카라쿰, 타라칸, 구르가르와의 만남과 오행신공.

드디어 밝혀진 전생의 비밀과 광대 악마의 등장.

그 밖에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인연들이 아이른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은 죄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일 뿐.

오매불망 아이른을 기다리고 있던 불카누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쌓여 왔던 분노를 몸에 가득 담은 채, 짧고 단단한 드워프가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흠칫 놀란 아이른이 반사적으로 오러를 운용했다.

터엉

“크아아아악!”

불카누스가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 부딪힌 듯한 모습이었다.

우당탕탕 넘어지는 그를 보며 아이른이 또 한 번 놀랐다.

“불카누스 님!”

“으윽…… 이 자식이!”

다행히 불카누스는 괜찮았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쇠를 두드리며 단련한 몸뚱이 덕분인지 고개 몇 번 흔든 것으로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이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봤다.

당황하는 루루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키릴을 발견한 그가 이렇게 말했다.

“도망쳐!”

“그, 그래!”

“도망? 오빠 뭐 잘못한 거 있…….”

“일단 집으로 가자! 가서 설명할게!”

“가긴 어딜 가!”

파앗!

또다시 달려들려는 불카누스를 외면한 채, 아이른이 빠르게 가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목격자와 마주한 범죄자처럼 오들오들 떨던 그가 뾰로롱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키릴도 자리를 뜨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요술 양탄자를 사용해 하늘로 날아오른 그녀가 말했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 오빠가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니 곧 돌아올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경우 있는 녀석이 날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해?”

“나중에 봐요.”

모르겠다.

일단 오랜만에 부모님 얼굴이나 뵙고 생각하자.

생각을 마친 키릴이 순식간에 가문을 향해 날아갔다.

“남작님과 안주인님께서는 출타 중입니다. 별일은 아니고, 프리드 남작가의 초대를 받은 터라…… 그래도 일주일 안에는 돌아오실 겁니다.”

그리하여 무사히 영주관으로 돌아온 아이른 일행.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한 건, 부모님이 아닌 시종 마르쿠스였다.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품은 채.

허나 떠날 때 보였던 걱정 대신 자랑스러움을 품은 눈빛을 보낸 그가 아이른을 보며 말했다.

“대장장이 불카누스와 마주하신 모양이죠, 소영주님?”

“아, 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한 달쯤 됐습니다. 2년간의 여정은 어떠셨는지, 들려오는 소문 중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은 그 얘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아이른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들의 이야기를, 악마와의 일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를 마르쿠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매우 급했다. 곧바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지 않는다면 불카누스가 뭔가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다행히 마르쿠스는 요약을 잘하는 사람이라 이해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설명을 들은 아이른이 그의 말을 정리할 겸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데린쿠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고향인 이곳까지 찾아왔고,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니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는 거지? 그랬더니 겸사겸사 대장간도 열어서 이것저것 만들고 있었고.”

“맞습니다.”

“불카누스 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도 많아졌고?”

“예. 상인도 상인이지만, 검사들이 정말 많이 찾아왔죠. 물론 불카누스, 그 양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지만…….”

마르쿠스가 또다시 격정에 찬 눈빛으로 아이른을 바라봤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 소심하고 여렸던, 그래서 나태공자라고까지 불렸던 도련님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니!

가정은 없지만,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고마워, 마르쿠스.”

아이른 역시 그 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차라도 하면서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일단 불카누스부터 다시 찾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가자. 마르쿠스, 같이 갈까?”

“저야 대환영입니다. 저도 보고 싶군요, 열 번째 넘버링 소드!”

“좋아. 루루, 겁먹지 마.”

“으앙! 그 드워프, 엄청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우리를 봤다고!”

“괜찮아, 괜찮아.”

“그래. 뭐가 문제야? 오히려 좋은 일 아니야? 나 같으면 약속 안 지킨 녀석 걷어차고 다른 사람한테 줬을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씨가 고운 드워프네.”

“그건 그렇죠. 그 양반,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보여 줄 생각이 없다고 해서…… 아직 누구도 구경하지 못했답니다. 오랜 친우들도 말이죠.”

“친우들? 아…….”

아이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정체 역시.

* * *

“드디어 보게 됐구만!”

“진짜 징하다, 징해! 그렇게 꽁꽁 숨길 것까진 없잖아!”

“맞아. 아니, 그거 꼭 그 녀석 줘야 해? 그냥 다른 검사 줘도 되잖아.”

“나도 동의한다.”

“닥쳐! 그런 행동은 내 신념에 어긋난다! 어찌 됐든 이건 그 녀석 덕분에 만든, 그 녀석만을 위한 검이야. 다른 어떤 마스터가 와도 넘길 수 없다고!”

불카누스가 주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우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더러운 성격은 원래 알고 있는 바였으니까.

그것보다는 곧 공개될 10번째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가 너무나도 궁금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검이기에…….’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거지?’

‘자기한테 무지하게 엄격한 녀석인데 말이야.’

‘이건 꼭 봐야지. 무조건 봐야 해!’

데린쿠에서부터 함께한 두 대장장이, 드워프 드완슨과 인간 파블로.

대륙 동부의 유명한 보석세공사, 라샤드 화이트.

대륙 북부 최고의 조각가, 엘프 자마리.

이들 모두가 10개월 동안이나 불카누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은, 그의 생애 최고의 걸작품을 두 눈으로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대장장이로서, 혹은 같은 창작자로서.

거장의 열정과 재능이 듬뿍 담긴 물건을 보는 것만큼 훌륭한 영감은 없을 터였다.

그들은 사탕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고,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른의 얼굴을 확인한 불카누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 돌아왔다, 이 개자식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됐어! 내 잘못이지. 그만한 기대감을 심어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

“…….”

“하지만, 지금의 검을 보는 순간 후회하게 될 거다. 왜 1년이 되는 순간 딱 맞춰서 오지 않았을까? 이렇게 훌륭한 검을 왜 이제야 찾으러 왔을까? 바보 같은 나. 바보 같은 아이른 파레이라! 죄송합니다, 불카누스 님!”

“…….”

“……이렇게 말한다면, 기꺼이 너를 용서하고 이 검의, 열 번째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의 주인으로 인정할 생각이 있다.”

‘웃기는 양반이네.’

키릴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것도 그렇고, 자부심이 넘치다 못해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검을 만든 것일까.

얼마나 자신 있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볼 수 있을까요? 검.”

이는 키릴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도.

루루도.

불카누스의 곁에 서 있는 네 명의 친우들도,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도.

모두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검을 가지러 가는 불카누스의 등판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10번째 넘버링 소드가 공개되자, 네 창조자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건…….”

“…….”

“미쳤군.”

“몇 달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하하, 당연하지.”

친우들, 특히 대장장이인 드완슨과 파블로의 반응에 만족한 불카누스가 씨익 웃음을 보였다.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물건을 만들지 못했던 그였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근 2년 전에 아이른과 마주했을 때의 충격.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요술대검을 보았을 때의 충격.

그로 인한 영감을 고스란히 이 검에 담았다.

‘어쩌면…… 여전히 녀석의 요술대검만큼 단단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검이라는 것은 단단함으로만 판단할 물건이 아니다.

날카로움.

그리고 균형감.

그 밖에도 수많은 요소가 검의 품질을 좌우한다.

불카누스의 생각에, 이 10번째 넘버링 소드는 단단함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아이른의 낡고 투박한 요술대검을 앞지른다는 확신이 있었다.

“자, 어떠냐! 아이른 파레이라!”

“…….”

“비교가 어렵나? 그렇다면 일전의 대검을 소환해 봐라. 그리고 차례로 휘둘러 보도록. 그럼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검이 더 뛰어난 검인지. 네 검사 인생의 동반자로서 어떤 검이 더 어울리는지, 확실하게 알게 될 거라고!”

불카누스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말로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 그리고 눈빛.

네 친우, 그리고 마르쿠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오랜 세월 끝에 완성된 불카누스의 10번째 넘버링 소드.

이는 대륙의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도 수위에 꼽힐 만큼 대단한…… 그야말로 신화시대의 물건과도 견줄 수 있는 검이라고.

그렇게, 모두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슈슉

말없이 넘버링 소드를 지켜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소환했다.

어딘가 미안한 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예전의 투박하고 낡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워진 요술대검을 목도한 드완슨과 파블로가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이런 미친!”

“…….”

“…….”

보석세공사 라샤드 화이트와 엘프 조각가 자마리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눈만 꿈뻑거릴 뿐.

고요 속에 루루가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데, 아이른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 음, 죄송한데…….”

“…….”

“뵙지 못한 사이에, 대검이 진화를 해 버려서 말입니다…….”

“…….”

“저기, 불카누스 님?”

아이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불카누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루루가 살며시 날아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기절했어.”

“…….”

“…….”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키릴이 한숨을 쉬었고, 분위기를 살피던 아이른이 생각했다.

‘조금…… 미안하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