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49화 (249/388)

◈ 83. 아주 오래 기다렸다고 (1)

아이른이 아단 왕국을 떠나고 얼마 뒤, 스탠튼 자작가에 전설의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의 몸체에 독수리 머리.

아니 독수리보다는 앵무새에 가까운 귀여운 모습이긴 하지만, 하여튼 일반적으로는 평생을 가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영물이 가문의 성에 나타난 것이다.

허나 반응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스탠튼 영주도, 기사들도, 하인과 손님들도.

모두가 신기하다는 표정은 지었을망정, 거대한 비행 몬스터가 출현했다고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무사히 가문의 연무장에 착지한 앵무새를 닮은 그리핀.

그 위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내렸다.

어깨에 조그만 자루를 짊어진 짐승은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여기 있구나, 빌!”

“반갑습니다, 루루 님.”

“히히! 나도 반가워!”

뾰로롱 하늘을 날아온 루루가 앙증맞은 손을 뻗었다.

스탠튼가의 망나니 빌 스탠튼 역시 손을 뻗었고, 귀엽기 그지없는 악수가 치러졌다. 몇몇 고양이 애호가들이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허나 그들보다 더욱 강렬한 시선으로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탠튼의 주인인 쿠엔틴 스탠튼이었다.

‘이 녀석, 진짜 아이른 파레이라 공과 친분이 있었잖아?’

이제 대륙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그중에서도 아단 왕국 사람들은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있다.

증명의 땅에서 있었던 챔피언 결정전도 그렇지만, 린제이 영애와 그 사이에 핑크빛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핀은 동생이자 요술사인 키릴 파레이라의 소환수겠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고양이는…… 가장 친하다고 알려진 루루라는 요술 짐승이겠군.’

비로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쿠엔틴 스탠튼이 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빌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나이 30이 넘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던 못난 녀석이, 어찌 아이른 파레이라와 같은 대단한 인물과 친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왕국에 퍼진 소문은 그 반대였다.

스탠튼가의 망나니가 파레이라 가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쿠엔틴 스탠튼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오히려 아들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의혹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스탠튼 자작이었다.

허나 놀라운 일은 끝이 아니었다.

검은 고양이가 짊어진 보따리에서 나온 푸른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딱 봐도 엄청난 장인의 손길을 탔음을 느낄 수 있는 명검.

그것을 본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루루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번에 도와줘서 고마웠어! 이건 키릴이 만든 아티팩트야. 착용자가 쾌적한 기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해독 기능과 마기 감지 기능, 간단한 마법 방어 기능이 있어!”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크흠, 저, 이 검은?”

“이 검? 이것도 당연히 선물이지! 아이른이 주는 선물이야. 이거 되게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거야! 완전 좋은 거야!”

“아아,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하!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우리도 신세를 졌으니까! 아, 그리고 내 선물은 이거야!”

허공에 쑤욱 손을 집어넣은 루루가 금덩이 하나를 꺼냈다.

당장이라도 펄떡거릴 것 같은 물고리를 입에 문, 고양이 모양의 황금이었다.

상당한 크기를 확인한 빌 스탠튼이 재차 감사를 표했고, 루루는 즐거운 듯 웃다가 그리핀에 타며 말했다.

“조금 더 있고 싶긴 한데, 할 일이 많아서 그만 갈게. 린제이 가문도 가야 하고, 고양이 친구들도 보러 가야 하거든!”

“괜찮습니다! 나중에 저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좋아!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안녀어어엉!”

등장했던 것처럼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리핀과 고양이.

이를 보며 사람들이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그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쿠엔틴 스탠튼에게, 빌 스탠튼이 말했다.

“아버지.”

“……어? 어, 그래.”

“이 정도면 아버지 얼굴에 금칠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효도한 걸로 생각해도 되겠죠?”

하하하하하, 말을 끝내자마자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웃어 제끼는 아들.

그 못난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스탠튼 가주는 차마 빌을 혼낼 수가 없었다.

* * *

루루의 선물 보따리는 스탠튼 가문에만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린제이 백작 내외 역시 값진 선물을 받았다. 엘리사 린제이는 세자르 공국의 유명한 향수를 받았고, 가주는 검을 받았다.

“으음.”

조슈아 린제이가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검 선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검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기에 대부분의 검은 그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것은 아니었다.

완벽한 균형.

날카로운 검날.

세련된 디자인은 아니지만, 소름 끼칠 정도의 기능미가 느껴졌다. 장인의 솜씨가 하늘에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꽤 오랫동안 검을 관찰한 가주는, 대장장이의 실력뿐만이 아니라 그 정체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이른 녀석, 이 양반이랑은 어떻게 연이 닿은 거지? 웬만한 마스터가 찾아가도 시큰둥한 성격인데…….’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또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린제이 부인이 황당하다는 듯 가주를 쳐다봤다.

아이른 파레이라.

딱 봐도 검술만 뛰어나지, 연애 경험 따위는 전무한 순수한 청년이라는 것을 간파한 그녀였다.

그런데도 일리아뿐만이 아니라 자신들 선물까지 챙겼다는 것은, 서투른 것치고 꽤 노력을 했다는 뜻과 같았다.

직접 오지 못한 것?

그거야 당연했다.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금의환향했으니, 밀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만 해도 한세월일 터였다.

아마 국왕의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고.

‘이 양반은 딸을 사랑하는 거야, 싫어하는 거야? 진짜 일리아 혼삿길 막고 싶어 환장했나?’

엘리사 린제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슈아 린제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본다면 ‘정녕 저게 위엄 있는 가주의 모습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 모습이었으나, 실상은 이것이 가문의 평소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조슈아도, 엘리사도, 그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일상을 이어 가던 와중이었다.

벌컥!

“엄마, 아빠.”

“오, 그래! 우리 딸…… 응? 복장이…….”

“잠시 헤일 왕국 좀 다녀오겠습니다.”

“뭐? 잠…….”

슈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고, 가주는 생각이 정지한 듯 굳은 채 딸이 사라진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물론 영원히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그가 딸을 쫓아갔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뭣? 어? 자, 잠깐! 기다려!”

슈우우우우웅-!

어느새 그리핀의 등에 탄 일리아 린제이가, 루루와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제아무리 10대 검사인 조슈아 린제이라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녀가 점으로 줄어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 아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른의 편지를 받아 보는 순간, 지금 당장 헤일 왕국으로 가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영지에 없다고?

상관없었다.

어차피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면 그만이다.

“안 기다릴 거야. 네가 기다려, 아이른.”

사랑에 빠진 눈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일리아 린제이.

그녀를 보며, 루루가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무서워!’

* * *

시간을 조금 앞으로 당겨,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이 린제이 가문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순식간에 대륙 중부에 도착한 셋은, 영지까지 계속해서 그리핀을 타지 않고 도중에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아이른이 한 말 때문이었다.

“가문 돌아가면 한동안 이럴 기회 없을 것 같은데, 여유롭게 즐기면서 가자.”

여행 내내 자신을 신경 써 줬던 키릴과 달리, 자신은 동생을 신경 써 주지 못했다.

정신없이 여러 일이 계속해서 터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다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키릴이 좋아하는 가게도 둘러보고, 축제 있는 곳도 찾아가 보고, 그러면서 가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사소한 배려.

허나 오빠의 말을 들은 키릴은 찔끔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10년의 세월을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오빠가, 어느새 자기 주변을 챙길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누군가는 이제 겨우 평범한 20대가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오빠의 인생을 옆에서 봐 왔던 그녀로서는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소드마스터에 오른 것보다 이것이 더 기뻤고, 좋았다.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키워 나갔어야 할 부분, 성장했어야 할 부분.

그것들이 최근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뒤늦게나마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요술 스승으로서 이보다 뿌듯할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러자!”

“음, 가면서 부모님 선물도 고를까? 아, 마르쿠스 것도 사야겠다.”

“그것도 좋아!”

“나도 좋아! 그리고 내 선물도 사 줘!”

“루루는 뭐가 좋은데?”

“몰라! 아무튼 사 줘!”

“나도 사 줄 거지, 오빠?”

“음,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뭐?”

“농담이야.”

웃으며 농담을 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 평범한 모습마저 특별하다고 느낀 키릴이,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보름간의 여행은, 아이른에게 있어서도 정말로 즐겁고 뜻 깊은 시간이었다.

거리를 거닐며 시시껄렁한 수다를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모으고 모아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를 찾아가고, 그러면서 어쩔 때는 실망하고 어쩔 때는 감탄하고.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시간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아이른에게 있어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수많은 경험과 인연을 통해 비로소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한 아이른의 마음과 발걸음.

이는 어느새 가장 포근하면서도 든든한 곳인 파레이라 영지까지 도달하였다.

만으로 정확히 2년.

절대로 짧지 않은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아이른의 머릿속에는, 온통 부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영주관으로 향할 수 없었다.

“이 자식! 이, 이, 이 자시이이이이익!”

“…….”

땅딸막하지만 단단한 체격을 갖춘 누군가와 파레이라 영지의 길거리에서 마주한 순간, 아이른은 엄청난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물론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

산 채로 잡아먹을 듯한 눈길을 보내는 드워프 대장장이, 불카누스.

그가 성난 멧돼지처럼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