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인정할 수밖에 (5)
조슈아 린제이의 생일맞이 무도회가 끝나고, 시끌벅적했던 가문은 다시 조용해졌다.
물론 모든 이들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가주와 친한 몇몇은 하루 이틀 더 체류하며 담소를 나눴다.
고위 귀족의 경우는 비밀리에 악마 출현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 역시 가문에 남은 손님 중 하나였다.
키릴과 루루는 엘리사 린제이 부인과 함께 영지 곳곳을 소개받으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냈고, 아이른은…….
“하압!”
“핫!”
카앙!
캉-!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부터 계속, 일리아 린제이와 치열한 대련을 이어 갔다.
‘……엄청 강해졌는데?’
후우, 한 발 물러선 아이른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지난 몇 달 간,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성장을 거두었다.
린제이 가주, 이안 관주, 쿤을 만나며 쌓아 갔던 경험과 기술이 로이드 영주의 조언과 약간의 기연을 통해서 깨달음을 불러왔고, 그 이후에 퀸시 마이어스로부터 익힌 신성왕국의 검술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소화해 낸 상태는 아니지만, 원래도 또래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아이른임을 생각하면…… 지금의 일리아로서는 검 하나하나를 받아 내는 것조차 고역이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성장했다.
그냥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검술만 떼 놓고 보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
그사이에 기연을 얻은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실력을 숨겼던 것일까?
둘 다 아니다.
‘언제 이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지.’
예전과 달리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칭송하는 요즘이었지만.
아이른이 생각하는 최고의 재능은 이그넷, 그리고 일리아였다.
그녀가 한동안 정체 상태였던 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방황이 있었기 때문.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라바트에서 헤어진 이후, 그걸 완전히 떨쳐 낸 모양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허나 단순히 그러한 감정으로 끝이 아니었다.
친구의 방황이 끝난 것을 축하한다는 것보다 더 진한, 더 깊은 마음은 가슴에 품은 채.
아이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일리아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콰앙!
쾅!
콰아앙-!
상대를 부숴 버릴 듯 강력한 연격이 상, 중, 하단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기교를 배제한 순수한 강검(强劍)이 린제이 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일리아는 위축되지 않았다.
상대와 마찬가지로 싱긋 미소 지은 그녀가 부드럽게 몸을 회전했다.
발걸음 몇 번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그녀가 바람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반격에 나섰다.
하늘검이었다.
이전까지 봐 왔던 미숙했던 하늘검이 아닌, 먼 옛날 영웅의 검에서 펼쳐졌던 바람이 주변에 가득 휘몰아쳤다.
아니.
단순히 선조의 것을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검술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한편, 자신이 쌓아 온 경험 역시 사이사이에 녹여 넣는다.
아이른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느낀 것을 그 역시 함께 경험하며 나아갔기에.
벽을 넘은 천재.
한계를 깨부순, 진짜 천재.
그 찬란한 재능에 소름이 돋은 아이른이 더욱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응? 왜? 벌써 지쳤어? 으음……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큰 충돌 이후, 뒤로 훌쩍 물러난 아이른이 대검을 역소환하며 말했다.
일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궁금한 것도 궁금한 거였지만, 일단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더욱 바랐다.
무도회 날 정원에서 ‘그 말’을 들었던 이후, 그녀는 아이른과의 대련이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으음,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음……. 그래. 그럼 내일 또 하면 되지. 쉬어.”
물론 아이른은 그런 상대의 마음을 몰랐다.
걱정과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손을 흔드는 일리아 린제이.
그런 그녀를 향해 그 역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다가, 아예 상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었다.
대련이 끝난 후에도 검술 수련에 매진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
……아니.
이제는 그 이상의 관계가 되길 원하는 존재를 보며, 아이른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며칠 간의 고민 끝에 확실해진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일리아 린제이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다시는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것.
그녀와 검을 나누는 시간이 너무나도 좋지만.
그녀와 검만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
그녀와 더욱 많은 일을 하고 싶고,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력해야 했다.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자신의 마음을 상대도 알 수 있도록, 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잘.
“하아.”
아이른이 한숨을 토해 냈다.
노력.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던 단어였다.
형편없는 체력의 예비 수련생에서 소드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라선 것도.
친구 하나 없던 자신의 주변에 어느새 소중한 이들이 이만큼 많아진 것도.
전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했기에 이룰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무리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도전하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면 됐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금의 아이른이 나아가려 하는 길은, 단 한 번의 실패가 너무나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섵불리 말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랫동안 일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돌아서며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이 자신과 다를까 두려운 이유는, 지금의 관계마저 깨져 버려 어색한 사이가 될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 모든 두려움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아이른은 자신감이 부족했다.
자신이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있는지.
애초에 매력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하는지.
그야말로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난제였다.
아이른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무언가를 할 수도 없다.
그러한 고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새 아이른 일행이 린제이가에 머문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적지 않은 시간.
허나 고민을 해결하기에는 몹시 짧은 시간.
조금씩 가까워지는 이별의 순간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결심을 내린 것은, 일행이 가문을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여동생에게 부탁한 요술 꽃 한 다발을 손에 든 아이른이,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대련하러 나온 일리아에게 말했다.
“이거, 그…… 선물인데.”
“어? 어어…….”
일리아 린제이는 몹시 당황했다.
아이른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마냥 즐거웠던 그녀였다.
내일 그가 떠난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와중에 불쑥 건네진, 황금빛과 은빛으로 수 놓인 아름다운 꽃다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이게, 아…….”
물론 아이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떨렸다.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한 발짝 나설 용기가 없어서, 그래서 겨우 반 발짝 다가가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준비했던 말이 엉망진창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가문에 온 첫날에 바로 선물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
이 꽃다발의 빛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요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괜찮다면, 이 꽃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자신이 조금, 조금 더 자주 찾아와도 되겠냐는 것.
이러한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만큼은, 확실히 성공했으니까.
‘미치겠네.’
이야기를 끝마친 아이른의 등에서 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조잡한 변명이었다.
차라리 그냥 자주 보러 와도 되겠냐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았겠다는 생각이, 뒤늦은 후회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랬다가 일리아가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다고, 그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물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아이른은 평소보다 수십 배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상대의 말을 기다렸고, 일리아는 꽤 오랫동안 그림 속의 인물인 양 멈춰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은.
실제로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
잠깐의 포옹.
허나 절대로 잊지 못할 순간을 느끼며 아이른이 멍청하게 있는 사이, 어느새 저 멀리 도망가 버린 일리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많이 혼날지도 몰라.”
“…….”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일리아는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그런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아이른은 멍하니 바라봤다.
은빛과 금빛이 섞인 꽃다발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멀어져 갔지만, 그 사실이 그리 슬프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촉감, 향기, 그리고 온기.
아주 잠시 내려앉았다 간 그녀의 흔적을 느끼며, 23살의 소년은 한참이나 여름밤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멋있게.”
소년에서 청년으로 순식간에 성장한 이가, 조용히 자신의 다짐을 중얼거렸다.
* * *
6월 말,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오전의 한때.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린제이 가문을 떠났다.
배웅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린제이 백작 내외와 일리아 린제이, 엠마 가르시아를 비롯한 기사 몇이 전부였다.
물론 인원이 단출하다고 해서 린제이 가문이 아이른을 허투루 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문의 핵심만이 모였다는 점에서, 지금껏 이곳을 방문했던 그 어떤 이들보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긴, 장차 어르신의 사위 될 가능성이 큰 청년이니…….’
‘당연히 알아 모셔야겠지.’
오래도록 가문에 헌신한 노기사 몇이 일리아 쪽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흠칫하며 조슈아 린제이 쪽을 쳐다봤다.
“큼흠.”
“허험…… 그럼, 일 보러 가겠습니다, 가주님.”
황급히 사라지는 기사들을 노려보던 가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들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른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 녀석이 자신에게 몰래 건넨 이야기가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음에 올 때는, 더 든든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뭐? 든든?’
‘걱정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놈, 그게 무슨…….’
아이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훌쩍 그리핀에 타 날아가 버렸다.
가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든든한 모습?
걱정하시지 않도록?
마치 딸과 장래를 약속한 듯한 건방진 말에 조슈아는 황당함과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이 자식. 넌 나한테 인정받으려면 아직 멀었다!’
물론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일 뿐.
엘리사 린제이 부인은 벌써 들뜬 표정을 지으며, 딸과 예비 사위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이것저것 떠올렸다.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는…….
‘그런데, 내가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차라리…….’
가주가 알게 된다면 피를 토할 생각을 이어 가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사라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