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45화 (245/388)

◈ 82. 인정할 수밖에 (2)

‘괜찮을까?’

오빠의 방에서 돌아온 키릴 파레이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빠가 아니라 빌 스탠튼 녀석이 말이다.

‘오빠야 바람직하지.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하긴 했어.’

그녀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련한 검사답게 탄탄한 체격과 커다란 신장, 좋은 비율의 방점을 찍는 준수한 얼굴과 트러블 없는 피부.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었지만, 여심을 흔들기엔 충분한 외관을 갖췄다고 봐도 충분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는 지금까지 그 잘난 외모를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항상 비슷한 여행복 차림.

계절이 바뀜에 따라 조금 가벼워지고 무거워지는 것만 다를 뿐, 개성과 멋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복장을 고수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성에 가장 관심이 많을 청소년기를 크로노 검술관, 그리고 요술세계에서 보낸 아이른이다.

그 말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 흔한 파티와 무도회장 한번 경험해 보지 못한 채 20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빠를 이 지경까지 내버려 둔 자신의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크게 관심 없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보다는 나은 입장이었으니 조금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도회를 대비해 복장에 힘을 주자는 제안은 꽤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한 사람이 문제였다.

빌 스탠튼.

자기 입으로 자신을 망나니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인물이자, 최악의 첫인상을 선사한 사람.

그런 녀석에게 오빠를 맡겨도 되는 것일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계속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말도 안 되는 옷차림을 권유하는 건 아니겠지?’

친동생이라곤 하지만, 성별이 다르기에 옷 갈아입는 장소까지 따라가지는 못했던 키릴이다.

허나 아이른이 사라진 지 2시간이 넘어가는 지금, 그녀는 아까의 선택을 몹시 후회했다.

소문난 망나니 녀석.

그에 걸맞게 싸가지없는 첫인상을 자랑했던 녀석.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달라붙어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녀석.

그런 자식에게 어리숙한 오빠를 믿고 맡겨도 괜찮은 걸까?

그때였다.

“키릴.”

“응?”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갑자기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는 루루.

그런 그를 보며, 키릴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것은 90퍼센트가 루루 탓이었다.

루루가 빌 스탠튼을 데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오빠가 녀석의 말에 현혹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곧바로 성질을 내지 않은 이유는, 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고양이가 가끔 현자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루밍을 마친 루루가 스리슬쩍 키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이른이 얼마나 멋있게 변해서 오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면?”

“옷차림에 처음으로 신경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지. 물론 누가 보기에도 멋있고 잘난 모습으로 무도회장에 나타나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나는 조금 어설퍼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래?”

“응. 내가 일리아라면, 아이른이 어떤 옷을 입고 자기 앞에 나타났는지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런 복장을 하고 왔을까, 그걸 더 중요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거든.”

잠시 고민하던 키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옷을 못 입는 사람이라고 해도, 빌 스탠튼의 코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별로라고 가정해도 평소 아이른의 복장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힘을 준 티가 나겠지.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옷차림에는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남자가,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만으로도 일리아 린제이는 성의를 느낄 것이고, 아이른의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니, 이건 너무 나갔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전의 아이른, 예전하고는 분명히 달랐어.”

“그래?”

“응. 그리고 이건 내 예상인데…… 아마 무도회를 준비하는 동안, 더 많이 변할지도 몰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루루가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음가짐의 변화는 행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이 더는 밝은 미소를 보일 수 없는 것을,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이어 가는 사람이 매사에 자신감 넘치게 행동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행동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행동의 변화 역시 얼마든지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의 아이른이 그러했다.

평소와 같은 옷차림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여느 때보다 훨씬 외관에 투자하고, 표정을 점검하고, 거울 앞에서 미소를 연습하는 것.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빌 스탠튼이라는 사람의 제안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에 하루 이틀 집중하고 나면, 일리아를 향한 마음 자체가 달라져 있을 가능성도 크다는 거지.”

“…….”

“왜 그렇게 봐?”

“……아니야.”

고개를 저은 키릴이 창문을 열었다.

초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몸을 식혀 줬다.

다소 화가 누그러진 그녀가 루루에게 말했다.

“네 말이 틀렸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안 하지만?”

“아무한테나 먹을 거 얻어먹고 우리한테 데려오는 건 고치도록 해. 알았어?”

“알았어…….”

루루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가 막혔던 생선 맛이 여전히 입안에 남아 있었다.

* * *

“음?”

“왜 그러시죠?”

“아니, 누가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착각이겠죠.”

“검사이자 요술사인 아이른 공이니, 마냥 착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도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복장 말고도 걸음걸이, 교양, 표정, 미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춤……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 아이른이 연습에 몰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옷만 몇 벌 얻어 갈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무도회 완전 공략’의 기치를 내걸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소드마스터에 오르면서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와 감각 덕분에 대부분의 동작을 수월하게 따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 긴장된단 말이지.’

왜 그럴까?

일리아에게 한 말실수 때문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니, 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감정이, 지금의 연습을 통해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여전히 그것이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간도 너무 짧았고, 아이른도 너무 둔했다. 원래도 그런 성격인데 요술세계에서의 세월이 더해진 탓이었다.

또래라면 대부분이 경험했을 분야에 그는 너무 늦게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빠르지 않더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점.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 * *

이윽고, 무도회의 시간이 찾아왔다.

평범한 무도회가 아니었다. 무려 린제이 가문의, 그것도 굉장히 오랜만에 열린 무도회였다.

칼 린제이의 실종이 있고 난 이후, 조슈아 린제이는 한 번도 이러한 잔치를 벌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여기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더해졌다.

“어?”

“……!”

“와…….”

“무슨 일이지?”

“옷이…….”

대륙 10강의 하나인 조슈아 린제이의 딸이자, 자기 자신도 마스터라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인물. 일리아 린제이.

허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교 모임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그녀가, 무려 드레스 차림으로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픈 숄더 스타일의 푸르고 고급스러운 드레스.

대충 묶고 다니던 것과 달리 정성 들여 손질된 은발의 머리카락, 엷긴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화장, 그리고 신경 써서 고른 듯한 장신구.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듯 고운 린제이 가 영애의 자태에 회장에 모인 이들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꿀꺽

당연하게도, 20~30대 젊은 남성들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능력, 명성, 배경, 외모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존재.

그런 존재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검사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채, 무도회에 가장 어울리는 우아한 복장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춤을 신청해도, 받아 줄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오늘의 린제이 영애는 조금 더 친근한 느낌인데…….’

‘이런, 나 지금 머리 상태 괜찮나?’

뭇 남성들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행동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정말로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정말로 빛이 나는 영애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쉬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는 자격지심이 그들의 걸음에 제동을 걸었다.

무엇보다 일리아 린제이의 뒤편에서 인자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허나 그 어떤 사람보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무도회장을 훑고 있는 조슈아 린제이의 압박을…… 그의 기세를 뚫고 저기까지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평소에도 냉정하지만, 딸과 관련된 일이면 더 그렇다지?’

‘듣기로는 딸에게 눈독 들인 이들 전부에게 대련을 신청했다던데…….’

‘진짠가? 아니, 진짜가 아니더라도 저 시선을 받으면서 춤을 신청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결국,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남성들.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조슈아 린제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그의 성정을 익히 아는 늙은 귀족 몇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가 저리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아무리 능력 좋은 젊은이들이 많은 아단 왕국이라 한들, 저 정도의 압박을 뚫고 영애에게 다가갈 정도의 청년이 있을 리가…….

“음?”

“…….”

그때였다.

무도회의 구석진 곳에서부터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아니, 소란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았다.

몇몇 이의 감탄사를 제외하면, 오히려 일반적인 무도회의 분위기보다 훨씬 조용해진 상황이었으니까.

허나 그로 인해서 더욱 눈길이 집중되었다.

“헙.”

“음!”

“…….”

더 많은 시선들이 쏟아진다.

더 많은 관심이, 더 진한 흥미를 담은 눈빛이 한 청년을 향해 날아든다.

이름은 모른다.

출신도 모른다.

아단 왕국 사람은 아니었다. 사교계에 발이 넓은 몇몇 부인들조차 청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누군지 아는 건 요셉 관주를 비롯한 소수의 검사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조차도,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천천히 다가오는 금발의 청년을 보며, 조슈아 린제이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허나 기세를 뿜어내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멈추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놈, 평소보다 훨씬 멀끔한데?’

옷차림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걸음걸이, 표정, 미소, 예법.

그야말로 아단의 교양 넘치는 귀족으로 변신한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일리아 린제이 앞에서 우아하게 예를 표하며 물었다.

“레이디 일리아 린제이. 부디, 그대와 어울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예상한 것과 완전 다른 모습으로.

허나 여전히 친숙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친구를 보며,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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