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감히 (3)
“흘흘.”
조슈아 린제이의 출현에 요셉 관주가 기껍게 웃었다.
원래 계획은 빌 스탠튼을 부추겨 아이른이 검을 꺼내게 한 뒤, 또 한 번 중재하는 척 자신이 끼어드는 거였다.
아무리 스탠튼의 망나니가 뛰어난 유망주라 한들, 다른 이도 아닌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끌어 내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대륙의 10대 검사인 조슈아 린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기왕이면 한계까지 몰아붙였으면 좋겠군.’
오러 소드를 뽑아냈던 잠깐의 순간, 요셉은 느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실력이 지난 1년간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말이다.
집중과 발현을 비롯한 오러 운용의 매끄러움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만에 가득 찬 빌 스탠튼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르신.”
“왜 그러나?”
“알면서 그랬죠?”
“뭘 말인가?”
“저 사람, 소드마스터라는 거 알고서 저 충동질한 거 아닙니까?”
“뭐, 내가 강요라도 했나?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선택은 자기가 했으면서 왜 남 탓을 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사고치고, 남 탓이나 하고 다니니까 망나니라는 별명이 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요셉 검술관의 검사,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 스스로를 망나니라고 하는 빌 스탠튼이나, 그런 그를 골탕 먹이려 했던 요셉 관주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고 애가 되신 느낌이야.’
물론 그런 둘에게 신경 쓰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조슈아 린제이, 그리고 오러 소드를 보여 줬던 금발의 청년에게 집중되었다.
“뭐 하나. 빨리 검 들지 않고.”
“저기, 잠시만, 잠깐 말 좀 하게 해 주세요.”
“유언인가?”
“아니, 유언이라니 그게 무슨…… 제가 뭐 잘못한 건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했지 않나. 일리아가 목적이면서, 괜히 내 생일 핑계를 댔지.”
“아니, 물론 일리아 보러 온 것도 맞지만…… 그, 생신 축하를 위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선물이라도 준비해 왔겠지?”
“…….”
아이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저렇게 나오니 더는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등과 이마에서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런 그를 도와준 것은 동생이었다.
“당연히 있죠, 여기, 가주님을 위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랍니다.”
쑤욱
키릴 파레이라가 요술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값비싼 와인이었다.
나중에 랜스 페터슨과 분위기 좋을 때 마시려고 구해 놨던 건데, 오빠를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했다.
하인으로부터 물건을 건네받은 가주가 병을 살폈다.
‘……내가 좋아하는 거네.’
이번에는 조슈아 쪽이 할 말이 궁해졌다.
사실 지금까지 한 말도 전부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1년이라는 기한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 아이른 녀석이, 자기 딸의 관심을 독차지해 버린 저 녀석이 괘씸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었을 뿐이다.
그렇다.
기왕 억지 시비를 걸었다면, 주변 눈치 볼 거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맞았다.
표정을 굳힌 그가 금발 청년을 보며 말했다.
“아이른.”
“예.”
“내가 말한 숙제, 잊지 않고 있나?”
“……예.”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넷의 불길에 휩쓸리지 마라. 조급함에서 벗어나 네 페이스를 유지해라.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었다.
다소 방황하긴 했지만, 지금의 성장은 모두 조슈아 린제이의 이 조언에서 시작했다.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본 조슈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건넨 조언은 머리로 알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
즉, 아이른이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던진 질문이었다.
헌데 표정이 굳은 가운데도 꽤 자신감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흥미가 생겼다.
그는 사랑하는 딸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검을 사랑하는 검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
“여전히 부족하지만, 전보다는 성장했다고 자부합니다.”
“증명할 수 있나?”
“증명할 수 있습니다.”
“좋아. 장소를 바꾸지. 안으로 들어와라.”
“예, 가주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몸을 빼던, 유약한 인상의 청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굳센 의지를 보이는 젊은 영웅이 대신했다.
조슈아 린제이의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딸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넘어,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던 인물이 순식간에 거장의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몹시 진지하기 그지없는 상황.
관주를 비롯한 요셉의 검사들은 강한 흥미를 느끼며 둘의 뒤를 따랐고, 키릴과 루루 역시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린제이 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무지 재밌겠구만.”
빌 스탠튼도 마찬가지였다.
요셉 관주에게 골탕먹을 뻔했다는 사실은 이미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자신이 딱히 손해 본 것도 없는 데다가, 대륙의 10대 검사로 알려진 조슈아 린제이의 검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 또한 이그넷 크레센시아, 일리아 린제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 중의 천재 아닌가!
철부지 귀족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신은 뭔데 따라와요?”
바로 키릴 파레이라였다.
“뭐냐니. 린제이 가의 손님으로서 린제이 가에 방문한 것이 잘못인가?”
“그건 아는데, 그러면 안내를 받아 숙소로 가면 되잖아요. 대련 당사자들하고 관계도 없으면서 왜 따라오냐고요.”
“따라가면 안 되나?”
“안 돼요.”
“당사자에게 허락을 받아도?”
“가주님께 물어보려고요?”
“아이른 파레이라 공에게 물어보려 했네만.”
“거절이라고 전해 달래요.”
“앞서 일은 미안하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꾸는 걸 보니 더 싫어지네요.”
“아니야. 잔칫집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나타난 건 여전히 실례라고 생각하고 있어. 물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무례를 표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겠네. 원한다면 고개도 숙이고, 성의도 표하지. 이래도 안 되나?”
“안 돼요.”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네가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랑 같은 곳에서 대련을 구경할 생각은 없는데.”
키릴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빌 스탠튼을 노려봤다.
세자르 공국에서도 몇 번 느꼈던 분위기다.
몇몇 고압적인 귀족들은 자신과 말다툼을 벌인 뒤,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면 꼭 이렇게 협박성 말을 던지고는 했다.
허나 그런 것에 굴할 그녀가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하든, 배로 갚아 주마.’
의지를 다진 키릴은 언제라도 빌 스탠튼의 수작질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감각을 끌어올렸다.
허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만약에, 나를 검술 구경에서 배제할 생각이라면, 나는…… 생일 연회 당일, 당신에게 고백할 생각이네.”
“뭐?”
“사람이 아주 많은 곳에서.”
“어?”
“큰 소리로. 모두가 쳐다볼 수 있도록 온갖 부끄러운 미사여구로 그대를 띄워 주며.”
“…….”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겠네.”
“그게 무슨 미친…….”
“나는 이것을 고백 공격이라고 이름 붙였네.”
“키릴, 이 사람 이상해…….”
루루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가 질린 눈으로 빌 스탠튼을 바라봤다.
고백으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겠다니. 고백으로 자신을 공격하겠다니.
이렇게 황당한 공격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빌 스탠튼의 모습을 떠올리니, 벌레 수십 마리가 몸을 기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처할 방법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질색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지 마세요.”
“대련 구경은?”
“허락할게요.”
“고맙네.”
씨익 웃은 빌 스탠튼이 휘파람을 불었다.
둘의 대화를 엿듣던 요셉의 검사들이 미친놈 보듯 그를 쳐다봤다.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슈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미 서로에게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한 가주가 검을 빼 들었고, 아이른 역시 요술대검을 소환했다.
찬란한 금빛의 검을 본 검사들이 또다시 감탄을 터뜨렸다. 세상 어느 명검보다도 우아하고,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허나 그러한 감상은 조슈아 린제이가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내자 완전히 뒤바뀌었다.
우우우우우웅-!
은색의 광휘에 휩싸인 검.
성스러운 아빌리우스 기사들의 것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오러 소드를 보며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 아이른 역시 기운을 끌어올렸다.
하늘 높이 솟구친 두 빛줄기가 성장을 멈추는 순간.
타앗
탓-!
대련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앙!
연무장의 정중앙에서 격돌한 둘이 힘 싸움을 벌였다.
쩌저적, 연무장에 균열이 일었다. 어마어마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바닥이 쿠키처럼 부서졌다.
이 때문에 아이른이 살짝 균형을 잃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조슈아의 검이 질풍처럼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또다시 터져 나오는 굉음!
아이른은 힘을 거스르지 않았다.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듯 공격권에서 벗어난 그가 자세를 잡았고, 조슈아는 흐름을 타고 공세를 이어 갔다.
전후좌우, 어지럽게 방향을 바꿔 가며 검격을 쏟아 내는 그의 모습이 마치 광풍과도 같았다.
“…….”
빌 스탠튼은 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명불허전이었다.
영웅의 피를 이은 린제이 가주의 검술은 그야말로 하늘을 지배할 듯 고압적이고 위력적으로 상대를 찍어눌렀다.
허나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그런 무지막지한 연격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이 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콰앙!
캉!
카가강!
귀청이 떨어질 듯한 금속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검의 폭풍.
허나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아이른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강철의 기운을 통해 중심을 세우고.
도도히 흐르는 물의 기운으로 공격을 걷어 낸다.
바람의 결에 정면으로 맞선다면 필패겠지만, 흐름에 순응하여 빗겨 내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흘려내고, 흘려내고, 흘려낸다.
도저히 흘려낼 수 없을 때는 무쇠처럼 강건한 기운으로 버텨 낸다.
상대 역시 찌르르 울리는 충격에서 벗어날 틈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재빨리 균형을 회복한다.
그렇게 1분, 2분.
이윽고 5분의 시간이 지난다.
“…….”
빌 스탠튼도.
검술관의 검사들도.
심지어 요셉 관주도 입을 다물고 관전을 이어 갔다.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듯 모두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찰나.
두 발 뒤로 물러선 조슈아 린제이의 검에서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저건!’
요셉 관주가 눈을 부릅떴다.
단순한 오러 소드를 넘어, 마룡왕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던 바람의 힘을 구현한 공격.
위력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회전력에 휘말린 상대는 제대로 검을 잡을 수조차 없게 된다.
형편없이 찢어진 손아귀를 부여잡은 채 저 멀리 날아가는 자신의 검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꼴이 된 검사들이 여태껏 얼마나 많았던가.
허나 아이른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번쩍-
아이른이 눈을 크게 뜨고 조슈아를 주시했다.
실전 속에서 더없이 날카로워진 감각이 요술의 힘을 극대화했다.
가주의 체내에 흐르는 오러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판단이 섰다. 완성된 하늘검은 자신이 막아 낼 수 없다. 그 전에 막아 내야 했다.
결정을 내린 아이른이 오러를 운용했다.
퍼엉, 펑, 퍼벙!
단순히 빠르게 끌어올린 게 아니었다.
몸속을 흐르는 오러를 불의 기운을 통해 폭발시키고, 또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가속에 가속을 더한다.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속도를 추구한다.
원래라면 신체가 엉망진창이 될 만한 위험한 기술이었지만, 괜찮았다.
물의 기운을 적절히 사용한 덕분에 한 번 정도는 부작용 없이 검을 내지를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정도면 거뜬했다.
순식간에 뻗어 나간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완성 직전의 하늘검을 향해 무겁게 꽂혔다.
꽈아아아아아앙-!
굉음.
그리고 정적.
격돌 이후 스무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아이른에 비해, 가주는 고작해야 세 걸음을 후퇴했을 뿐이다.
허나 젊은 청년의 약세를 비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셉 관주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