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감히 (2)
요셉 검술관주.
일곱 번째로 영광스러운 ‘요셉’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는 대륙 서부의 소드마스터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평가받는 실력자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잠잠하지만,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왕성한 대련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만방에 알렸던 싸움꾼이기도 했다. 마인 토벌 경험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요셉이었기에, 웬 젊은이들이 대 린제이 가문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동요할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중 한쪽이 아단 왕국의 유명한 푼수인 빌 스탠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의 생각은 묘령의 처자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청년을 보고 완전히 뒤바뀌었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듯 화사한 금발.
딱 봐도 선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표정과 눈빛.
그에 비해 완벽하게 균형 잡힌, 엄청난 단련으로 빚어져서 강건해 보이는 육체.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아이젠마르크트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으니.
허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1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요셉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당시의 검투 경기였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싸움을 거쳐 온 요셉이다.
강자라고 거들먹거리는 존재들과 수없이 많이 싸워 왔고, 마스터들과의 흉험한 대전도 숱하게 치러왔다.
그런 그조차 주먹을 불끈 쥐게 할 정도로, 일리아 린제이와 저 청년의 검투는 박진감 넘치고 처절했다.
크로노 검술관의 수석과 차석이라는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
나이를 초월한 둘의 실력과 투지가, 80살 노인의 피를 오랜만에 끓게 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저 청년을 여기서 볼 줄이야.’
요셉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아이젠마르크트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그의 향후 행방에 대한 추측이 서부 대륙을 휩쓸었다.
허나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최근까지 조용하기 그지없었던 아이른이다.
때문에 지금의 우연한 만남이 더욱 반가웠다.
“흥.”
“허.”
“하.”
“훗!”
물론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잿빛 머리칼의 사내, 빌 스탠튼과 키릴 파레이라의 유치한 싸움은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야?’
결국, 보다 못한 요셉 검술관의 인물 하나가 둘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스탠튼 가의 망나니, 빌 스탠튼에게 다가갔다.
알고 있었다. 그가 악독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성격 탓에 시비를 몰고 다니는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의 다툼 역시 빌 스탠튼의 잘못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네, 적당히 하게. 빨리 숙녀분께 사과해.”
“아, 안톤 씨. 오랜만입니다. 아니, 그런데 뭡니까? 사정도 듣지 않고 나한테 뭐라 하기 있습니까?”
“꼭 들어야 아나? 자네 잘못이겠지.”
“맞아요. 저쪽이 저희한테 무례하게 굴었어요.”
“하, 참. 나 어이가 없어서…….”
키릴의 말을 들은 빌 스탠튼이 황당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문지기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요셉 검술관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호위들조차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사탕 뺏긴 아이처럼 억울한 표정이 된 그가 요셉 검술관의 인물, 안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잘 들어 보십시오.”
“듣고 있네.”
“내일모레가 무슨 날입니까. 대 린제이 가문의 가주, 조슈아 린제이 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날이 아닙니까.”
‘그렇구나. 그래서 사람이 많았구나!’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여전히 의문스럽긴 했다. 칼 린제이의 실종 이후, 린제이 가문에서 연회를 벌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들었으니까.
‘좋게 생각하면, 그때의 아픔이 많이 가셨다고 봐도 되는 걸까?’
어쩌면 자신의 친구, 일리아 린제이가 옛 상처를 극복한 덕분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도 조금이지만 들었다.
그러자 기쁨의 감정이 피어났다.
당장이라도 영주성으로 들어가 일리아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요? 그거랑, 그쪽이 지나가면서 우리 비웃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물론 키릴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여전히 황당한 상태였다.
먼저 시비를 걸었으면서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답은 금방 나왔다.
눈매를 찌푸린 그가 기분 나쁜 손짓으로 키릴을,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 있는 아이른을 가리켰다.
“무려 8년 만에 외부 손님의 방문이 허락된 기쁘기 그지없는 날에, 이런 후줄근한 복장으로 린제이 가의 문턱을 넘으려고 하다니.”
“…….”
“아단 왕국을 대표하는 교양 있는 귀족으로서, 차마 그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 스탠튼의 대답을 들은 요셉 소속 검사, 안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물론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안톤이 보기에도 키릴, 아이른 쪽의 복장은 너무 편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털이 많이 날리는 고양이까지 어깨에 얹고 있으니, 예민한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고, 시비를 거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중재해야겠어. 저 인간 말대로 오랜만에 열린 린제이 가의 연회인데,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수는 없지.’
적어도 대문 앞에서 계속 싸우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금발 처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밝은 빛과 함께 그녀의 복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화아아악-!
활동하기 좋은 평상복은 온데간데없고,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붉은색이 매력적인 드레스 차림이 된 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빌 스탠튼이 입을 벌렸다.
“어, 어…….”
“이제 문제없지?”
“…….”
“겉껍데기로만 평가하면 이젠 내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그쪽은…… 에휴, 말해서 뭐해.”
“이, 이게…….”
“아니, 겉모습만이 아니지. 귀족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외관에만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는 내면도 아름답게 가꾸는 걸 추천드릴게요. 가자, 오빠.”
“잠깐 기다려라.”
아이른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는 키릴을, 빌 스탠튼이 가로막았다.
꽤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잔뜩 흥분해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탓에 못난 사람처럼 보였다.
‘진짜 못났다.’
속으로 생각한 키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요?”
“어…….”
빌 스탠튼이 고민을 이어 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저쪽이 1의 실례를 범했으면, 자신이 3~4의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와서 사과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짧은 코웃음으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뭣보다, 그 이후에 쏟아진 이 여자의 매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짜증 났다.
‘어떻게든 귀족적인 방법으로, 내 체면이 상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일이 막 커지지는 않는 한도 내에서 내 기분을 풀 방법이 없을까? 아니, 그런데 이러다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또 혼날 텐데…… 아니, 그리고 지금 다시 보니 엄청 예쁘잖아? 이거 어떻게 관계 개선할 방법이 없나? 아! 그렇다고 내가 지고 들어가긴 또 싫은데!’
이런저런 상념이 빌 스탠튼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그때, 지금껏 점잖게 있던 요셉 관주가 불쑥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네.”
“어? 관주님?”
“……?”
“아, 미안하네. 소개가 늦었군. 나는 요셉 검술관의 주인인 요셉이라고 하네.”
“……안녕하세요. 키릴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키릴이 약식으로 예를 표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는데 망나니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요셉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소드마스터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너무 흥분했네. 일리아 언니랑 오빠를 이어 주러 온 마당에,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됐는데.’
뒤늦게 반성의 마음이 올라왔다.
키릴이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화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젠 물러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 요셉이 직접 나서서 중재하는데 계속해서 고리눈을 뜨고 있을 수는 없었다.
헌데, 요셉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양쪽이 다 어느 정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대로 어정쩡하게 헤어지면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그런데, 깔끔하게 검술 대련 한번 치르고 기분을 푸는 것은 어떤가?”
“예?”
“아?”
“아, 물론 키릴 양에게 나서라는 건 아닐세. 뒤에 있는 청년? 자네, 키릴 양의 오빠지?”
“네? 아, 네.”
“검사기도 하고.”
“……맞습니다.”
“어때. 여동생을 위해 대신 검을 들 생각은 없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상황을 지켜보던 빌 스탠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보다 조금, 아주 조금 사고를 많이 치는 바람에 31살 먹은 지금까지도 철이 덜 들었다는 소리를 듣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평가와는 달리 검술만큼은 동년배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검술로 유명한 아단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망주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단련한 느낌의 몸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곧 엑스퍼트도 되지 못했을 거란 뜻이었으며, 자신의 상대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다 한들 약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를 수는 없는 법.
그는 요셉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피식
하지만, 절묘한 시점에 터진 키릴 파레이라의 비웃음.
그것이 빌 스탠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저쪽이 동의한다면, 그렇게 하죠.”
“허허, 패기 넘쳐서 좋구만. 그쪽 청년,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오빠, 보여 줄 거지?”
“어? 어, 어…….”
“관주님?”
순식간에 성사된 두 청년의 대련에, 뒤에서 멀거니 서 있던 요셉 검술관 검사들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말리기는커녕 싸움을 부추기는 관주라니, 평소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미안하네, 빌.’
미소를 지은 요셉이 빌 스탠튼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현재 실력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그가 검을 뽑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 정도의 재능이라면…… 지난 1년 사이에 또 엄청난 성장을 거뒀을 수도 있지. 이거, 흥분돼서 못 참겠구만.’
요셉 관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자신의 싸움이 아닌 남의 싸움.
그것도 젊은이의 싸움을 기다리며 흥분을 느꼈던 게 얼마 만이던가!
80세 노인은 오랜만에 찾아온 고양감에 주먹을 불끈 쥐며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검을 빼든 빌 스탠튼이 아이른에게 경고했다.
“나는 빌 스탠튼. 스탠튼 가문의 한 마리 고독한 늑대이자, 장차 아단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잿빛의 검사.”
“…….”
“겁먹지 마라. 손속에 사정을 둘 터이니. 자기소개는 멀었나?”
“……헤일 왕국 출신,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그래. 미리 경고하마. 사정을 봐주긴 하겠으나, 나의 검은 원체 강하고 빠르다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전심전력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약속해라. 전력을 다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좋아. 아! 그러고 보니 검이 없군. 이봐, 저 청년에게 검을…….”
그가 호위에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슈슉-!
대련 상대, 아이른 파레이라의 손에서 황금색 대검이 자라났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빌 스탠튼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우웅-!
황금색의 검날을 뒤덮는 황금빛의 기운.
누가 봐도 착각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찬란한 오러 소드를 목도한 그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아이른의 뒤편에 둥둥 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날아다니는 고양이?’
‘아이른 파레이라?’
‘허공에서 자라난 검…….’
‘헤일 왕국?’
“아!”
뒤늦게 맞춰진 퍼즐 조각들.
배신감에 부르르 몸을 떤 빌 스탠튼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요셉 관주에게 시선을 돌릴 때였다.
“겁도 없군.”
저벅저벅
어느새 열린 린제이 가의 대문.
그곳에서 중년의 사내가 검을 들고 다가왔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은발.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만드는 압도적인 분위기.
평소보다 더욱 날이 선 느낌의 조슈아 린제이가, 빌 스탠튼을 무시한 채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에 섰다.
그가 말했다.
“많이 컸구나, 아이른. 감히 린제이 가의 앞에서 오러 소드를 세우다니.”
“저기, 저…… 생신, 생신 축하드립니다.”
순식간에 검을 거둔 아이른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조슈아 린제이의 시선은 여전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내며, 그가 물었다.
“진짠가?”
“예?”
“내 생일을 축하하러 온 거, 진짜냐고.”
“예! 당연히…….”
“그게 아니라, 내 딸을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
“…….”
“…….”
“검을 들어라, 아이른.”
“저기, 잠깐…….”
당황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황당해하는 키릴 파레이라.
그들 주변을 안절부절못하며 날아다니는 루루.
그리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빌 스탠튼.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요셉 관주가 남몰래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게 됐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