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39화 (239/388)

◈ 81. 감히 (1)

초여름의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선선한 새벽.

아직 어둠조차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이른 시간에, 제2 악마토벌대가 조용히 숙소를 나섰다.

배웅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그들 대부분은 은퇴해서 세상에 잊힌 존재들. 대중의 환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보다 오래 묶여 있긴 했지.’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 필요한 일이었다.’

‘현재는 우리에게 맡겨라. 미래는 너희들만 믿으마.’

오히려 영지를 나서는 노기사들의 얼굴엔 좋은 기분이 감돌았다.

향후 수십 년, 어쩌면 100년은 대륙을 지탱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재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브랫 로이드.

그들이라면 홀로 바삐 움직이던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토벌대원들의 가슴속에 희망이 가득 들어찼다.

그때, 말없이 영주성을 빠져나가던 퀸시 마이어스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누구 말이라고 따르지 않을까.

토벌대원들은 대장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지의 작은 연무장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이가 보였다.

이름도 알고 있었다. 랜스 페터슨이라는 청년이었다.

‘꽤 훌륭한 인재이긴 하지만…….’

‘둘 때문에 눈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가, 크게 감흥은 없군.’

‘헌데 대장께선 어찌하여…….’

노기사들의 눈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고위 사제들은 더했다.

분명 응원해 주고픈 청년이지만, 갈길 바쁜 대장의 걸음을 멈춰 세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퀸시 마이어스는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랜스 페터슨을 지켜봤고, 돌아서는 순간에도 대원들이 놀랄 만한 말을 내뱉었다.

“확실히 이번 세대에는 인재가 많아.”

“…….”

“이제 가지.”

“예.”

최고위 사제 다린 홀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청년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빌리우스의 최고령 기사이자 두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하는 말이다. 사제인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은 로이드 영지를 완전히 벗어났고.

랜스 페터슨은 토벌대가 자신을 지켜봤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휘익-!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아이른 파레이라에 비해 못났고.

휘이익-!

브랫 로이드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헌데, 이상하게 마음이 괜찮았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편안한 상태였다.

‘오크 상담사의 조언 때문일까?’

잠시 검을 멈춘 랜스 페터슨이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갑작스레 등장해 맥주 세 잔을 얻어먹고 사라진 정체불명의 오크.

당시에 나눴던 대화 내용을 상기하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릴 파레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면 얘 때문일까.’

“…….”

잠시 고민하던 랜스가 재차 검술에 매진했다.

잘 모르겠다.

사실 완전히 떨쳐 낸 것인지도 불확실했다.

오늘 괜찮더라도 내일 괜찮지 않을 수 있었다.

올해 괜찮더라도 내년에는 자괴감 속에 허우적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버텨 내고 나아갈 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생겨났다는 점일 터였다.

어찌 됐건 자신은 나아가고 있고.

힘겹고 괴롭더라도 걸음을 멈출 일은 없을 테니까.

뒤돌아보면 언제 이렇게 많이 왔지 싶을 정도로 먼 거리를 헤쳐 왔다고, 그렇게 느낄 테니까.

휘익!

휘이익-!

고개를 끄덕인 랜스 페터슨이 검을 휘둘렀다. 계속 휘둘렀다.

그런 그의 모습을, 키릴 파레이라가 한참이나 곁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스르르륵……

오랫동안 랜스의 주변을 맴돌던 어둠이,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처음 접근했을 때보다도 더욱 은밀하게. 악마토벌대의 시선조차 피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 * *

햇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6월 초.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로이드 영지를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 채비를 갖췄다.

브랫 로이드와 랜스 페터슨을 비롯한 인물들이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 로이드 영주가 말했다.

“고마웠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영지 근처에 악마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뻔했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이른이 겸손하게 말했다.

토벌대 합류를 미뤘다고 해서 악마를 외면할 일은 절대로 없었다.

앞으로도 자신의 앞에 마(魔)가 나타난다면 전심전력으로 해치울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른 앞에, 브랫 로이드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긴장해라.”

“……?”

“내가 어디까지 성장해 있을지, 나조차도 알기 힘들 정도니까. 큭큭큭…….”

“…….”

“……재미없었나?”

“브랫.”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사과가 빨라서 좋구나.”

“별말씀을.”

아이른이 뒤늦게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브랫이 아니라 브랫 어머니가 더 재미있었다. 허나 지금 웃으면 브랫의 말에 웃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시선을 돌린 그가 랜스 페터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힘찬 악수를 나눈 둘은 별말 없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안녕! 나중에 또 올게!”

“저도요. 잘 챙겨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루루와 키릴이 뒤이어 작별의 말을 건넸다.

키릴의 경우는 랜스 페터슨 쪽을 향해 몰래 눈인사도 보냈는데, 이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눈치 없는 아이른조차도 알 정도였다.

‘동생이 누군가에게 저런 모습 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

보고 싶은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마지막으로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잘 가게.”

깔끔한 배웅을 뒤로한 아이른 일행이 그리핀의 등 위에 올라탔다.

힘찬 날갯짓,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비행.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브랫 로이드가 중얼거렸다.

“빨리도 가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

그리고 아이른의 친구.

하지만, 나중에는 조금 다른 관계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인물.

그녀를 떠올린 그가 조용히 생각했다.

‘너희도 슬슬 다음 단계로 가야지?’

물론,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둘 다 워낙 답답한 성격이지 않은가.

“뭐…… 그것도 나름 보는 재미는 있겠네.”

“아들아, 뭐라고?”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고개를 저은 브랫이 하늘을 쳐다봤다.

아이른이 날아간 방향이 아니었다.

주디스가 있을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한 번 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 * *

그리핀의 등 위에 올라탄 아이른 일행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륙 서부, 아단 왕국을 향해 날아갔다.

키릴의 말에 의하면 나흘이면 도착할 예정이라는데, 일반적으로 중부에서 서부까지 이동하는 데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예전보다 훨씬 빠른 것 같은데.’

어쩌면 악마와의 싸움을 통해 동생도 한 걸음 더 성장한 걸지도 모른다.

맑은 미소를 지은 아이른이 이번에는 자신에게 집중했다.

평소 자주 하던 심상 수련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직관적인 것.

검사의 기본은 아니지만, 엑스퍼트와 마스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

바로 오러 운용이었다.

우웅

우우웅

우웅-

아이른의 대검에 황금빛이 명멸했다.

최대한 빠르게 오러 소드를 뽑아 내고 거두어들이는 훈련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도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필요했다.

‘오러의 총량이 우리처럼 넉넉하다면 조금 낭비가 있어도 괜찮겠지만, 네 녀석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신성왕국의 검술을 실전에서 사용하고 싶다면 오러 소드 활용에 있어서 더 깔끔하고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한 퀸시 마이어스는 그를 위한 여러 훈련법을 알려 줬는데, 하나같이 만만한 것이 없었다.

브랫은 물론이고, 아이른조차도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의 아이른은 예전과 달랐다.

이그넷과 마주했을 때의 열정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그로 인한 조급함이 넘치지 않도록 균형을 이룬 상태.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무리 없는 마음가짐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른의 곁에 있는 둘 역시, 전과는 달리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른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항상 지금 같았으면 좋겠어!’

‘이대로는 안 돼. 이번에는 조금 더 진전이 있어야 하는데.’

허나 그를 바라보는 루루와 키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확히는 키릴이 오빠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일리아와의 관계였다.

처음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하지만 서로의 성격 때문에 쉬이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이 상태로도 재미있긴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진짜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수도 있단 말이지.’

키릴이 생각하기에, 일리아 린제이는 어디서도 찾기 힘든 괜찮은 사람이었다.

깐깐한 자신의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능력도, 외모도, 성격도 훌륭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오빠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오빠 역시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고, 그렇다면 자신이 조금 부추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빠가 먼저 보러 가자고 말해서.’

키릴이 훈련에 열중하는 아이른을 쳐다봤다.

이 둔한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자각하고, 행동하게 만들려면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허나 문제는, 키릴 역시 연애에 있어서는 초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녀는 린제이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오히려 찝찝한 기분만을 가득 품은 채 린제이의 영주성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키릴, 안 좋은 일 있어?”

“없는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몰라. 묻지 마.”

“으응.”

루루가 대답했고, 아이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동생을 쳐다봤다.

그런 오빠의 시선을 느끼며 키릴이 황당한 마음을 품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아니, 진정하자.’

그녀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오빠를 위해 고민하는 건 좋지만, 그게 잘 안 풀린다고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 된다.

항상 제멋대로인 세자르의 망나니였지만, 린제이 가문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웃자.

일단 방긋방긋 웃고 있자.

그렇게 마음먹은 키릴은 어딘가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루루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맨 뒤에서 아이른이 푸근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문제는 영주성의 앞에 도착했을 때 벌어졌다.

“뭐지?”

“마차가 세 대나?”

아이른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문앞에 대기하고 있는 세 대의 마차.

아무리 린제이가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이라지만, 이렇게 손님이 많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칼 린제이와 이그넷의 대련 이후 가주의 성향이 폐쇄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가문에 뭔가 일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또 한 대의 마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린 잿빛 머리칼의, 30세 전후로 보이는 귀족 남성이…….

피식

아이른 일행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지나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

아이른의 시선이 곧바로 키릴 쪽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동생은 이런 걸 참을 정도로 둥근 성격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귀족 남성을 노려보던 그녀에게서.

“하.”

커다란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호위와 함께 움직이던 사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

귀족 남성이 키릴을 쳐다봤다.

키릴 역시 지그시 그를 노려봤다.

갑자기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속, 아이른과 루루가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피식

귀족 사내가 전보다 더 진한 비웃음을 보였다.

“흥.”

키릴도 지지 않았다.

직전의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지나가던 사람조차 돌아볼 정도로 우렁찬 코웃음.

이를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사내가, 지지 않겠다는 듯 육성 웃음을 터뜨렸다.

“하.”

“허.”

“훗.”

“흥.”

“…….”

“…….”

“…….”

아이른 일행도.

귀족 사내를 호위하던 이들도.

가문의 문지기들도 이 유치한 신경전에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도착한 요셉 검술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들은 이내 이해 간다는 표정으로 한마디씩을 중얼거렸다.

“스탠튼의 망나니가 또 시비를 걸었나?”

“린제이 가 바로 앞에서도 저럴 줄이야.”

“나이가 30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저럴 건지…….”

모두가 혀를 차며 귀족 사내를 비난했다.

상대의 잘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아니 애초에 상대 쪽에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허나 검술관의 주인인 소드마스터 요셉은 달랐다.

눈을 가늘게 좁힌 그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생각했다.

‘뒤에 서 있는 저자, 증명의 땅에서 봤던 그 청년이 아닌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