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증명의 시간 (5)
“…….”
랜스 페터슨은 자신 앞에 앉은 오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마 ‘오크 점술사’라고 소개했더라면 바로 쫓아냈을 터였다. 그는 점술 같은 것을 믿지 않으니까.
브랫에게서 두르칼리에서 있었던 일을 듣긴 했지만, 그만큼 용한 점술사가 대륙을 떠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나 ‘오크 상담사’라는 칭호가 랜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 그의 심리를 꿰뚫었음인가.
얼굴에 문신이 덮인 오크가 맥주 한 잔을 주문하며 말했다.
“솔직히 인간 세상을 떠도는 자칭 점술사 오크 녀석들, 죄다 돌팔이야. 정령의 기운이니, 사주니, 오행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말만 쏟아내고 실속은 없지.”
“그쪽은 실속이 있습니까?”
“나? 나도 실속 없지. 애초에 실속 있는 상담은 거의 없어. 하하하.”
크게 웃은 오크가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순식간에 잔을 비워 버린 그가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한 뒤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속에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이지.”
“…….”
“나는 점술사 녀석들처럼 미래를 알려 준다거나, 삶의 목표를 잡아 준다거나 하는 거창한 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잠시 스쳐 지나갈, 그래서 부담 없이 고민 털어놓기 편한…… 그런 말상대 정도라면 가능한데.”
어떤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가로 딱 맥주 두 잔.
오크 상담사의 말을 들은 랜스 페터슨은 꽤 오래 침묵을 지키다가, 옅은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친구들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술기운에 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크의 말대로 앞으로는 엮이지 않을 인연이기 때문일까.
랜스는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번 물꼬를 트자 좀스러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부분까지 빠짐없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랜스가 당혹스러운 마음을 품었다.
허나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말을 다 쏟아 내고 나니 생각보다 속이 후련했다.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가 오크 점술사, 아니 오크 상담사를 쳐다봤다.
자신보다는 훨씬 긴 삶을 살았을 저자는,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조언을 해 줄 것인가?
“별 문제 없는데?”
“예?”
“괜찮게 살고 있다고. 그렇게 죽상 쓰고 있을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
“아, 너무 쉽게 말해서 기분 나빴나? 미안하네. 그럴 의도는 없었어.”
“……아닙니다.”
“아니긴 뭘. 미안하다니까.”
오크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랜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자신에게 있어선 인생의 회의감이 들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였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그냥 보자마자 쫓아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허나 오크 상담사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두 번째 잔마저 순식간에 비워 버린 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별문제 없어 보인다는 말은 진심이야.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자네의 꿈은 최고의 검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저 즐겁게 검을 수련하고…… 그 와중에 가족에게, 스승에게, 주변인들에게 있어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족하다고, 분명 자네 입으로 말한 것 같은데.”
“그건…….”
“알지, 알아.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괴롭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 아닌가?”
“…….”
“사실 그건 대부분이 똑같네.”
잔을 내려놓은 오크가 주변을 돌아보며 여러 사람들을 가리켰다.
바쁜 모습으로 주문을 받는 종업원, 근심 가득한 얼굴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주점 주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침까지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하는 손님들.
“저들 모두가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지.”
“…….”
“아마 자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자네가 부러워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방금 말한 친구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어.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더라도, 위에는 또 위가 있는 법이니까. 최고의 자리에 올라도 똑같아. 다른 분야에선 여전히 최고가 아닐 거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나? 다 똑같다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간에, 누구의 마음속에나 열등감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음, 조금 말을 정정하지. 그게 별거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 정도 아픔은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살아간다는 거야.”
“그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오크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깊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엑스퍼트에 가까운 랜스 페터슨조차 순간적으로 압도될 만큼 강한 눈빛.
그 상태 그대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힘든 나날에도 불구하고, 다들 꾸역꾸역 버텨 내고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지.”
“…….”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게. 그리고 5년쯤 전의 자네를 떠올려보게.”
“…….”
“자네는 그 기간 동안 멈춰 있었나? 아니면 앞으로 나아갔나?”
“……나아갔죠.”
멈춰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정말이지 끔찍했으니까. 생각도 어렸고, 검술은 봐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브랫에게 말을 놓는 것조차 어려워할 지경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다시 묻지. 그때는 지금처럼 힘든 일이 없었나?”
“……있었죠.”
이 역시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도 지금과 비슷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남들 없는 곳에서 화도 많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실력에 악을 쓰다가 지쳐 쓰러졌던 날도 있었고.
그런데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멈춰 있는 자신을 내버려 둔 채 저 멀리 떠나가는 친구들의 모습에, 자기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결국 자네는 버텨 냈지. 그리고, 과거보다 훨씬 앞선 곳까지 도달했어.”
“…….”
“남보다 못한 모습에 상처받고, 좌절하고, 고통받고…… 그러면서도 결국 멈추지 않고 나아갔잖나?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는데,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건 뭔가?”
오크 상담사의 물음에, 랜스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쉬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본 친구들은, 자신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친구들은 자신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자신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찬 나날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랬듯, 그들 역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안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맥주 두 잔 값은 치르겠습니다.”
“그래? 휴, 다행이군. 사실 걱정했어. 표정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이야. 꼼짝없이 내가 낼 줄 알았거든. 사실 지금까지 한 조언이 다 헛소리기도 하고.”
“……?”
“왜 그런 표정으로 보나? 내가 지금까지 한 말 다 헛소리 맞아. 잊어버려도 돼.”
“아니…….”
랜스 페터슨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크에게서 나름의 위안을 받았던 그였다.
크게 뭔가를 깨달은 건 아니지만, 상대의 말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속이 후련해진 참이었다.
헌데, 지금까지의 시간을 완전히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인간의 외모를 판단하는 심미안은 없지만, 자네 분위기가 꽤 괜찮아. 체격도 좋고, 키도 훤칠하고. 아마 주변에 사람들도 많겠지. 그 사람들이 건넨 덕담과 조언들만 모아도 아마 마차 몇 대 분량은 나올 거야. 그렇지 않나?”
“…….”
“아마 그들이 해 준 말이 내 말보다 훨씬 도움 되겠지. 자네를 훨씬 깊게 생각하고 해 준 말일 테니까.”
“그럼…….”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들어 볼 텐가?”
“…….”
랜스 페터슨이 오크를 노려봤다.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에 상담사가 씨익 웃었다.
맥주 한 잔을 더 시켜서 순식간에 비워 버린 그가 말했다.
“자네 나이 때는 말이야, 연애라도 하는 게 가장 좋은 슬럼프 탈출 방법이야.”
“……뭐?”
“이상한 오크 보듯 쳐다보지 말게. 좋은 사람 만나면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여유로워져. 지금 자네처럼 별 것 아닌 일로, 아니 정정하지. 별것도 아닌 일은 아니야. 하여튼 이렇게까지 깊게 좌절할 일도 아닌 거로 혼자 동굴을 파서 들어가게 되지는 않아.”
“…….”
“연애하게. 꼭 하게. 그리고 나중에 마음의 여유가 찾아오면 지금의 고민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게. 아마 완전 생각이 달라질걸?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혼자 심각했지…… 하고 말이야.”
“……여전히 힘들다면요?”
“그건 그때 옆에 있는 연인에게 상담해야지. 그때까지 나 같은 늙다리 오크 붙들고 늘어질 셈인가?”
드르륵
오크 상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휘적휘적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랜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자식, 두 잔이 아니라 세 잔 마시고 갔잖아!’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마지막 잔은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준 비용이라 생각하게.”
“예? 그게 무슨…….”
랜스가 인상을 찡그리던 때였다.
드르륵
털썩
“…….”
“안녕하세요?”
어디선가 휙 등장한 아리따운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이는 아니었다. 아이른의 동생인 키릴 파레이라였다.
잠시 오크 쪽을 돌아보던 랜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키릴? 여긴 어떻게…….”
“알고도 모른척한 건 아니죠?”
“어?”
“나름 티 많이 냈다고 생각하는데, 반응이 없어서요.”
“…….”
키릴의 말을 들은 랜스가 눈을 꿈뻑거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지금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취해서인지, 아니면 상황이 돌발적이어서인지 잘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만나 볼래요?”
“어?”
“어? 만 하지 말고요. 나는 오빠가 마음에 들어요. 아! 왜 마음에 들었냐고는 하지 말아요. 나도 잘 모르니까. 옛날부터 그랬어요. 싫은 사람은 이유 없이 싫고, 좋은 사람은 이유 없어도 좋고. 오빠는 후자예요.”
“…….”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오빠는 나 마음에 안 들어요?”
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간 별생각이 없었다. 자기 고민에 깊이 빠져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랜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기 위해 생각을 집중했고.
키릴은 그런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 잘 모르죠?”
“…….”
“괜찮아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
“굳이 다 알고 나서 결정하지 말고, 사귀면서 알아가는 건 어때요?”
“…….”
“나는 그편이 마음에 들어서. 뭐, 정 고민되면…….”
술 조금 더 마신 뒤에, 다시 물어볼게요.
잔을 들며 싱긋 웃는 키릴을 보며, 랜스 페터슨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나쁘지 않은데?”
그런 둘을, 여전히 마법으로 위장하고 있는 필립 로이드 영주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2주일 뒤.
“루루.”
“응?”
“이제 가야겠어.”
“그래? 이제 여행 끝내고 가문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미안한데 한 군데만 더 들르자.”
“으음? 어디?”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루를 바라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렇게 말했다.
“일리아 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