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증명의 시간 (3)
‘엄중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다시는 독단적인 행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압박이 필요하겠군요. 다소 과할 정도로 말입니다.’
제2 악마토벌대의 일원이자 신성 마법의 달인, 다린 홀튼은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한들, 아직 20대 중반도 되지 않은 젊은 검사다.
마인이라면 모를까, 강대하기 그지없는 악마들을 상대로는 한참 모자란다고 판단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악마다! 아니, 악마의 잔재야!’
‘이미 토벌당한 상탠데?’
‘악마의 사후 의지가…… 도망을 치고 있다고? 이게 무슨…….’
절대로 약한 악마가 아니었다. 푸른 성수가 검붉게 변할 정도의 마기라면 평범한 마스터들은 손도 못 쓸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헌데 그런 괴물을 토벌한 것도 모자라, 겁에 질려 저주조차 걸지 못하고 도망가게 할 정도라니?
그에 대한 의문은 금세 풀렸다.
퀸시 마이어스 vs 아이른 파레이라.
둘의 대결을 지켜본 다린 홀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젊은 검사가 내렸던 판단은 옳았다고.
그의 행동은 성급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감의 발로일 뿐이었다고.
‘이미 완성됐어.’
그가 자신의 주변을 돌아봤다.
예전에 은퇴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는 정화단의 노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육신은 늙었을지언정, 그를 커버하고도 남을 막대한 오러와 신성력이 느껴진다.
그들 하나하나가 고대의 영웅들에 비견될 만한 실력자였다.
모자라지 않았다.
부족하지 않았다.
아이른이 내뿜는 분위기는, 그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단하면서도 안정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무슨 뜻이냐?”
“토벌대의 합류를 유예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제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최고위 사제 다린 홀튼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고?
누가 부족해?
저 청년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인상을 찌푸린 그가 앞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있는 성기사들은 퀸시 마이어스를 비롯해 모두 내로라할 실력을 갖춘 강자들이자, 대륙 어디를 가도 극빈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올랐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자신을 조금 낮추는 것 정도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손함이 지나치면 무례가 되는 법.’
다린 홀튼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했다. 역사에 남을지도 모를 대혼란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말장난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합류하라고 윽박지를 생각이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퀸시 마이어스가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다린 홀튼이 불같은 성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는데, 전대 적기사단장의 입에서 또다시 질문이 흘러나왔다.
“무엇이 부족한가?”
감정 없는 목소리.
허나 무게감은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토벌대에 합류하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인데, 이제는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퀸시 마이어스를, 나아가 신성왕국을 가벼이 본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은 말해야 했다.
로이드 영주와의 대담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이 가까이 있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에게 소홀했고, 부족했었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자신마저 부족해졌음을,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이상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내 주변에 더 충실할 필요가 있어.’
대륙을 구할 영웅이 되기 전에, 부모님의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
악마를 토벌할 용사가 되기 전에, 키릴의 훌륭한 오빠가 되어야 한다.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부분으로, 흐르지 못했던 방향으로 충분히 마음을 쏟은 뒤에야…… 그런 후에야 악마토벌대에 합류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한참 늦었지만, 아이른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니, 늦지 않았어.’
자기 생각을 천천히, 허나 온전히 퀸시 마이어스에게 쏟아 낸 그가 과거를 떠올렸다.
엉망진창이었고, 실수투성이었던 인생이다.
허나 되돌아보면 정말로 늦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침대에서 10년을 허비했던 뒤에도 기회는 있었고.
요술 결계에서 5년을 갇혀 있던 뒤에도 관계를 회복할 길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품은 아이른의 눈빛이, 악마토벌대의 장을 향해 강하게 날아들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유로, 지금 당장 토벌대에 합류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대신, 훨씬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콱!
땅에 대검을 박은 아이른이 검에 대고 맹세했다.
그 모습을 퀸시 마이어스가 조용히 바라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100에 가까운 정화단의 성기사들도, 비교적 젊은 70대의 다린 홀튼도, 그 밖의 고위 사제들도 젊은 후배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단, 토벌이 끝났으니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시죠. 못다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적막함을 뚫고 로이드 영주가 입을 열었다.
잠시 고민하던 토벌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그의 태도가 전보다 부드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악마 토벌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희망과 함께.
* * *
“내가 아이른을 과소평가했군.”
커다란 방 안, 토벌대원들을 슥 훑어본 퀸시 마이어스가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들의 머릿속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우리도 한 번씩은 겪었던 일이지.’
숭고한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위대한 가르침을 받들기 위해 평생을 시련 속에 살아가던 때가, 그들에게도 있었다.
허나 나중에 깨달았다.
드높은 이상에 매몰되어 현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신께서는 자신의 어린 양들이 고통스러운 나날만을 보내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고작 23살의 나이에 커다란 뜻을 품은 것도 모자라,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찾았다니.
인생을 두 번 살았다고 해도 수긍이 갈 정도로 대단한 마음가짐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할 수밖에.”
“그게 맞지.”
“애초에 그런 꼬마 손까지 빌릴 정도로 나쁜 상황도 아니야.”
늙수그레한 토벌대원들이 하나씩 입을 열었다.
물론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그들 말처럼 낙관적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치밀한 조사, 그리고 각지에서 받은 보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광대 악마의 하수인으로 추정되는 녀석들이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넓게 대륙에 퍼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와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악마들도 여럿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물론 아직까진 큰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사고를 친다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3개로 나눠진 악마토벌대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륙 각국의 지원도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이른 파레이라 정도의 전력이 토벌대에 합류한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대륙의 앞날을 책임질 후배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하는데…….’
‘한참 선배인 입장에서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지.’
노인들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느 정도 완성된 영웅인 줄 알았다.
이미 그 나이에서는 더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기에, 다음 성장은 적어도 10년은 지난 뒤가 될 거로 생각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넘어야 할 벽이 높아지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그의 성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잠재력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제2 악마토벌대 모두의 머릿속에 희망찬 생각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퀸시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누군지야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품 좋은 로이드 영주의 아들이자 크로노 검술관의 황금 기수 중 하나라 알려진 젊은 검사, 브랫 로이드.
노인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런 그들에게 깍듯하게 예를 차린 푸른 머리 청년이, 전대 적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도 대련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하룻밤 휴식 뒤에 곧바로 떠날 분께 이러는 게 무례라는 것도, 깜냥도 되지 않는 주제에 과한 부탁을 드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차 로이드가의 영주가 될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번 기회를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브랫 로이드가 숨을 고른 뒤, 계속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풀어 나갔다.
영지에 악마가 나타났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낀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누구의 앞에 서더라도 당당함을 잃지 않을 거라고 자부했던 과거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깊은 좌절감이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검술관의 최종 평가를 겪었을 때만큼 불안정한 상태였다.
물론 그때처럼 주저앉지는 않았다.
무리한 부탁인 걸 알면서도 아이른과 함께 악마의 소굴에 들어갔고, 운 좋게도 벽을 넘었다.
한계를 돌파한 이후, 하루하루 강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에 탄력이 붙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다.
“감히 토벌대에 합류하겠다는 생각까진 품지 않습니다.”
“…….”
“하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에서 영지와 영지민들을 지킬 능력 정도는, 신성왕국의 지원이 오기까지 악마를 상대로 버텨 낼 힘 정도는…… 그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올라서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상태로 말을 하던 브랫 로이드가 정면으로 토벌대장을 쳐다봤다.
평소보다 훨씬 뜨거운 눈빛.
그것은 객기도 아니었고, 조급함도 아니었다.
영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대부분의 귀족들이 잊고 있는 고귀한 가치였다. 퀸시 마이어스는 느낄 수 있었다.
“으음.”
다린 홀튼이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정도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어린 청년이 전대 적기사단장에게 직접 지도 대련을 부탁하다니. 예닐곱 살짜리 아이에게 엑스퍼트가 검술을 알려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허나 그의 그러한 생각은, 퀸시 마이어스의 말이 튀어나오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나 됐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치고 나쁘지 않군. 따라 나와라.”
“예.”
“……?”
다린 홀튼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드마스터라고?
저 어린 청년도?
이제 겨우 21살이라 하지 않았나?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정화단의 노기사들은 빙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퀸시 마이어스를 따라나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토벌대장에 비견될 정도로 늙은 성기사 하나가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고개를 끄덕인 제2 악마토벌대의 장이 브랫에게 말했다.
“가장 큰 연무장에서 기다릴 테니, 아이른과 함께 와라.”
“예, 알겠습…….”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공손히 대답하는 그의 귀에,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흘러들어 왔다.
“신성왕국의 검술을 알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