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증명의 시간 (2)
“잡아야 해!”
우우우웅-!
버럭 소리친 브랫 로이드가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마, 아니 악마의 잔재를 쫓기 시작했다.
악마조차 도망치게 했다는 뿌듯함?
그런 건 없었다.
‘녀석을 놓쳤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신들이야 악마의 저주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육체도, 정신도 강하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힘을 잃은 찌꺼기 같은 존재라고 한들, 악마에게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을 터였다.
어떻게든 막아서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가로, 로이드 영지로 향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다급해진 브랫의 마음이 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했다.
“우리도 가자!”
“응!”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키릴 파레이라와 루루도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의 표정에도 전과 다른 긴장감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
그의 시선이 악마가 도망가는 방향을 향했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드넓게 확장된 기감(氣感)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곳을 더듬었고, 파악했고, 발견했다.
코앞에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생생한 감각이 새로운 존재들의 출현을 알려 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더는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악마의 정화는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화아악
파지지직-!
화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거대한 그물이 나타났다.
평범한 그물이 아니었다. 신성한 기운으로 엮인 백색의 망은 허술한 듯하면서도 조금의 마기도 놓치지 않았다.
모든 부정한 기운을 그러모아 정화하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아악! 끄아, 끄아아아아악!
찌꺼기 악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허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성스러운 번개에 절여지고, 정화의 불꽃에 휩싸인 녀석은 순식간에 무로 돌아갔다.
재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도 깔끔한 처리에 브랫, 키릴, 루루가 꿀꺽 침을 삼켰다.
신성 마법.
그것도 웬만한 사제들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최고위 사제나 보여 줄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의 마법.
‘악마토벌대가 도착했구나!’
모두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성스러운 백색 장비로 무장한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침묵이 감돌았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토벌대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브랫은 아빌리우스의 노인네들 사이에서 발견한 아버지께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어떤 변명의 말을 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악마를 무사히 토벌한 건 맞지만, 신성왕국의 지침을 무시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점을 따지고 들어온다면 할 말이 궁하다.
심지어 자신들이 완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니다. 잠시나마 악마의 잔재를 놓쳐 마무리를 저들에게 넘긴 상황이지 않은가.
브랫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자기주장이 강한 키릴도, 항상 발랄하던 루루도, 지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토벌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벅
그러한 국면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변화를 일으켰다.
가볍게 나선 한 걸음.
그 사소한 동작에 모두의 눈길이 집중됐다.
아이른을 아는 이도, 그를 처음 본 이도, 어느새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
또다시 내려앉은 고요함.
그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선 것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핏빛의 갑주로 무장한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였다.
우묵한 눈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른.”
“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당당하군. 뻔뻔하기 그지없어.”
“능력이 된다면 최대한 빠르게 악마를 토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예.”
순간, 퀸시 마이어스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터져 나왔다.
요술 소녀 상태의 루루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키릴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요술 방패를 꺼냈고, 브랫 역시 전력으로 오러를 운용하며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들이 느낀 기세는 극히 일부였다.
막대한 기운, 그 대부분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있음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젊은 영웅.
그 모습에 토벌대의 인사들이 놀란 기색을 내비치고 있을 때, 제2 악마토벌대의 장인 퀸시 마이어스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네 말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알겠습…….”
쿠웅-!
대답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퀸시 마이어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마치 바닥을 때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에 따라 지면이 수면이라도 된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쿠웅!
쿵!
쿠우웅- !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가 발을 구를 때마다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분명 단단한 땅이건만 물결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비현실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키릴과 루루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로 대피했고, 브랫은 중심을 잡기 위해 억지로 무게중심을 낮춰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거친 파도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
퀸시 마이어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단순히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아니, 물과 하나로 동화된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그가 더욱 세게 발을 구르려는 찰나.
투웅
아이른의 신형이 움직였다.
스윽-
발만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휘둘러진 검에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퀸시 마이어스는 또 한 번 놀랐다.
검에 덧씌운 오러를 날려 보내는 것은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들조차 활용하지 않는 수법이었다.
난도도 어렵지만, 기운의 낭비가 심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아이른은 무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속도보다 훨씬 느릿하게 날아오는 황금의 오러가 물처럼 여유롭게, 넓게 퍼져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흡!”
재빨리 자세를 취한 퀸시 마이어스가 검을 휘둘렀다. 절도 있는 회전검술에 의해 태풍이 상륙했다.
그러자 안개 형태로 시야를 가리던 상대의 오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이른의 의도는 완벽하게 파훼된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
쿠웅-!
자신의 오러와, 물과 같은 기운과 하나 되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그가 강하게 발을 내디뎠다.
퀸시 마이어스와 마찬가지로 지축을 울리는 걸음이었다. 근처에 있던 사제들 몇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력과 오러, 검술과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는 최적의 순간.
현재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직 베기가 상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쩌어어어엉!
콰득, 콰드드득-!
퀸시 마이어스의 키가 줄어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서 있던 지면이 박살이 난 탓이었다. 쿠키가 깨지듯 아래로 꺼진 지면 속에서 노기사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허나 아이른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를 꽉 깨문 그가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마치 검이 아닌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파워풀한 느낌의 동작이었다.
허나 그것이 투박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집착을 걷어 내고, 불안을 지워 내고, 비로소 자연스레 자연스레 흐르는 아이른의 마음. 이는 그가 현재의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게 했다.
약간의 심력 낭비도 없이 발휘되는 검술은 강맹하면서도 투박하지 않았다. 거세면서도 거칠지는 않았다.
단단한 바윗덩이를 쪼개려는 것처럼, 젊은 검사의 대검이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졌다.
터어엉-!
물론 당하고만 있을 퀸시 마이어스가 아니었다.
그가 사선으로 한발 물러나며 무기를 내렸다.
자석처럼 상대에 달라붙은 검이 타격점을 완전히 어그러뜨렸다. 기우뚱, 아이른의 균형이 일순 무너졌다.
정교한 검술로 수세에서 벗어난 퀸시 마이어스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했던 것을 갚아 주기라도 하듯, 패도적인 공격을 쏟아냈다.
콰앙!
콰아앙-!
꽈아아앙!
묵직하고 선이 굵은 검격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백색의 돌풍. 전대 적기사단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러였지만, 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정신없이 날아드는 공세를 막아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쉽지 않아.’
아이른이 표정을 찡그렸다.
쉽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몸통이 베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상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신성왕국에서 가장 사나운 자들만 모여 있다는 적기사단의 수장다운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포기했다.
그렇기에 버렸다.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는 생각을 거두었고, 중검의 이점을 살리려는 생각도 접어 두었다.
바위처럼 단단하던 아이른의 기운이 물처럼 여유로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콰앙!
검이 날아든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공격. 허나 수면에 닿은 이상 이는 온전히 전해질 수 없었다.
꽈아앙!
검이 또다시 날아든다. 이번엔 역방향으로. 좌상단을 치고 들어오는 공격이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릴 듯 매서웠다.
허나 괜찮았다. 아이른이 두 걸음 뒤로, 물처럼 부드럽게 물러났다. 힘에 저항하지 않고 결대로 흐른 덕분이었다.
검을 받아 냄과 동시에 저 멀리 후퇴한 아이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서려 있었다.
“…….”
퀸시 마이어스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더욱 강하게, 더욱 힘 있게 검을 휘두를 뿐.
아이른은 겁내지 않았다.
더욱 환한 미소와 함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고, 흘려 내고, 또 흘려 내었다.
물론 한계가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억, 허억…….”
로이드 영지에서의 휴식, 그리고 석상 악마로 인한 수련을 통해 순식간에 성장한 아이른 파레이라다.
허나 그런 그조차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퀸시 마이어스의 검술은 대단했고, 오러는 단단했다.
몇몇 수법은 이해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신묘했다. 성기사만 아니었다면 괴이하다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봐주지 않았다면 한참 전에 쓰러졌겠지. 여전히 갈 길이 멀었구나.’
대륙의 10대 강자급 검사와의 격차를 새삼 느낀 아이른의 마음속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허나 그것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열정과 열의를 재료로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
그것이 영웅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결코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도도하게 몸 내부를 휘돌고 있는 물길이 그를 지켜 주었다.
마치 젊은이의 패기와 노인의 연륜을 동시에 품은 것 같은, 이상적이고도 균형 잡힌 모습.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제2 악마토벌대의 장 퀸시 마이어스였다.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 속에서 검을 거둔 그가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허억, 후웁…… 예.”
“토벌대에 합류해라.”
“……!”
“……!”
아이른 일행도, 악마토벌대의 대원들도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것은 잠시일 뿐.
생각을 마친 노인들이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우스 휼의 과제?
쿤의 인정?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목격했고, 퀸시 마이어스가 인정했다.
젊은 영웅이 아니었다. 이미 완성된 영웅이었다.
그런 이의 합류를 바라지 않을 자가 누가 있을까.
하지만.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