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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34화 (234/388)

◈ 80. 증명의 시간 (1)

소드마스터(Sword Master).

검의 극에 이른 자들을 칭하는 단어로, 대륙에 모래알처럼 많은 검사 중에 고작 100명밖에 되지 않는 귀한 존재들이다.

얼핏 들으면 많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일국의 왕보다 적은 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대단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런 것 치고 내 주변에는 꽤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

브랫 로이드의 주변에는 황당할 정도로 마스터가 많았다. 심지어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의 마스터가.

크로노 검술관의 관주인 이안과 부관주인 케이라 핀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18살에 벽을 깬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지금은 마스터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아이른을 보면 질투를 넘어 박탈감, 아니 황당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지 않았어.’

그러나 브랫은 무너지지 않았다.

좌절하지도 않았고, 멈춰 서지도 않았다.

아직도 예비 수련생 시절이 떠오른다.

자신이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앞으로 쌓아 갈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졌을 때.

그런 자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 주디스의 주먹. 그리고 아버지의 조언.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알 필요 없지.’

그렇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생각할 필요 없다.

푸른 머리의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검을 노려봤다.

두르칼리의 족장에게서 선물 받은 청검, 그 위에 은은하게 솟아오른 푸른색의 오러.

소드마스터의 상징과도 같은 빛줄기를 보며, 브랫이 눈물과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하하…….”

언제까지고 웃고만 있지는 않았다.

흥분의 순간에도 브랫은 브랫이었다. 또래보다 침착한 성격의 그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러를 체외로 발현할 때의 기분과 검에 집중시킬 때의 느낌.

응축된 힘을 강화하고, 단단하게 만들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날 선 감각의 조율.

오러 운용의 모든 부분에 꼼꼼히 집중하며, 그가 검을 휘둘렀다.

조심스럽게, 마치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유리 검을 들고 있는 것처럼.

허나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순식간에 오러 소드에 익숙해진 그가 더욱 빠르게 검술을 펼쳐 나갔다.

휘익-

휙-!

자신의 친구, 아이른이 집중할 때처럼 눈을 감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크게 떴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부릅뜨곤, 자신이 펼치는 검술을 눈과 머리에 담았다.

자랑스러웠다.

복받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움직임이 거칠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그를 파도와 같은 기세로 승화시켜나갔다.

악마의 보금자리는 브랫이 쏟아 낸 물결과 같은 오러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이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의 검술이 아니었다.

오러 소드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허나 그 어느 때보다 브랫에게 어울리는, 그런 검술.

아이른은 친구의 모습을 뇌에 새길 듯이 진하게 지켜봤고, 키릴과 루루는 둘의 묘한 분위기를 느끼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시간이 흘렀다.

적지 않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불쾌한 공기가 가득 들어찬 악마의 터전이었음에도,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이 끝난 건, 브랫의 청검에 맺힌 오러가 다시금 몸으로 돌아갔을 때.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석상의 악마가 비열한 목소리를 냈을 때였다.

- 하하하하!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괜찮아. 또 죽이면 돼.”

- 하하, 그럴 수 없을걸? 난 이미 죽었거든! 너희들이 아무리 악랄해도 죽은 악마를 또 죽일 수는 없지!

“저 자식 뭐라는 거야?”

“아, 이거 그거다! 얘기 들었는데…….”

“사후 저주.”

“맞다, 사후 저주!”

아이른의 말을 들은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넷에게 들었었다. 대부분의 악마들은 뒤끝이 심하다고.

죽어 버린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죽인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끔찍한 저주를 퍼붓는다고.

아마 석상의 악마도 그럴 생각으로 보였다.

아니, 이제는 ‘석상의 악마’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어두운 연기가 뭉쳐져 만들어진 몸뚱이.

마치 군데군데 솜이 터져 나온 듯한 모습이 더러운 봉제 인형을 연상시켰다.

물론 위엄 없는 모습과는 다르게, 눈빛만은 여전히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악마의 사후의지가 잔뜩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 끝난 줄 알았지? 아니야! 내가 끝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끝이 아니야!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마. 미궁보다 더욱 끔찍하고 처절하고 답답한 공간을 선사해 주마.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주마! 하하! 으하하하…… 으읏!

쥐어 터진 봉제 인형이 허공을 빙빙 날아다녔다.

그러자 멍하니 이를 지켜보고 있던 루루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펄쩍 뛰었다. 악마의 사후 의지를 잡아채기 위해서였다.

“재밌어, 재밌어!”

- 이 자식! 나는 네 놀잇감이 아니란 말이다아아!

“…….”

“……아이른,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키릴이 황당해하는 가운데, 브랫이 굳은 표정으로 아이른에게 물었다.

교양 있는 귀족인 그가 악마의 사후 저주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기록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끈질긴 것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아이른은 이전에도 한차례 악마를 토벌했다.

그것도 지금의 녀석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추측되는 녀석을 말이다.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른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그리고 대검을 지면에 박았다.

우우웅-!

콱!

파아아아앗-!

그러자 청량한 소리와 함께 황금색의 빛줄기가 악마의 결계 안을 가득 채웠다.

어두운 방 안에 피어난 모닥불처럼.

길을 잃고 헤매던 선원에게 희망을 주는 등대의 불빛처럼.

브랫은 오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샘솟는 기분을 느꼈다.

“키릴.”

“응, 오빠.”

“검 남는 거 있어?”

“당연히 있지.”

키릴이 요술 주머니에서 미니어처 검을 꺼내 던졌다.

그것은 이내 아이른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크기로 확대되었다.

붕붕, 요술검을 두어 번 휘둘러 본 금발의 검사가 더러운 봉제 인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악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미 그가 황금빛 오러가 맺힌 검을 땅에 박았을 때부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차였다.

- 이,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브랫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말했다.

“영웅의 검이라고 들어 봤어?”

“이그넷이 사용하는 검술? 태생적으로 악마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타고난 게 아니야. 후천적으로 배울 수 있어.”

“그래?”

“그래.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이곳이 그걸 배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야.”

“으음.”

브랫이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부터 시련은 영웅을 단단하게 만드는 법.

지금 막 소드마스터가 되어 자신감이 넘치는 그에게, 이 정도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좋아.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수련하면 된다는 거지?”

“맞아.”

“그럼 바로 하자.”

“그래. 우선, 악마의 파괴 욕구에 반하는 인간의 수호 의지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 …….

악마의 사후 의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를 활용해 수련을 하겠다고?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와앙!”

- 크악! 저리 가!

황당함에 빠져 있던 악마를 루루가 와그작 깨물었다.

깜짝 놀란 악마가 이를 뿌리쳤으나 몸 일부가 뜯어졌다. 상처가 난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랑 조금 더 놀자!”

- 꺼져!

“히히히, 못 가!”

슉, 슈슉-!

허공을 떠다니는 것을 넘어 이리저리 순간이동까지 하는 검은 고양이를 보며, 악마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키릴은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돗자리, 그리고 차 세트를 꺼냈다.

쪼로록

따스하게 데워진 물로 찻잎을 우려 낸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음, 좋네.”

은은한 조명 사이로 화려하게 움직이는 루루와 악마.

그런 둘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을 시작한 오빠와 브랫.

지루할 틈이 없었다. 며칠쯤은 더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심해지면 나도 요술 수련이나 해야지.’

* * *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브랫 로이드는 오러 소드를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것을 넘어, 이그넷의 비전 검술이라 할 수 있는 영웅의 검을 배웠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수호 의지를 품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영지.

검술관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더 소중한 자신의 연인 주디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악마에 대적할 뜻을 세우는 것은 차고 넘쳤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그넷의 비전은, 지금까지 말한 감정과 의지를 ‘검술’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

단순히 마음공부가 아니었다. 엄연히 난해하고도 복잡한 이론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술이었다.

그 난도는 ‘평범한 소드마스터’조차도 익히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브랫으로서는 오만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럽게 어렵군.”

“어렵지. 하지만 감은 오지 않아?”

잔뜩 툴툴대면서도, 브랫은 이그넷의 비전인 영웅의 검을 익혀 냈다.

물론 완숙을 말함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팔랑케의 최고 실력자인 세비온 브룩스조차 익히지 못했던 검술.

거기에 입문하였다는 것은, 브랫 역시 손에 꼽을 만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뜻했다.

“큭큭큭. 예전에도 괜찮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훌륭한 놈일지도…….”

“…….”

“…….”

“농담도 못 하나?”

동시에 고개를 저은 파레이라 남매가 각자의 수련에 몰두했다.

성장하는 것은 브랫만이 아니었다.

아이른 역시 오랜만에 영웅의 검, 아니 마음의 검을 수련하며 의지를 새롭게 하였다.

미래의 걱정을 끌어다 하는 것을 멈추었다.

묶여 있던 마음을 더욱 소중한 이들에게, 보다 소중한 곳으로 흐르게 놔두었다. 가족, 친구, 스승, 동기들…… 브랫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었기에 더욱 애틋한.

잠시 흔들렸으나 더욱 굳건해진 그의 마음이, 검 역시 단단하게 만들었다.

“후우.”

키릴도 마찬가지였다.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요술 분야에 몸담은 그녀였지만, 세자르 공국에서는 이미 그녀를 최고의 재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악마의 사후 저주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황금빛 대검까지 꽂혀 있는 마당에 버티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물론 힘겹기는 했다. 끊임없이 차오르는 절망감과 우울감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하지만 오빠와 떨어져 있던 5년의 세월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오히려 정신 집중 수련으로 딱 좋은 환경이야.’

눈을 감은 키릴의 주변에 수백 개의 빛줄기가 명멸했다.

1초 남짓한 시간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보며 루루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파바바바밧-!

아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빛을 쫓는 검은 고양이.

그 모습을 부들대며 지켜보던, 이제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악마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 크아아아아아악! 이 미친 녀석들! 이젠 안 돼! 이젠 못 견뎌!

“음?”

“뭐야?”

- 여기를 나가야겠어. 이런 미치광이들 틈에서 의미 없이 사라질 수는 없어어어어!

단말마와 같은 처절한 비명.

그것이 아이른 일행으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그러자 어둠도 옅어졌다. 악마의 사후의지로부터 끊임없이 피어나던 마기, 그것이 더는 그들을 강제하지 않았다.

결계가 풀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 녀석이 도망갔다.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브랫이 외쳤다.

“잡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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