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다녀오겠습니다 (3)
쿠콰콰콰콰콰-!
석상 악마는 아이른의 두 번째 공격을 막지 못했다.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그는 긴 고랑을 남기며 날아갔고, 벽에 부딪혔다.
꽈아아아앙!
동굴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소음, 그리고 진동.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 밑으로 피처럼 붉은 용암이 흘렀다.
원래라면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극심한 피해.
허나 석상 악마는 멀쩡했다. 아니, 정확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우우우웅……
고대 악마들이 각자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자신의 힘을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몸이 반파된 석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절규와 고통을 음미하기 위해 구축해 놨던 미궁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잠시 방황하던 입자는 이윽고 거대한 마기로 화해 악마의 몸뚱이로 돌아왔다.
드득, 드드드득
순식간에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온 석상 악마.
허나 그의 표정만큼은 전과 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금발의 검사를 바라본 악마가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인간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인간에 관심이 많은 것이 바로 악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상대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전혀 다른 종족일지언정, 마(魔)의 족속들은 인간의 외형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많아도 서른…… 아마도 20대 중반.’
“하.”
석상의 악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간계의 존재들이 세월에 비해 빠른 성장을 보인다 한들, 20대 중반의 존재가 이만한 힘을 가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상식으로는 그러했다.
아니,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금발의 청년.
자신의 머릿결처럼 빛나는 대검을 들고 있는 상대와 마주하며, 악마는 자신의 지식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꾸국, 꾸구구국-!
악마가 숨을 내쉬었다.
인간을 괴롭힐 수천 가지 방법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박투였다.
모든 잡념을 지워 버린 그가 호흡을 거듭했다. 들숨과 날숨이 이어질수록 육체의 밀도가 촘촘해졌고, 기세 역시 흉험해졌다.
아이른은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얌전히 지켜봤다.
그리고 상대가 만전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섬전 같은 속도를 보이며 앞으로 쇄도했다.
찌지지직-!
천 조각이 찢기는 듯한 불편한 소리가 났다. 허공을 터뜨릴 듯 빠르게 악마 앞에 당도한 그가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균형이 무너지는 동작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은 자신이 할 게 아니었다. 상대가 하는 거였다.
콰아아앙!
“끄헉!”
악마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검고 거대한 팔뚝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허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숨을 참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콱 소리가 날 정도로 무게가 실린 일보(一步).
바닥에 뿌리박힌 듯한 자세의 그가 힘찬 공격을 이어 나갔다.
콰앙!
꽈아앙!
꽈아아아앙-!
“큭! 끄흑, 끄허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중력의 힘을 받아 다시 아래로.
아이른의 공격은 미련하다 느껴질 정도로 우악스러웠고, 거칠었다.
묵직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느껴졌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허나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놀랍도록 효과가 좋았다.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돌덩이를 앞에 둔 채, 아이른이 생각했다.
‘몸이 달라졌어.’
이미 한계까지 단련된 육신이라 생각했다.
이 이상의 경지는 온전히 검술과 오러의 영역에 걸쳐 있을 뿐, 육체의 성장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근육 곳곳에 녹아 있던 노폐물이 정제되고.
관절 사이사이에 엉겨 있던 불순물이 사라졌다.
마치 태어날 때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단련의 결과물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완전무결!
아이른은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끼며, 끝을 모르는 육체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검을, 팔을, 몸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앙-!
“크허어어억!”
울컥!
불이 붙은 아이른으로부터 강렬한 한 방이 터져 나왔다.
위태위태하면서도 잘 버텨 왔던 석상 악마가 입으로 용암을 토해 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른은 봐주지 않았다.
쾅!
또 한 걸음 깊게 뿌리를 박고.
쩌어어어엉-!
안정된 무게중심에서 나온 무지막지한 일격을 쏘아 냈다.
육신의 힘만이 아니었다.
아이른은 단순히 신이 나서 휘두른 동작이었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는 지난 세월 동안 쌓아 왔던 검술과 오러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뤄져 있는 상태였다.
몸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도 전혀 없었다.
짜릿한 쾌감을 느낀 그가 일격보다 더욱 강한 이격(二擊)을 욱여넣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그것은, 금속과 바위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금속이 바위를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검을 거둔 아이른이 앞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두 배는 큰 키를 자랑하던 석상을 닮은 악마가,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물론 방심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적잖이 닮은 구석을 갖고 있긴 하지만, 허리가 잘린 정도로 목숨을 잃을 리 없었다.
두 조각으로 안 되면 네 조각으로.
네 조각으로 안 되면 여덟 조각, 열여섯 조각으로.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가루로 만들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
굳게 다짐한 아이른이 재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생각은 길었지만 시간의 흐름은 길지 않았다.
여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악마의 상체를 향해, 아이른이 통렬한 프런트 킥을 적중시켰다.
꽈아아앙!
쩌적, 쩌저적……
퍼석-!
그 순간, 걷어차인 악마의 상체가 쩌저적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눈매를 찡그린 아이른이 시선을 돌렸다.
하체도 마찬가지였다. 기둥처럼 서 있던 두 다리 역시 순식간에 풍화되었다. 바닥을 적시던 용암도 어느새 밑으로 스며들었다.
불쾌하고 불안한,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박감.
아이른은 악마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고.
“……!”
그런 그의 시야에,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들어왔다.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한참 뒤에 떨어져 있던 또 다른 검사, 브랫 로이드.
그를 향해 쏘아져 가는 적을 보며 아이른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터엉-!
빠르기가 질풍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바람의 신이 다녀갔다고 생각될 만큼의 힘도 느껴졌다.
허나 악마가 조금 더 빨랐다. 한 번은 나올 수밖에 없는 심리의 빈틈을 노리고 노려 잡아낸 한 수였다.
안개가 된 악마가 히죽 웃었다.
푸른 머리 녀석을 인질로 잡을 생각은 없다.
눈만 봐도 안다. 저 녀석과의 협상은 불가하다.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동료의 잔인하고 처절한 죽음뿐.
음습하면서도 지독한 악마의 악의가, 우두커니 서 있는 또 다른 검사를 향해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화아악-!
브랫 로이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파티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존재가 악마 토벌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허나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항상 침착하고 냉철한 그가 무리해서 사지로 들어온 이유.
그것은 첫 번째로, 목숨을 걸 정도의 자극이 아니면 벽을 깰 수 없을 거라는 직감 때문이고.
스르르……
두 번째로, 목숨을 건 승부에서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는다, 나를.’
브랫 로이드가 검을 들었다.
수십만.
수백만.
어쩌면 그보다도 많이 행했을 동작.
허나 그 모든 것을 통틀어도 지금보다 완벽한 적은 없었다.
청발이 뒤로 흩날리는 가운데,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와라.’
그것은 짓쳐드는 악마에게 고하는 말이었으며.
내면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올 듯 나올 듯 솟아나지 않았던 기운에게 하는 부탁이고, 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간절한 마음이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린 순간.
최악은 최고로 변하였다.
우우우우웅-!
아이른의 것처럼 찬란한 빛은 아니었다.
일리아의 것처럼 우아한 느낌도 아니었으며.
이그넷의 것처럼 강렬하고 사나운 기운도,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다소 밋밋해 보이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물처럼 자연스레 검을 타고 흐르는 푸른빛의 기운.
오러 소드(Aura Sword).
브랫 로이드가 그것을 슥 내미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파도가 휘몰아쳤다.
“이런 미……!”
안개가 된 악마는 끝까지 말을 내뱉지 못했다.
세차게 밀려오는 푸른색 오러의 파도가 그를 밀어냈다. 끊임없이 뒤로 밀어냈다.
물론 이 정도로 자신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아주 잠깐의 틈만 있다면, 이까짓 것쯤은 순식간에 파훼하고 저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즈으으으응-!
세자르 공국 최고의 유망주, 키릴 파레이라의 요술 방패가 악마를 또 한 번 밀어내고.
뾰로로로롱-!
요술소녀로 변신한 루루의 결계가 또, 또다시 그를 밀어냈다.
악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끝내, 어떻게든 상대의 목숨을 뜯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발악하고, 발악하고, 또 발악했다.
그러나 무리였다.
어느새 접근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검이, 안개가 된 악마를 정화하였다.
화르르르륵-!
“크아아아아아아악-!”
물의 검을 깨달았음에도 그의 검은 여전히 뜨거웠다.
단단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덮어 버리기 위해 물의 마음을 깨우치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금속을 다스리는 불꽃.
불꽃을 다스리는 물줄기.
또다시 조화와 균형을 찾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힘껏 쥐었던 대검을 내려놓았다.
후우욱-
찬란한 존재감을 발하던 영웅의 무기가 사라졌다.
악마의 접근을 불허했던 은회색의 거대한 요술 방패도,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던 루루의 그물 같은 결계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증발해 버린 석상의 악마와 함께 자취를 감춰 버렸다.
허나 브랫 로이드의 것은 아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위로 올렸다.
검의 손잡이부터 끝부분까지.
아니, 그보다도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 시선.
그곳에 자리한 것은, 그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소드마스터의 상징.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푸른색의 오러를 보며, 브랫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또다시 움직였다.
함께 있을 때마다 틱틱대던 키릴 파레이라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만 보이던 루루의 얼굴도 평소와 달랐다.
자신의 친구, 동시에 라이벌인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도 조금은 달랐다.
전보다 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전보다 더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그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축하해.”
“…….”
“소드마스터, 브랫 로이드.”
브랫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