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다녀오겠습니다 (1)
“그래?”
“깨달음?”
브랫 로이드의 말을 들은 루루와 키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깨달음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최근 오빠의 심경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마음의 중요함을 잘 아는 요술사들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 그리고 동생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최근의 아이른이 적지 않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루루의 경우에는 여행 도중 아이른이 급성장한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일 역시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두둥실 떠오른 검은 고양이가 브랫에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브랫.”
“내 표정이 왜?”
“재수 없다는 표정이야.”
“맞다. 이 녀석, 몹시 재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적 자주 있었잖아.”
“자주 맞으면 안 아프냐? 자주 봤어도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야.”
“오빠 욕 좀 그만 해요.”
“그러게. 아들, 왜 이렇게 입이 험해졌니?”
“추하구나, 아들아. 질투는 좋지 않다.”
“……제 편은 아무도 없습니까?”
한숨을 쉰 브랫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이른을 쳐다본 뒤,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무슨 일이야?”
“영주님 일행인데…….”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미 연주가 끝난 상황.
원래라면 자리를 떠야 할 관객들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존경하는 영주와 부인, 소영주까지 굳은 표정을 짓고 있자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은 회관 측에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브랫이 말했다.
예전에 관주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을 때, 주변 환경을 최대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몸에 가해지는 충격, 혹은 그보다 사소한 이변으로 인해 깨달음의 순간을 방해받는다면…….’
예를 들어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될 기회를 얻었는데, 누군가의 방해로 그것이 물거품이 된다면…….
아마 자신은 방해꾼을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부모님이나 주디스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브랫이 빠르게, 허나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회관의 관리인에게 말을 전해 이후의 공연을 취소했고, 관객들이 조용히 건물을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궁금해하면서도 통제에 잘 따랐다. 덕분에 일행은 전보다 훨씬 편한 얼굴로 아이른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말소리 정도는 평범하게 내도 될 겁니다. 애초에 음악과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도 깨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크로노 검술관주님께 듣기로는, 마음과 육신이 새롭게 거듭나는 순간이다 보니 외부의 충격에 극도로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군. 그럼 호위라도 세워야 하는 건가?”
“영지의 기사들을…….”
“기사들을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님께 대답한 브랫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아이른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리고 영지의 가장 강한 검사로서.”
“…….”
“왜 그러십니까?”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 싶어서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니 부끄러울 것 없습니다.”
이번에는 필립 로이드도 트집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존재를 보면서도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부모로서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어렸을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잘 컸구나.’
로이드 영주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와 함께 살짝 복받치려던 감정도 속으로 삼켰다.
아들의 성장에 눈물을 흘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 차분해진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나도 함께 남아 있을래.”
“나도.”
루루와 키릴이 말했다.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이른과 가까운 존재들. 실력 또한 출중하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헌데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브랫, 아이른을 잘 지켜봐.”
“응? 그야 당연히…….”
“호위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어쩌면 네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브랫을 향해, 루루가 진지한 눈빛을 보내며 설명했다.
“요술사의 세계에서도 깨달음의 순간은 있어. 아니, 오히려 검사들보다 훨씬 많지. 마음과 의지, 믿음이 가장 중요한 요술이니만큼 이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요술사가 각성하는 순간이 다른 요술사에게 있어서 또 다른 영감이 된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 마음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거니까.”
“…….”
“나는 검은 잘 몰라. 검사가 아니니까. 하지만 육체의 변화라든가, 겉으로 드러나는 오러의 변화라든가, 그 밖에 검사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너 역시, 지금의 벽을 깨고 올라설 수 있을지도 몰라.
루루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허나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일행은 말이 없었다.
브랫 때문이었다.
고양이 요술사의 말을 들은 순간.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진 브랫의 분위기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아들의 검사로서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도한 백작 내외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고, 키릴 역시 평소와 달리 딴죽을 걸지 않았다.
“……좋아. 의욕이 생기는데.”
브랫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 아이른이 부러웠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한계를 모르고 강해지는, 멀어지는 친구를 보며 마음 한구석에서 주디스의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 그 뜨거우면서도 간질거리는 감정이 열정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옆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랜스, 너도 남을 거지?”
“…….”
“랜스?”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남아야지.”
랜스 페터슨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허나 표정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억지로 밝은 얼굴을 하며,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는 아이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을 수련하다가도, 생사 대적과 싸우다가도 아니라 휴식을 취하다가, 음악을 즐기다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친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브랫과 루루, 키릴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지켜보며 좌절하기는커녕 더욱 열의를 불태우는 그들 역시, 랜스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는.
자신은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천재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당연히 남아야지.”
랜스 페터슨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차마 밝힐 수 없는 속마음을 꽁꽁 숨긴 채.
* * *
‘…….’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현실의 눈은 아니었다. 마음의 눈이었다.
심상 세계의 한가운데서 정신을 차린 그가 지그시 한 곳을 바라봤다.
우뚝 솟은 강철의 검도 아니었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 역시 아니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그가, 깊고 어두운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어둡네.’
자신이 판 구덩이의 안에서는 검고 냄새나는 감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불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불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허나 무겁게 자신을 짓눌렀다. 먹먹하게 고여 있는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현기증이 일었다.
아이른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보다 먼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세상의 밖으로부터 새로운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쪼르르르……
깨끗한 물줄기였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건너온 맑고도 시원한 물줄기였다.
천천히 흘러온 마음이 계속해서 구덩이를 향해 나아갔고, 더럽고 어두운 마음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아이른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으으으……
요술 결계의 5년을 견디며 고여 갔던 감정.
즐거운 여행의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쌓여 갔던 피로.
암흑 결계에서 생겨난, 이를 벗어나는 순간에도 채 걷어 내지 못했던 압박감이 외부로 흘러 나가면서.
동시에 몸 곳곳에 축적되어 있던 노폐물 역시 체외로 배출되었다. 검은 아지랑이가 되어 하늘로 사라져 갔다.
아이른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부자연스럽게 파여 있던 구덩이가 메워지고, 물줄기로 인해 생긴 자연스러운 흐름이 자신의 마음을 휘감는 것을 느낄 뿐.
……그런 그가 현실 세계에서 눈을 뜬 것은, 음악회관에 방문한 지 사흘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깼나?”
“깼네.”
“깼네요.”
“그러게.”
“……!”
정신을 차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브랫과 키릴, 루루, 그리고 랜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물으려는 순간, 브랫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너도 알겠지만, 연주를 감상하던 도중 깨달음이 찾아왔다.”
“…….”
“오러도 막 피어났지. 색도 다양했다. 은회색의 오러, 붉은색의 오러, 파란색의 오러…… 마지막엔 검은 연기도 흘러나오더군.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참았다. 키릴 파레이라 양도, 루루도, 랜스도 다들 잘 참아 주었다.”
“어, 그러니까…….”
“미안하다. 나는 아무 성취도 못 얻었는데, 너 혼자 엄청나게 강해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순간 배가 아파서. 그러니까 말투가 아니꼬워도 잘난 네가 이해해라.”
“맞아. 네가 이해해라.”
랜스 페터슨이 브랫의 말을 따라 했다.
친구들의 농담을 들은 아이른이 뒤늦게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어째서 여기에 남아 있었는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그넷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처럼, 날 옆에서 지켜 준 거구나.’
“……고마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른이 말했다.
또다시 퉁명스럽게 대꾸하려던 브랫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친구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정말, 정말 고마워. 모두가 얼마나 날 신경 써 줬는지, 날 걱정해 줬는지, 날 위해 줬는지…… 그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니까, 어…… 나도 그러니까…… 소홀하지 않게, 그러니까 조금 더 표현도 많이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아니 이게 말이…… 왜 이렇게 말이 정리가 안 되지…….”
횡설수설도 이런 횡설수설이 없었다.
너희들 덕분에 쓸데없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앞으로는 주변에 소홀하지 않고 더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오빠가 되겠다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아이른이지만, 생각처럼 잘 정리되지 않았다.
“낯부끄러운 말 그만해라. 무슨 소리인지 알겠으니까.”
듣다 못한 브랫 로이드가 그를 제지했다.
허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키릴도,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른을 보는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들이 아이른을 사랑하는 만큼, 아이른 역시 자신들을 사랑한다. 친구로서, 그리고 남매로서.
그걸 새삼스레 다시 확인하는 과정은 꽤 민망한 일이었으나, 절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그러한 분위기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강해졌어?”
“어?”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야, 물어본다고 해서 설명해 주지도 못할 거잖아. 그런 건 기대도 안 하니까, 빨리 검술부터 보여 봐. 아니면 오러 소드라도.”
“아…….”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궁금했다.
뭔가 달라진 것은 알겠다. 강해진 것도 알겠다.
헌데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문제 될 건 없었다. 이제부터 알아 보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즈으으으으으으응-!
“…….”
“뭐야, 왜 그래?”
키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내 좋던 오빠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뭔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한 기색을 읽은 나머지 일행도, 잔심부름을 위해 남아 있던 몇몇 병사들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생각했다.
넓게 드리운 마기(魔氣).
그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악의를 숨길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며칠 전보다 굳건해진 젊은 영웅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