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오래 걷는 방법 (3)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러니까 일리아 린제이와의 챔피언 결정전이 있은 뒤로, 아이른 파레이라는 전생의 자신에게서 졸업했다.
물론 그 뒤에도 구르가르를 통해, 또 광대 악마로 인해 카렌 윈커를 만난 적은 있다.
허나 꿈에서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15살 때부터 22살까지, 무려 7년이나 이어져 온 인연이 끊어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던 아이른이다.
‘……졸업한 게 아니었어.’
낯익은 하늘, 낯익은 마당, 낯익은 냄새.
또다시 펼쳐진 시골 마을의 풍경에 아이른 파레이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형체라고는 없는, 유령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의식의 집합체일 뿐이었으니까.
아이른의 시야가 움직였다.
그러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전생의 자신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익숙한, 그와 동시에 낯선 느낌을 주는 존재.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 그 자신이 진중한 자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휘익-!
휙!
휘익!
아이른의 검은 카렌 윈커의 젊은 시절보다 훨씬 강맹했다.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날카로운 기세가 엿보였다. 밸런스 역시 뛰어나 그 어떤 검사가 보더라도 감탄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허나 아이른은 그에 집중하지 않았다.
조금 다른 생각을 품은 그는, 또 다른 자신이 검을 수련하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더는 꿈속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른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어두운 풍경.
여전히 적막한 방안.
아마 이번에도 채 3시간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고요함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는 깨달았다.
오늘의 꿈이 오늘만의 꿈이 아니라는 것을.
사내의 꿈으로부터 졸업한 이후에도, 자신은 매일같이 꿈속에서 검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수련이 아니야.’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필립 로이드의 말 때문일까?
무의식 속에서 검을 휘둘렀던 예전과 다르게, 오늘의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제3자가 되어 자신의 표정을, 분위기를,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열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타오르는 신념도 엿보였다.
허나 그것은 분명히 줄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거대한 피로와 불안, 긴장과 압박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꿈속의 자신을 다시 한번 떠올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 영주의 말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신,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에 더 깊이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암흑 결계 때와 달라진 게 없었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실제로 내려놓은 적도 있었다. 적어도 암흑 결계를 깨뜨릴 때는 그랬다.
물을 베어 내려는 무의미한 집착을 버렸을 당시의 자신은 자유로웠고,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아니었다.
허나 그 사실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단번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일정한 노력에 일정한 보상이 따라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수차례의 실패로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하면 돼.’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노 검술관주 이안의 가르침과 로이드 영주의 조언은 근본적으로 같다.
허나 푹 자라는 그의 말은 더욱 깊게 와닿았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마냥 긍정적인 생각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을 찬찬히 되짚어보던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꽤 피곤하게 사는 타입이었구나.’
예비 수련생 시절 이후.
그러니까 자신의 검을 찾겠다고 다짐한 이후, 아이른의 머리는 한시도 쉬어 간 적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가문으로 돌아와 그리운 방에 몸을 뉘일 때도.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와중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적막한 시간 속에서도, 아이른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는 두르칼리에서 전생을 마주한 이후 더욱 심해졌다.
꽃을 마주할 때도 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 시원함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무엇을 하든 생각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원하는 것을 당장 내놓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화낼 거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쓸데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편히 쉬자고, 잠시 내려놓자고 다짐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헌데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민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집착을 놓으려는 집착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
조용히 중얼거린 그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비워 내기 위해 찬물로 몸을 씻었다. 물론 효과는 크지 않았다.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그가 세면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는 브랫을 보며 물었다.
“브랫? 왜?”
“들었다.”
“뭘?”
“아버지께 네 상태에 대해 들었다.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하고 있다고?”
“……?”
“맞나?”
“……그렇긴 해. 그래도 이제 괜찮아. 영주님의 조언 마음에 새겼으니까. 이제 전보다 훨씬 편해질…….”
“지랄하지 마라.”
브랫 로이드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른은 할 말이 없어져 친구를 멍하니 바라봤고, 그가 재차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를 모를까. 나태 공자 시절에는 방에 틀어박혀서 종일 우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 테고, 검을 든 이후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1분 1초도 편하게 있지 못했겠지.”
“…….”
“너 같은 녀석은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돼. 외출 준비 마치고 따라 나와라. 밖에서 기다린다.”
“갑자기 무슨…….”
아이른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방문을 나서려던 브랫이 고개를 돌렸다.
씨익 웃어 보인 그가 말했다.
“노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놀아 본 사람 옆에 있어야 제대로 놀 수 있다는 말이지.”
“…….”
“오늘 하루, 숙련된 조교가 놀고먹고 쉰다는 것에 대해 지도해 줄 예정이다. 그러니까 군말 말고 따라와.”
탁
문을 닫고 나가는 친구.
그가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직전의 웃음보다 훨씬 밝고 가벼운 웃음이었다.
* * *
자신감 넘쳤던 방안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브랫 로이드는 그다지 잘 놀지 못했다.
맛집이라고 찾아간 곳의 음식은 형편없었고, 유명한 거리악사라고 해서 구경했건만 인상만 찌푸리고 돌아서기도 했다.
미술관의 경우에는 브랫이 먼저 지루하다고 뛰쳐나와 버렸다.
“잘 못 노는 거 같은데?”
“술집이라면 괜찮은 곳을 알고 있다.”
“…….”
“아직 낮이라 안 열었다는 게 한이군.”
뻔뻔한 브랫의 말을 들으며 아이른이 피식 웃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브랫이 자신보다 사회 경험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21살의 젊은 나이다.
게다가 인생의 절반을 검술관에서 보냈을 테니,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허나 지루하지 않았다.
짜증 나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위한 친구의 마음.
그것을 느낀 아이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사람의 악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대상 역시 이를 느끼고 똑같은 증오를 보내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선의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으면, 자연스레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한 마음은 반대로 흘러가고, 긍정적인 순환이 이루어진다.
지금의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을 때는 나가지 못하고 자신의 안에만 고여 있던 감정.
그것이 브랫의 선의에 자극받아 흐르기 시작했다.
미래의 불안을 끌어다 걱정하던 아이른은 사라지고,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아이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오빠?”
다음 날에는 키릴 파레이라의 데이트 신청이 있었고.
“아이른! 나, 나, 새로 사귄 친구들 많은데, 같이 보러 갈래? 나랑 똑같은 검은 고양이도 있어!”
그 다음 날에는 루루의 초대가 있었다.
그 다음 날도, 다음의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브랫, 키릴, 루루, 로이드 영주와 백작부인까지.
자신을 향해 흘러들어오는 선의를 아이른은 무시할 수 없었다.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꿈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오늘은 괜찮아도 내일은 그렇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더는 그런 감정에 붙잡히지 않았다.
꽃을 볼 때도 꽃에 집중할 수 없었고.
바람이 불어올 때도 바람을 느낄 수 없었던 아이른이었다.
허나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할 때는 달랐다.
브랫과 함께할 때는 브랫을 향해.
키릴과 함께할 때는 키릴을 향해.
루루와 함께할 때는 루루를 향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느끼며,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심력 낭비를 해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바보 같았구나, 나.’
음악회관의 푹신한 의자에 앉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주변을 돌아봤다.
브랫, 키릴, 루루, 랜스, 그리고 백작내외까지.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였다.
표정은 제각각이었으나 마음은 같았다.
자신을 향해 흘러들어오는 선의를 느끼며, 그는 처음으로 불안한 미래가 아닌 즐거운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뭘 봐.”
“…….”
“이제 시작하니까 멍청한 표정 짓지 말고 앞이나 봐라. 음악은 귀로만 즐기는 게 아니라 눈과 함께 즐기면 더 좋다.”
“아들아.”
“예, 어머니.”
“개소리 집어치우렴.”
“…….”
“키릴, 나 무서워…….”
“괜찮아. 내가 안아 줄게.”
“응…….”
아이른은 소리내서 웃지 않았다.
허나 머금은 미소는 사라지 않았다. 전에 없이 밝은 얼굴의 그가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고,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
음악은 잘 몰랐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아이른이 아는 악기조차 이게 전부였다.
지휘자의 멋들어진 손놀림에 따라 울려 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그가 생각했다. 어제 거리에서 들은 음악과 크게 다른 점을 못 느끼겠다고.
허나 상관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과거의 자신과 달리 온전히 지금의 상황에, 분위기에,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선율을 느끼며.
아이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음, 좋군.”
“아들.”
“예, 어머니.”
“뭐가 어떤 식으로 좋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니?”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
“예.”
“잘 모르면 박수나 열심히 치렴.”
“주의하겠습…… 음?”
어머니의 말씀에 순순히 굴복하던 브랫이 옆을 바라봤다.
눈을 감은 아이른의 모습이 보였다.
자는 게 아니었다.
그와는 전혀 다른…….
검사의 모습 같기도, 구도자의 모습 같기도 한 친구의 모습을 본 순간.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식이…….”
그의 입에서 황당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설마?”
루루의 물음, 그리고 바로 뒤에 이어진 랜스 페터슨의 굳은 얼굴.
그의 얼굴을 쳐다본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른 이 녀석…… 뭔가 깨달음이 찾아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