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29화 (229/388)

◈ 78. 오래 걷는 방법 (2)

“세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있다고 들었네.”

“예?”

“아들에게 들었지.”

“아…….”

술에 깨기 위해 산책에 나선 지 10분쯤 지났을까.

필립 로이드 영주가 돌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아이른은 잠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 민망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품은 뜻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허나 그런 큰 뜻을 자신 정도의 사람이 입에 담았다는 것이, 로이드 영주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 그것이 신경 쓰였을 뿐.

허나 그런 생각은 잠시였고, 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검을 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멋지군.”

필립 로이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아이른은 반 발짝씩 앞서 나가는 그를 따랐고, 어느새 그들은 영주성이 아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가벼운 산책이 아니었나?

혹시,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생각인 걸까?

이런 생각이 들 때쯤, 로이드 영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이른 군의 뜻만큼 큰 꿈은 아니지만, 젊었을 때의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네.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좋은 영지를 만들겠다는.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엔 우스갯거리가 될 법한 꿈이지만, 당시만 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꽤 많았지. 그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쳤던 때가 기억나는군.”

‘그분들도 꽤 힘드셨겠구나.’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아이른은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고, 로이드 영주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들에게서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네가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민을 많이 했네. 이 훌륭하고 바른 청년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을 보여 주는 게 좋을까? 잘 떠오르는 게 없더군. 하지만…… 오늘 자네와 짧게나마 함께하면서 생각했네.”

“어떤…….”

“조금만 더 걷지. 조금만 더 가면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거리가 나오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이드 영주는 다시 입을 닫았고, 아이른 역시 침묵 속에서 그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머릿속에는 온갖 것이 떠올랐다.

어떤 것을 보여 주려는 걸까?

잘 정비된 도시의 아름다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큰 규모의 병원?

그도 아니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도시의 또다른 자랑거리?

무엇이 됐든 빨리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덕분에 걸음이 조금 빨라졌지만, 상관없었다. 로이드 영주의 걸음 또한 아까보다 빨라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에 눈 앞에 펼쳐진 장소는 아이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이곳은…….”

“빈민가라네.”

“…….”

“내 영지에서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곳. 해결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곳.”

“…….”

“조금 걸을까? 아,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아이른 군이 지켜 주게. 나는 검에 소질이 없거든.”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 그가 천천히 로이드 영지의 어둠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로 듣기는 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지라 해도 치안이 좋지 않고, 불결한 뒷골목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저 자신이 찾아가지 않았기에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허나 로이드 영지에까지 이런 곳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워낙 좋은 인상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간극에서 오는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쓰레기 냄새, 토사물 냄새, 깨지고 부서진 담벼락, 그리고 숨어서 자신들을 엿보고 있는 정체 모를 사람들의 눈빛, 숨결…….

다행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로이드 영주와 아이른은 탈 없이 빈민가를 빠져나왔다.

다만, 아이른의 마음은 전보다 어둡고 무거운 상태였다.

그가 필립 로이드를 바라봤다.

영주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한 장소를 보여 준 것일까?

“젊은 시절의 나는 열의가 가득했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음에도 자신감이 넘쳤어. 오히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막대한 재산, 그리고 왕립 아카데미에서 쌓은 지식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지만 설렘의 감정마저 품고 있었지.”

“…….”

“시작은 나쁘지 않았네. 세금을 조금 낮추고, 치안에 조금 더 신경을 쓴 것만으로도 영지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어. 고작 3년의 노력만으로도 이렇게 효과가 크니, 10년쯤 노력하다 보면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영주도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어.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세월이 지남에 따라 깨달았다네.

로이드 영주의 뒷말은, 그의 사정을 모르는 아이른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씁쓸한 기운이 묻어났다.

영지민을 위해 세금을 낮추자, 주변 영지들의 은근한 견제와 압박이 쏟아졌다.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흉년에 곡식을 지원하자 이번에는 공작가와 갈등이 생겼다.

왕국 최대 곡창지대를 소유한 그들에게 있어서 로이드 가의 처사는 손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외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정 역시 생각과는 달랐다.

학문으로만 배웠을 때와 현실의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한 문제를 해결하면 그에 영향을 받아 두세 가지 문제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번뇌의 굴레였다.

24시간을 영지를 위해 노력했다.

식사를 할 때도, 정원을 거닐 때도 계속해서 생겨나는 일거리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영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로이드 영주에게 휴식이란, 자신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

“그리고 여전히 영지는 문제가 많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쌓여 있어.”

“…….”

“아이른 군.”

“예.”

“나는 내가 해 온 일들이, 자네가 품은 뜻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까지 아이른 군을 데려온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매 순간 전력 질주로 달려가기엔, 우리가 품은 뜻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지.”

“…….”

“그렇지 않은가? 나도 나지만, 자네의 꿈은 평생을 다 바쳐도 티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렵고, 커다란 꿈이야. 개인의 노력만으론 이룰 수 없고, 한 세대의 노력만으로도 이룰 수 없지. 세대에 세대를 거쳐 노력이 이어져야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야. 그런데 자네 마음은, 행동은 어떤가?”

“…….”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그건 노력이 아니야.”

“노력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네. 그저 떼를 쓰는 것뿐. 수백, 수천, 수만 명의 노력이 더해져도 될까 말까 한 일을 혼자서 끌어안는 것도 모자라, ‘왜 안 되지?’라는 생각에 감정이 묶여 있는데…… 그게 떼를 쓰는 게 아니면 뭘까?”

“…….”

“오해하진 말게. 아이른 군, 자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고민과 행동이 가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니. 다만 길게 봐야 할 일은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나아가야 맞다는 거지. 아, 그렇지 않다는 말은 하지 말게. 아이른 군과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알 수 있어. 자네, 요즘 들어 제대로 쉰 적이 없지?”

“……최근에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게. 아니, 거짓말은 아니겠군. 하지만 내가 볼 땐 그건 쉬는 게 아니야. 편히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뉜다고 휴식이 아니라는 말일세. 왜냐면…….”

자네는 쉬려고 마음먹은 순간마저도, 자네가 품은 뜻에 매몰되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

……로이드 영주의 이 말을 들은 순간, 아이른은 머릿속에 쟁여 놨던 반박의 말들을 모두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빈민가와 달리 깨끗하게 청소된 광장을 지나고.

흠집 난 벽돌 하나 없이 잘 정비된 거리를 지나고.

다시금 돌아온 영주성의 앞에서, 필립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아이른 군, 요새 잠은 푹 자고 있나?”

“예?”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젊었을 때 나는 제대로 못 잤거든. 자면서도 긴장과 불안, 걱정이 넘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속이 쓰렸어. 불쾌한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느낌도 들고.”

“…….”

“중늙은이에 하루 30분 운동도 겨우 하는 내가…… 젊은 소드마스터의 건강 걱정을 하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내가 본 아이른 군의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네.”

로이드 영주가 미소를 보였다.

여전히 날카롭고 사나운 눈매.

허나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스한, 염려와 격려가 담긴 입가의 미소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반기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손님 방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지. 오늘은 고급 침구에 누워 푹,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으면 좋겠군.”

“…….”

“약속할 수 있겠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하, 아이른 군은 매사에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해서 탈이야. 그래도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처음으로 육성 웃음을 터뜨린 필립 로이드가 한발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른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로이드 영주가 자신에게 한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가르침은, 어찌 보면 이안의 가르침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암흑 결계에서 광대 악마로부터 깨달은 것과도 다를 것이 없었다.

허나 조금 더 깊게, 진하게 아이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일까?’

한창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연무장의 한 가운데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다름 아닌 브랫 로이드였다.

단순히 검술을 수련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기엔 평소 그의 검술 스타일과 결이 달랐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필립 로이드가, 천천히 아들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밤중에 뭐 하고 있느냐?”

“고독을 베고 있습니다.”

“…….”

“…….”

“이해하게. 연애를 시작한 이후, 아들이 조금 이상해졌어.”

장자에게 연인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저런 꼴을 보고 있으면 참 묘하단 말이지…….

투덜대는 필립 로이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랫은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방으로 돌아온 아이른이 몸을 씻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로이드 영주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몹시 편안했다.

이미 알고 있는 바이긴 했다. 벌써 영지에 머무른 지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하지만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자신이 깊게 잠을 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아이른은 비로소 깨달았다.

기껏해야 두세 시간.

그 이상은 잘 수 없었다.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로이드 영주의 말이 깊게 와닿았는지.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푹 자자…….”

지그시 눈을 감는 아이른 파레이라.

잠시 후, 그는 잠에 빠져들었고.

“…….”

꿈을 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