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오래 걷는 방법 (1)
“후우.”
로이드 영지의 소연무장.
평소와 마찬가지로 검을 수련하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 때문은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찌는 한여름에도, 지금보다 훨씬 체력이 엉망이었던 15살에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던 자신이었다.
그가 한숨을 쉰 이유는, 여전히 속의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
물론 브랫 로이드와 검을 나누고,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곧바로 깨달음이 올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이른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딘가 부족하고, 산만하고, 붕 뜬 느낌이라는…… 추상적인 기분만을 느끼고 있을 뿐.
이렇듯 문제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답을 내놓으라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생각하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마음이 들끓는 일은 없다는 점이랄까.
아이른은 이그넷과 헤어진 직후를 떠올렸다.
당시의 자신은 조슈아 린제이의 조언을 들었음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였었다.
단순히 혼자서 괴로워한 수준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이 겉으로 발산되어 동생과 루루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정도로.
지금은 그렇지는 않았다.
마음을 타고 흐르는 물이 계속해서 열기를 식혀 주었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줬다.
비록 커다란 물웅덩이 하나는 여전히 고인 채 흐르지 않고 있었지만, 억지 부린다 해서 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이미 한번 뼛속 깊이 느껴 보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육신이 피로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오후 다섯 시쯤 됐을 뿐인데 벌써 지칠 리는 없다. 피로한 건 정신이었다.
아이른은 멋들어진 로이드 가문의 풍경과 맑은 하늘을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암흑 결계에서 배웠듯, 움켜쥐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역시 노력이었다.
다만.
“…….”
오늘따라, 그런 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었다.
로이드 가의 사병들이 훈련하는 대연무장과 달리, 이곳 소연무장은 손님, 혹은 브랫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보니 인적이 드물었다.
기껏해야 늙은 관리인 몇이 교대로 이곳을 지킬 뿐이었다.
헌데 오늘의 관리인은 뭔가 이상했다.
일단 한 명이 아니라 둘이었고, 행동거지에 묘하게 기품이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행색은 남루한 데 비해 복장만으로 가릴 수 없는 고귀함이 엿보였다.
문제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시종일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련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시선은 끊김이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몹시 매서웠다.
오러의 양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자신의 목숨을 노리러 온 자객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서슬 퍼런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휘익
“…….”
아이른이 대놓고 그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연무장 외곽을 청소하는 척을 하는 두 사람.
몹시 신경 쓰였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가기는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 두 관리인의 인상이 몹시 서늘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른. 저 사람들, 자꾸 너를 쳐다봐…….”
“알고 있어.”
“엄청 무서운 사람들 같은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
아이른도 ‘그럴 필요 없다’라고 말하진 못했다.
엄한 사람이 로이드 성안에서 대놓고 활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들이 위협적인 무력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가 조용히 답했다.
“눈 마주치지 말자.”
“그럴까?”
“응. 아니, 그냥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이따가 브랫한테 물어봐야…….”
“뭘 물어본다고?”
“아, 브랫.”
때마침 브랫 로이드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있던 루루가 뾰로롱 그에게 날아갔고, 아이른 역시 그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아버지, 어머니.”
“…….”
“…….”
“뭐지?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나?”
아이른은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 더 그의 얼굴을 관찰한 뒤, 고개를 돌려 연무장 관리인으로 착각했던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가 비슷했다. 브랫이 가끔 보이는 차갑고 무뚝뚝한 느낌을 수십 배 증폭시키면 저런 느낌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연무장 관리인인 줄 알았어. 아침부터 쭉 쳐다보고 계셔서.”
“저러고 있는 관리인이 어딨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상하면 가서 물어봤어야지.”
“음, 그게…….”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라고 말하기엔, 뭔가 친구의 부모님을 욕하는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다행히 브랫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뚜벅뚜벅 자신의 부모님을 향해 걸어간 그가 뭐라 뭐라 말을 꺼냈고, 둘 역시 꾹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잠시 후, 브랫을 필두로 한 단란한 가족이 아이른을 향해 다가왔다.
로이드 가의 장자가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검술관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음.”
“으음.”
“……안녕하세요. 파레이라 가의 장남,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
조금 낯뜨거울 수도 있는 표현을 솔직하게 사용한 브랫을 보며, 아이른이 고마운 감정을 품었다.
허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필립 로이드와 카야 로이드, 둘의 시선이 여전히 날카롭고, 표정이 굳어 있다는 점이었다.
“…….”
“…….”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루루의 딸꾹질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에 짓눌린 검은 고양이는 입을 틀어막은 채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브랫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하지 마라. 부모님이 원래 낯을 많이 가리신다.”
“맞다.”
“그래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렇군요.”
“아마 네가 궁금해서 그러셨던 모양이다. 예전에도 내가 네 얘기를 많이 했거든.”
“그것도 맞다.”
“그렇답니다.”
“아, 네.”
“…….”
“…….”
오해가 풀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뚝뚝 끊기는 대화 속에서 아이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지?’
아이른이 이곳에 온 것은 주디스의 편지를 전하고 브랫과 검을 논하기 위함도 있지만, 브랫의 부모님과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하고 즐거운 영지의 분위기.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자신이 뜻을 펼쳐 나감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허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무리였다.
자기도 꽤 낯을 가리는 편인데, 상대는 그런 자신보다 훨씬 심하다.
브랫이 중간에서 노력한다고 될 것이 아니었다. 랜스와 키릴, 루루가 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듯 고민이 깊어지던 와중이었다.
아이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조금 있으면 저녁인데…… 가볍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
“…….”
로이드 부부는 말이 없었다.
허나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매서운 눈빛.
허나 그것을 가릴 정도로 활짝 피어난 입가의 미소.
이를 본 아이른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브랫이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큰일 났군.’
* * *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참가자는 로이드 영주 내외와 아들, 파레이라 남매, 루루와 랜스였다.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에 이름만 들어도 눈이 돌아갈 만큼 귀한 술이 줄줄이 올라왔다.
문제는 술만 올라왔다는 점이다.
“…….”
“…….”
“……저기, 요깃거리는, 따로 없을까요?”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립 로이드에게 키릴이 물었다.
꽤 용기를 낸 발언이었다. 기가 센 그녀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로이드 영주의 눈빛은 매서웠다.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란과 아몬드, 럼주를 섞어 만든 칵테일이네.”
“네?”
“이 정도면 훌륭한 안주지.”
“…….”
“…….”
어둠처럼 퍼지는 고요 속에서, 랜스가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그럼 물은…….”
“맥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요.”
“…….”
“…….”
“……농담이랍니다.”
카야 로이드가 수줍게 웃으며 하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뒤늦게 푸짐한 요리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루루, 키릴, 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찬가지로 안도한 표정을 짓는 아이른에게, 맞은편의 브랫이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부모님이 종종 하는 장난이다.”
“브랫, 부끄러우니 그 정도만 해라.”
“예, 아버지.”
필립 로이드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브랫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엷은 미소를 지은 영주가 잔을 들었다.
애송이 같은 식전주가 아니었다.
잔향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 독주를 들어 올린 그가 입을 열었다.
“랜스, 그리고 아이른. 둘 다 아들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다른 이들도…… 고양이 손님도 무척 반갑네.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들도록 하고, 술은 강요하지 않으니 조절해서 마시도록 하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첫 잔부터 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로이드 영주의 말이 끝나자 루루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술을 들이켰다.
아이른이 생각했다.
‘몇 도짜리지, 이거…….’
“좋지 않나? 30년이라는 긴 세월 숙성된 덕분에 58도치고는 넘김이 굉장히 부드럽지. 처음 마시는 사람은 30도라고 해도 믿는다네.”
“그렇군요…….”
생각보다 훨씬 독한 술이었다.
아이른이 화끈거리는 속을 느끼며 미소를 짓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로이드 영주의 잔이 채워져 있던 것이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인 카야 로이드도, 아들인 브랫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로이드 일가 모두의 잔이 채워져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눈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른 속도.
“……예전부터 꼭 만나 보고 싶었다.”
또다시 잔을 비운 뒤 말을 건네는 필립 로이드.
술이 들어가서일까, 술자리의 분위기가 편해서일까. 그의 표정은 연무장에서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상태였다.
“재차 말하지만, 꼭 내게 맞출 필요는 없다. 마실 수 있을 만큼만 마셔도 되니 부담 갖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아이른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자신에게만 볼일이 있다는 듯, 시종일관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필립 로이드와 카야 로이드.
그런 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자기들끼리 대화를 시작해 버린 키릴과 랜스, 그리고 루루.
브랫은 어느 쪽에도 끼지 않고 있었지만, 딱히 자신을 도와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세 잔을 연거푸 마신 그에게서 관람객의 분위기가 풍겼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이드 내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의 술잔은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
* * *
2시간이 지났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아이른 파레이라는 올해 중 가장 많이 취해 버렸다.
로이드 내외가 술을 강권한 탓은 아니었다. 처음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이 마시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의 잔을 비우는 데에만 열중했다.
문제는, 그들과 아이른 모두가 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은 있다.
하지만 그 주제를 꺼내기에는 그다지 친분이 깊지 않다. 분위기가 몹시 어색하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 술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이 갈 수밖에.
덕분에 아이른은 끊임없이 제공되는 술을 빠르게 마셔 버렸고, 소드마스터의 강건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취기를 느끼는 수준까지 몰려 버렸다.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다행히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더 마셨다간 큰일 나겠다, 속으로 중얼거린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지. 날이 더워서 선선한 밤공기를 맞고 싶군.”
“나는 여기까지만 해야겠어요. 아직 여독이 좀 있어서…… 젊은 분들끼리 조금 더 놀아요.”
그런 그를 따라 로이드 영주가 일어났고, 잠시 후엔 백작 부인마저 자리를 비웠다.
루루 역시 주변 고양이들과 놀고 싶다며 창밖으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브랫 로이드와 랜스 페터슨, 그리고 키릴 파레이라.
“후, 많이 취했네. 나도 일어나야 하나.”
“…….”
“…….”
“그런데 이대로 자러 가는 것보다는, 밖에 산책이라도 하면서 술 조금 깨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
“랜스 오빠?”
“응?”
술에 적당히 취해 별생각 없던 랜스가 부름에 반응했다.
싱긋 미소를 지은 키릴이 말했다.
“같이 정원이라도 걷지 않을래요?”
“어? 어어…….”
대답의 ‘어’가 아니었다. 고민을 이어 가는 와중에 흘러나온 목소리일 뿐.
하지만 키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산만 한 덩치의 랜스를 솜씨 좋게 끌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브랫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독하구나.”
“…….”
“…….”
하인 몇이 서로 눈치를 봤다.
순식간에 혼자가 된 도련님께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걸까?
술이라도 함께 해야 맞는 걸까?
아니면 조용히 이대로 있어야 할까?
정답은 금세 나왔다.
“다 나가다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
그리하여 완전히 혼자가 된 브랫 로이드.
그가 조용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디스의 편지였다.
조금이라도 구겨질까, 브랫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잘 쓴 글씨도, 잘 쓴 문장도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연거푸 세 번이나 서신을 정독한 그가 이를 곱게 접은 뒤,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콸콸콸
독한 술을 온더락(On the Rock) 잔에, 얼음도 없이 꽉 채운 브랫이 순식간에 이를 비워 냈다.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주디스…….”
오늘따라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그 시각.
아이른 파레이라와 로이드 영주는 영주성을 나와 도시를 걷고 있었다.
잘 정비된 거리를 지나고.
깨끗하게 청소된 광장을 지나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은 지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이른이 전혀 생각조차 못 했던 어둡고 불편한 장소.
바로 로이드 영지의 빈민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