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미쳤구나 (3)
“…….”
동기들을 위해 중앙에서 물러난 랜스 페터슨이 지그시 둘을 바라봤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좌절감과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길 거란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가.
자그마치 20대 초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사다.
이제 겨우 졸업 시험에 나선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른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랜스는 착잡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보다 앞서 나갔던 시절이, 자신에게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른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러 소드를 뽑지도, 전력을 다해 힘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랜스는 철벽을 마주한 듯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뚫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막막함.
반대로 상대는 언제라도 자신의 검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
랜스가 도중에 대련을 포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해.’
그가 좋지 않은 상념에 잠긴 사이, 아이른과 브랫이 준비를 마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정겹게 느껴졌다. 자신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았기에, 랜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물론 계속해서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브랫에게 말했다.
“어이, 브랫! 오랜만에 혼 좀 나겠는데?”
“조용히 해. 안 그래도 괴물 앞이라 심장 떨려 죽겠으니까.”
로이드 가의 장자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 역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훈훈한 분위기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후, 브랫의 쇄도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카아앙-!
목젖을 노리고 날아드는 찌르기.
대련에서 보이기엔 몹시 위험한 수였지만, 아이른은 개의치 않았다. 중단세를 유지하고 있던 그는 전혀 물러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힘없이 튕겨 나간 검이 원을 그리며 하단을 쓸었다. 아이른은 이번에도 막아 냈다.
막고, 막고, 방어하고.
브랫의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쏟아졌지만, 젊은 소드마스터는 전혀 당황하는 일이 없었다.
마치 상대의 공격이 어디로 날아들지 아는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실제로 그러했다. 흐름을 읽고 먼저 대비하면 중심이 흐트러질 일도, 체력의 낭비가 생길 일도 전혀 없었다.
그렇게 축적한 힘을 제대로 발휘한 건, 상대의 일곱 번째 검격을 막아 낸 시점이었다.
쩌어엉-!
“!”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브랫이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과 싸울 때면 가끔 이렇다.
사람이 들고 있는 검이 아니라, 마치 쇳물을 부어 만든 철제 동상을 내려친 것처럼 손이 저린 느낌.
아마 오러 운용의 ‘경화’와 정령의 힘을 섞은 기술일 텐데, 함께 오행신공을 배웠음에도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서글프지는 않았다.
원래 그런 놈이다. 잘난 녀석이 가진 것을 하나하나 부러워하다 보면 끝이 없다.
앞으로 발을 뻗는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잘하는 것…….’
그것에만 집중하자.
옅게 흐르는 숨결과 함께, 브랫의 검이 더욱 부드러운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터엉!
터어엉-!
텅!
돌격에 나선 아이른의 검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일검 일검이 빠른 것은 아니었다. 허나 감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쳤고, 절도가 있었다.
브랫은 전쟁터에서 맹장을 만난 것처럼 시종일관 뒤로, 옆으로 물러났다. 아이른의 영토가 점차 넓어졌다.
허나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것은 무리였다.
다시금 검을 내려치는 금발 검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터어엉-!
각도를 흐트러뜨린다.
타이밍을 흐트러뜨린다.
타격점을 흐트러뜨린다.
부드럽게 그려지는 원이 이를 가능케 만들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브랫은 끊임없이 원형의 검로를 타며 아이른의 거력을 흘려 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검뿐만이 아니라 발걸음 역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터엉!
검만으로 채 흘려 내지 못한 충격을, 체내의 오러를 통해서 받아 낸다.
그리고 그 충격이 육체에 쌓이기 전에 발걸음을 통해 외부로 배출된다. 마치 물을 흘려 내는 것처럼.
그렇게 수십 합의 검격을 교환하고 나니, 연무장이 온통 습기로 가득 찬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어느새 둘이 서 있는 바닥은 브랫이 흩뿌린 오러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치 물을 때리는 느낌이야.’
정확히는 물 위를 걷는 사람을 상대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받는 충격을 모조리 수면 아래로 흘려 버리는. 그러면서도 절묘한 컨트롤로 균형은 잃지 않는. 그야말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상대.
하지만.
아이른은 자신이 밀릴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터엉-!
터어엉!
쾅!
쾅!
콰아앙!
“크윽!”
아이른의 검이 부드럽게 뻗어 갔다.
허나 이어지는 검격을 막는 브랫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비교적 여유롭던 손발도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검에 더 큰 힘이 담겨서가 아니었다.
상대의 검이 더 빠른 속도로 휘둘러진 것도 아니었다.
맥을 짚었다.
자신의 흐름을 가닥가닥 끊어 놓을 포인트로 아이른의 검이 찔러 들어오는 순간, 브랫의 마법이 깨졌다.
더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고, 충격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젠장, 졌다. 후우.”
“후우, 고생했어.”
“괴물 같은 녀석. 그래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브랫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영지로 돌아온 이후, 그는 피나는 수련 끝에 여행 도중의 깨달음을 절반 정도 체화했다.
나머지 반은 언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요원한 상태였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오러 소드를 쓰지 않는’ 아이른을 상대로는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자신이 강해진 만큼, 저 녀석도 강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이.
그 사실이 브랫에게 약간의 씁쓸함을 안겼지만, 그는 이내 털어 버렸다.
‘괜찮아. 나는…….’
이제 커플이니까.
저 녀석은 아직도 솔로고. 둔한 녀석.
굵고 짧은 정신승리로 자신의 멘탈을 보존한 브랫이 아이른에게 물었다.
“뭐가 문제라는 거냐.”
“어?”
“네가 말했잖아. 나와의 대련을 통해 얻고 싶은 게 있다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한 거 아니야?”
“음…….”
아이른이 고민했다.
맞는 말이었다.
무언가 커다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산만한 상태라는 표현이 옳은 것 같았다.
물론 이를 짧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의 표정이 곤란하게 변해 갔다.
이를 본 브랫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아이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와서 앉아라.”
“어?”
“오랜만에 논검이나 하자.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 얘기하다 보면 뭔가 얻는 게 있겠지. 나도 물어보고 싶은 거 많고.”
“……그래.”
언제 곤란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브랫에게 다가가는 아이른.
둘은 이내 검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루루가 하품을 한 뒤에 말했다.
“쟤들 또 저러네.”
“자주 저랬어?”
“응. 보통 아이른이 똥 마려운 표정 짓고 있으면 브랫이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왜?”
“아니, 처음 봤을 때는 얼빠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잠깐 뜸을 들인 키릴이 말을 이었다.
“꽤 괜찮은 면도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진심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한들, 뒤처져 있던 이가 자신을 추월한다면 시기심과 열등감이 들 수밖에 없다.
허나 요술사 키릴이 들여다본 브랫의 마음에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진심으로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릇이 넓어.”
“브랫이 마음이 넓긴 하지.”
“주디스 언니가 반한 게 저런 면 때문인가? 하여튼 신기한 사람이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하고.”
“맞아. 브랫도 좋은 친구야! 너무 미워하고 그러지 마!”
“미워한 적은 없거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 것 아닌 일로 투닥거리는 키릴과 루루.
그런 그들 쪽에 시선을 줬던 랜스 페터슨이,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브랫의 패배가 확정됐을 때, 자신이 품었던 감정을 떠올렸다.
‘조금이지만, 기뻤었지.’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손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아이른에 더해, 브랫마저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가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야말로 추하고 못난 감정이었다.
그 때문일까.
패배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친구와, 그런 그를 높게 평가하는 두 요술사들의 말이 마치 자신을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브랫을 이겨 본 적이 없구나.’
랜스의 상념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라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랜스, 뭐 해?”
“응?”
“아니, 왜 거기 멀뚱히 서 있냐고. 안 낄 거야? 이럴 때 출세한 친구 덕 좀 봐야지.”
“무슨…….”
“소드마스터 특강이 공짜라는데, 빨리 와서 같이 듣자고. 이 녀석 말솜씨도 옛날보단 꽤 늘은 편이라 들어 줄 만해.”
“아니, 같이 논검하는 건데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그래? 랜스, 무려 소드마스터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재차 오라고 재촉하는 브랫 로이드.
그리고 정말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른 파레이라.
동기들의 시선을 받은 랜스 페터슨은, 잠시 먹먹한 침묵을 지켰다가…….
“그래.”
이내 미소를 띄우고는 그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헌데, 합류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
“키릴? 너는 왜…….”
랜스의 옆자리에 살포시 앉은 키릴 파레이라를 보며 크로노의 검사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녀는 당당했다.
여관에서 주문한 논 알코올 모히토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말했다.
“방해 안 하고, 조용히 듣기만 할게.”
“……?”
“굳이? 네가 알아듣는 거 별로 없을 텐…….”
“감이야. 요술사의 감. 여기 얘기 듣고 있으면, 요술사로서 뭔가 얻는 게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
“…….”
“요술사의 감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는 알지?”
키릴이 아이른을 바라봤다. 그리고 브랫을 바라봤다.
눈빛이 몹시 날카로웠기에 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해요. 생각해보니 조금 제멋대로였던 것 같은데…… 불편하시면 물러날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 키릴 양?”
“그냥 키릴이라고 하셔도 돼요.”
키릴이 랜스를 쳐다봤다.
아이른과 브랫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부드러운 눈빛.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랜스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되지. 당연히 되고 말고.”
대답은 랜스 페터슨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키릴 파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사람을 쳐다봤다.
몹시 진지하고, 귀족적인 미소를 입에 건 채 자신을 바라보는 브랫 로이드.
그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나도 브랫 오빠라고 불러도 된다, 키릴.”
“키릴 양이라고 부르세요, 로이드 씨.”
“그러도록 하지.”
곧바로 수긍한 브랫 로이드가 동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할까?”
논검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