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미쳤구나 (2)
크로노 검술관을 떠나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브랫 로이드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금껏 수련에만 매진하느라 뒤로 미뤄 뒀던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왕국과 대륙의 정치 구도를 배우고, 예법을 다시금 점검하고, 고위 귀족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교양과 학문에 힘쓰고, 영지 사정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주디스와의 약속을 잊지는 않았다.
자기와 자기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쌓은 뒤에 찾아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만나 주지 않겠다고.
덕분에 검술 수련 역시 알칸트라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이어 가야 했다.
그야말로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허나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자신은 유능하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천재 수준은 아닐지 몰라도, 꽤 빡빡한 일정이라도 능히 소화해 낼 역량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를 과신하여 쉼 없이 달려나가기만 하는 건 좋지 않았다.
몸의 휴식을 취한다.
더 나아가서 마음의 휴식을 취한다.
지금의 브랫 로이드가 영주성이 아닌 일반 가게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답답하고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디스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선 이러한 장소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브랫.”
“……?”
그런 그의 앞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화사한 금발에,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꽤 잘생긴 얼굴, 그리고 균형 잡힌 신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린 그가 옆을 바라봤다.
초면인데 낯설지만은 않은 아리따운 여성, 그리고 익숙하기 그지없는 존재인 요술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술이 깼다.
그러자 상황이 객관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부끄러운 꼴을 변명할 필요가 있겠다.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브랫이 갑자기 크게 입을 벌렸다.
“하암……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하품이 계속 나네. 하품 때문에 눈물도 계속 나고.”
“…….”
“…….”
“그런데 당신은 누구? 왜 남의 테이블 앞에서 그러고 있…….”
“브랫.”
“…….”
“…….”
“브랫이라니, 무슨 소리…… 사람 잘못 보셨소.”
“오면서 들었어. 주디스 보고 싶다고 한 거.”
“나도 들었어. 울면서 술 마시고 있었잖아.”
루루가 아이른을 거들었다.
잠시 침묵한 브랫이 재차 변명을 이어 갔다.
“그, 흠…….”
“…….”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내가 말한 사람은 유리스였소, 주디스가 아니라.”
“…….”
“아까 말했다시피 운 것도 아니고. 그냥 하품이 자꾸 나서 눈물이 조금 맺혔을 뿐.”
“…….”
“아니, 애초에 아니라는데 왜 자꾸 우기는 거요? 나 브랫 아니오. 그런 사람 알지도 못하고…….”
“거짓말! 내가 말하는 거 보고도 하나도 안 놀랐잖아!”
루루가 테이블을 쾅쾅, 아니 톡톡 앞발로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에 브랫이 흠칫했다.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말하는 고양이를 눈앞에 두고도 침착한 사람은 대륙에 몇 없을 테니까.
이미 고양이 요술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도 한계였다.
아이른의 눈에도.
루루의 눈에도.
심지어 그 옆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여성의 눈에도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브랫 로이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게 맞지만…….’
브랫이 가게 벽에 걸린 거울을 확인했다.
여전히 마법 변장은 완벽했다. 영지민들이 알아볼까 꽤 비싼 돈을 들였던 건데, 돈값을 했다.
그렇다면 괜찮았다.
그냥 잡아뗀 뒤,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들을 대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브랫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나, 주디스한테 받은 편지 있어.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거.”
“뭐!”
주변 손님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아이른 일행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려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눈치를 본 그가 낮게 한숨을 쉰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꽤 오래 고민을 이어 가던 그가 아이른에게 물었다.
“주디스 보고 왔어?”
“응.”
“괜히 수련 방해하고 그런 거 아니지?”
“아니야.”
“그런데, 거기 뭐하러 간…….”
“인정한 거지?”
“…….”
“브랫, 오랜만이야.”
싱긋 웃은 아이른이 악수를 청했고, 머뭇거리던 브랫이 또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잡았다.
감정이 담긴 듯 힘이 많이 들어갔다.
물론 소드마스터인 아이른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손을 뗀 그가 일행을 한차례 돌아본 뒤, 무게를 잡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뭘.”
“장차 로이드 영지를 책임질 고위 귀족으로서의 브랫 로이드도 멋있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건…… 높은 신분과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있는, 그런 순수하고 로맨틱한 마음을 품고 있는…… 진정한 남자, 브랫 로이드라는 걸 말이다.”
“…….”
“…….”
“어떻게 생각해, 루루?”
“아이른, 브랫 취했나 봐.”
루루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도 뻔뻔한 면이 있었던 브랫이지만, 지금은 정도가 심했다. 조금이지만 속이 더부룩한 느낌도 들었다.
허나 둘의 감정은 키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아이른, 루루와 달리 브랫을 처음 만난 그녀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로이드 영지까지 날아오면서 오빠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온갖 칭찬을 다 들은 뒤에 이런 얼빠진 모습을 보니, 괴리감이 훨씬 심했다.
이 사람은 아니야.
주디스 언니는 도대체 뭘 보고 이런 사람과 사귀는 걸까?
그 밖에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브랫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그때,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또 한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브랫과 아이른보다도 더욱 큰 체격을 자랑하는 인물.
깜짝 놀란 아이른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랜스!”
“뭐야? 아이른, 너 어떻게…… 루루도 있구나. 뭐지? 왜 여기에 있어?”
“안녕, 랜스!”
브랫 패밀리의 1인.
아니, 이제는 엄연히 동등한 관계가 된 랜스 페터슨.
그의 출현에 아이른이 또다시 놀랐다.
루루 역시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등, 산만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브랫이 말했다.
“아아, 말을 아직 안 했군. 랜스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검술관에 랜스가 없었네. 혹시…….”
“응. 나도 졸업시험 때문에 밖으로 나왔다. 가문 돌아가서 이런저런 일 좀 보다가, 수행 떠나기 전에 브랫이나 보고 갈까 해서 들른 참이야. 아, 그보다…….”
랜스가 손을 뻗었다.
씨익 웃은 그가 축하의 한마디를 건넸다.
“……축하해. 소드마스터 된 거.”
미소와 함께 요술사의 눈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어딘가 복잡해 보였던 감정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아니, 정리됐다기보다는 순수하고 진한 반가움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이른이 속으로 생각했다.
‘졸업시험 때문인가. 고민이 많나 보네.’
살짝 걱정됐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악수를 받았다.
직후 브랫과 랜스, 둘 모두에게 자신의 동생을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 어디 갔지?”
그런데 키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자신과 함께 있었다. 옆에서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 싸늘한 시선으로 브랫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조차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두려운 눈빛이었다.
어디 간 거지?
설마, 브랫에게 실망해서 방으로 올라가 버린 걸까?
상념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테이블로 돌아온 키릴의 표정은 전에 없이 화사하고 선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의 검술관 동기분들이시죠? 저는 파레이라 가의 장녀, 키릴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아, 반가워요. 아이른 친구인 랜스 페터슨이라고 해요.”
“…….”
“브랫? 왜 그래, 너도 소개해.”
“…….”
“변장 때문에 그래? 아닌데, 이미 밝힌 거 아니야?”
“……로이드 가의 장남, 브랫 로이드라고 한다.”
“네, 반갑습니다.”
키릴이 고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은 브랫 로이드를 향하지 않았다.
오로지 랜스 페터슨 쪽으로만 쏟아지는 그녀의 관심을 보며, 로이드 가의 장남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취향이 특이하네.’
물론 둔한 아이른은 이런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했다. 루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나 잘게. 재밌는 일 있으면 깨워 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른의 배낭으로 쏙 들어간 검은 고양이.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
“…….”
“……저기.”
“저기.”
“아, 먼저 말해.”
“그래. 계속 여기서 마실 거야? 아니, 술 더 마실 거야?”
아이른의 물음에 브랫이 주변을 돌아봤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는 고양이 루루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이들도 범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조용히 마시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가자.”
“그래.”
“아쉽네. 나는 거의 못 마셨는데.”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근데, 진짜 주디스 편지만 전해 주러 온 거야?”
“으음, 그것도 있고…….”
가게 밖으로 나온 아이른이 잠시 말을 멈췄다.
또다시 펼쳐진 도시의 풍경 속에,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영지네.”
“음?”
“분위기가 좋다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지만, 여기처럼 사람들 표정이 좋은 곳은 못 본 거 같아서.”
“으음. 그거야 당연히 고위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한시도 잊지 않고, 불철주야 영지민들을 위해 힘 쓴…….”
순간, 브랫은 자신의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의 시선인지 알 것 같았다.
슬쩍 웃음을 흘린 그가 꿋꿋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필립 로이드 영주님 덕분이지. 자애로운 어머니 덕분이기도 하고.”
“…….”
브랫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키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웃음이 나온 그가 아이른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우리 부모님께 관심 있나?”
“응.”
“그렇군. 하지만 지금은 안 계셔. 일이 있어서 수도로 가셨거든. 아마 일주일은 있어야 돌아오실 거다.”
“그럼 기다리지, 뭐.”
아이른이 곧바로 대답했다.
쿠바르와 여행을 다니면서.
두르칼리에서 여러 역사서를 들춰보고, 카라쿰과 타라칸의 고견을 들으면서.
그 이후에도 온갖 생각과 고민을 이어 가면서도, 난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오로지 악마를 토벌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인가?
‘브랫의 부모님이라면,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영지의 좋은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른이 변장한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오늘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브랫은 가장 믿음직한 친구였다.
일리아가 방황하고, 주디스가 괴로워하고, 자신이 흔들릴 때도 든든하게 중심을 지켜 줬던 사람.
그런 브랫의 부모님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법 위장을 푼 브랫이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고, 성내 경비병들과 기사들이 절도 있게 예를 차렸다.
“이것이 나, 고위 귀족 브랫 로이드의 위엄이다.”
“…….”
“…….”
“미안. 오랜만에 많이 마셨더니 좀 취했다.”
장난스레 말한 브랫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잠시 후, 몸에서 오러와 함께 다른 무언가가 아지랑이처럼 스르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아이른이 물었다.
“설마, 술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한 거야?”
“그래.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무리 없이 오러를 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부산물 같은 거다. 덕분에 아버지와의 술내기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됐지.”
“…….”
“어때.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할까?”
브랫이 마법 주머니에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그러자 시리도록 푸른 검신을 자랑하는 청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 아니랄까 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연무장의 중앙이었다. 몇몇 기사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해.”
“부탁까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너랑 대련하다 보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그런 생각 때문에 여기 온 것도 없지 않아.”
“크리스토퍼 경?”
“부르셨습니까, 소영주님.”
아이른의 말을 들은 브랫이 갑자기 기사 한 명을 불렀다.
호명된 사내가 빠르게 달려와 예를 갖췄다.
그런 그에게 로이드 가의 장남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현재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소드마스터, 아이른 파레이라다.”
“……!”
“그리고 그 대단한 소드마스터가, 지금 나에게 검술 자문을 구하고 있다.”
“…….”
“나 좀 멋있지 않나?”
“멋지십니다.”
“농담이다. 이상한 소리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대답하다니,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하긴 했나 보군.”
“…….”
“이것도 농담이다.”
“알고 있습니다.”
다시금 예를 갖춘 크리스토퍼 경이 뒤로 물러났다.
아이른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저 멀리 떨어진 키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루루 역시 따라서 고개를 저었다.
랜스 페터슨은 그러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가, 브랫과 아이른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먼저 아이른과 붙어 보면 안 될까.”
“…….”
“…….”
“한참 모자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랜스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브랫 로이드를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젊은 소드마스터가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시작할까?”
“그래.”
짧게 답한 랜스 페터슨도 자세를 잡았다. 그의 몸에서 숨길 수 없는 투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허나,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졌다.”
검을 거둔 랜스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허나 정말로 그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 이번엔 나다.”
그렇기에 브랫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이른을 마주했다.
잠시 후, 두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