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미쳤구나 (1)
주디스와의 대화를 끝마친 뒤, 아이른 일행은 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식사 한 끼만을 대접받은 후 곧장 로이드 영지로 떠나게 되었다.
“재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누군가를 재워 준 건 10년 만이다. 아침 수련해야 하니까 이제 빨리 꺼져.”
“성격이 참 고약하시네요, 이안 관주님하곤 다르게.”
“그 자식도 알고 보면 더럽거든? 그 음흉한 녀석 젊은 시절을 너희들도 봐야 했는데…….”
쿤이 인상을 찌푸리며 몇 마디 더 투덜거렸다.
일행 중 누구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른이 고개를 돌려 주디스를 바라봤다.
그러곤 말했다.
“다음에 보자.”
“그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찾아간다.”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무게감이 남달랐다. 아마 다음에 마주할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터였다. 확신했다.
“키릴.”
“네, 언니.”
주디스가 키릴을 불렀다.
짧은 시간이나마 인연을 쌓은 둘은, 전날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훈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둘은 악수, 그리고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키릴이 덕담을 건넸다.
“항상 응원할게요.”
“날 응원한다고? 내가 힘내면 네 오빠가 지게 되는데?”
“괜찮아요. 오빠도 힘내고 언니도 힘내고 하면, 서로 이기고 지고 하겠죠. 그 정도면 뭐…….”
“나는 평생 이겨 먹을 생각이지만…… 동생이니 그 정도 발언은 눈감아 줄게.”
주디스가 피식 웃으며 말한 뒤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 펄쩍 뛰어오른 루루가 그녀에게 안겼다.
“다음에 또 놀러와도 돼?”
“안 돼. 이제 한동안은 수련에만 집중해야 해.”
“놀러와서 구경만 할게. 그래도 안 돼?”
“그건 되지만, 심심할걸?”
“괜찮아. 브랫이 올 때 같이 찾아올게. 둘이 얘기하는 것만 봐도 재밌을 것 같…….”
“브랫 올 때는 오지 마라. 뒤진다.”
“어? 엥?”
순간 과격해진 주디스를 보며 루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 난 듯 바닥으로 툭 떨어진 고양이를 아이른이 번쩍 안아 들었다.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편지, 잘 전해 줄게.”
“……알았으니까 빨리 꺼져, 이제. 아 씨, 이제 말투 고치기로 했지…….”
여전히 험악한 어조로,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디스.
아이른은 그런 친구가 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눈 그가 그리핀의 등에 올랐고, 다른 이들도 뒤를 따랐다.
“그럼, 가 볼게. 쿤 님, 가르침 감사했습니다.”
“가라.”
“예.”
후우우웅-!
퍼덕, 퍼덕!
잠시 후, 독수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센 날갯짓과 함께 아이른 일행이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졌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로부터, 쿤은 곧바로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인 하루를 보냈다. 독기와 광기가 가득한 수련을 시작했다.
“…….”
주디스는 조금, 조금 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쿤과 마찬가지로 수련에 돌입했다.
후웅!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후우웅!
자신의 목표를 따라잡기 위해서.
후우우웅-!
주디스의 불꽃이, 그 무엇보다 강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 * *
로이드 영지로 날아가는 그리핀의 등 위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겼다.
고작 하루 사이의 일, 두 번의 대련에 불과했지만…… 어제의 경험은 그에게 상당한 자극과 영감을 전해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길, 검사로서의 자신이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된 게 컸다.
‘나는 주디스처럼은 못해.’
모든 단점을 뒤덮을만한 강력하고 예리한 무기를 한계까지 갈고 닦는다.
쉽게 부러질 수 있으나, 무엇이라도 뚫어 낼 수 있는…… 극한의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 쿤과 주디스가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경험과 가르침,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단점을 극복해 나가고, 보완해 나가는 것이 그의 방향이었다.
다섯 정령이 상생과 상극을 통해 시너지를 내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로이드 영지로 향하는 이번 여정은 나름 의미가 깊었다.
아이른과 가까운 인물 중 가장 ‘물’과 가까운 사람이 브랫 로이드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마음이 산만한 상태라는 건데…….’
어젯밤, 주디스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말만 퉁명스럽게 했을 뿐, 스승님은 이미 너를 인정했다고.
그러니까 네가 원하기만 하면 브랫에게 편지를 전해 준 뒤, 곧바로 토벌대에 합류해도 상관없을 터라고.
사실이었다. 떠나기 전, 쿤이 던져 준 오래된 동전 하나가 그 증표였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물건인지는 모르나, 이것을 보여 준다면 율리우스 휼 역시 자신을 내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과연 토벌대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정작 아이른 자신이 ‘자신의 자격’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광대 악마의 던전에서 탈출한 뒤의 그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륙의 모든 악마를 멸절시킬 생각으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안을 만나고.
광대 악마를 또다시 만나고.
쿤을 만나고, 주디스를 만났다.
그 모든 만남에서 정말 많은 것을 얻은 아이른이건만, 이상하게 전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신이 토벌대에 참가할 수는, 이그넷을 비롯한 성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아이른의 표정이 더욱 진중해졌다. 그에 따라 생각 역시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즐거운, 괴롭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목표이자 뜻, 신념이었다.
악마를 토벌하는 것은 그를 이루기 위한 행동들 중 하나일 뿐, 결코 전부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느냐고 자문한다면…….
그 역시, 확실한 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흠.”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른이 조용히 눈을 떴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하늘 위의 풍경이 들어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동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뭔가 생각이 복잡한 것 같은데.”
“조금 그렇지. 뭔가 어려운 게 많네. 그에 비해 내 능력은 한참 부족하고.”
“음…….”
오빠의 고민을 들은 키릴이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크로노 검술관으로 향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당시의 아이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으니까.
똑같이 고민하고, 고뇌하더라도, 지금이 훨씬 나았다.
거기에 최근에 쌓인 신뢰가 더해지자 크게 염려할 것까진 없겠다는 쪽으로 사고가 흘렀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맨날 해 봐야 똑같은 고민은 잠시 내려놓고, 다른 얘기나 하자.”
“어떤 얘기?”
“오빠 친구 얘기.”
“아…….”
“브랫 로이드, 어떤 사람이야?”
키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일리아 린제이를 만났고, 주디스를 만났다.
단순히 오빠의 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는 모르는 오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빠가 어떻게 이렇게 믿음직해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갈 수 있었다.
‘아마 브랫 로이드…… 그분도, 오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겠지.’
그것도 좋은 쪽으로.
그 강렬했던 주디스 언니조차 함락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음, 브랫은…… 가장 어른스러운 친구야. 침착하고, 현명하고, 여유롭고.”
“진짜?”
“응! 브랫은 똑똑해. 가끔 나한테 책도 읽어 주고 그랬어!”
루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이른의 말은 쏙쏙 들어와 머리에 꽂혔다.
브랫에 대한 키릴의 기대감이 더욱 거대해지는 순간이었다.
“빨리 보고 싶네.”
“그러게. 나도 보고 싶다.”
“나도! 키릴, 속도 더 높일 수 있어?”
“평소에는 무리지만, 지금은 될걸? 요술사는 마음이 동하면 더 능력이 좋아지는 사람들이니까!”
“사람 말고 고양이도 그래!”
“어쨌든, 더 빨리 가 볼까?”
“잠깐, 지금도 꽤 빠른…… 윽!”
슈와아아아악-!
직전보다 족히 2배는 빨라진 그리핀의 속도에 아이른이 신음을 흘렸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세찼다.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 뭔가 더 신나는데?”
“재밌어! 빨라! 조금 더 빠르게 해 줘!”
“좋아, 조금만 더 집중하고…….”
슈화아아아아악-!
“이야아압!”
“와! 뭔가 소리 지르고 싶어! 질러도 돼?”
“돼!”
“야호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
“…….”
신이 나서 소리 지르는 루루와 키릴.
그런 둘을 보며, 아이른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키릴 파레이라의 급발진 덕분에 훨씬 빨리 로이드 영지에 도착한 아이른 일행.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웅장하게, 또 고귀한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는 성문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러게. 내 생각보다…… 뭐라고 해야 하지? 하여튼 분위기가 다른데? 다른 도시랑?”
키릴이 둥그렇게 떠진 눈으로 말했다.
물론 규모가 대단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를 제외하면 대륙 중부에서 가장 큰 나라가 거베라 왕국이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위 귀족인 로이드 가문이었으니, 파레이라 영지나 세자르 공국의 도시들보다 훨씬 발전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이 집중한 건, 특히 아이른이 집중한 건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그가 생각했다.
‘밝아. 굉장히.’
지난 2년간 나름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 아이른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힘든 표정을 지으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비교적 치안이 좋은 대륙 중부도 그랬고, 서부로 넘어가는 길목은 더욱 심했다.
도시가 부유하든 아니든 고단한 모습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즐거운 분위기의 도시를 꼽자면 아이젠마르크트였지만, 솔직히 그곳의 인상도 마냥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도박과 내기, 술에 중독된 이들이 거리에 넘쳐났으니까.
이곳 로이드 영지는 그렇지 않았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밝고 행복해 보였다.
경비병도 그랬고, 상인도 그랬다. 일꾼으로 보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놀람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른 일행은 천천히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도 마찬가지야.’
물건을 팔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
느지막한 밤이 되기 전에 손님을 끌어오려는 여관 소년들.
길거리에서 즉석 공연을 펼치는 음악가와, 이를 조용히 지켜보는 이들까지. 모두의 얼굴에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영주가 좋은 사람인가 보네.”
“그러게.”
키릴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잠깐 신기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뿐. 계속 감상에 빠질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은 아니었다.
루루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어느새 어느 숙소가 더 좋은지 탐방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허나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보다 진한 눈빛으로.
더 많은 생각으로, 로이드 영지의 곳곳을 깊게 머리에 담았다.
“좋아. 여기로 가자. 괜찮지, 오빠?”
“어? 아, 그래.”
물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동생의 손에 이끌린 그의 앞에 여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이 꽤 고급진 게, 값이 많이 나갈 것 같았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아이른도, 키릴도, 루루도. 하나같이 부자였으니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방을 잡기 위해 카운터로 걸어가려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아이른이 못 박힌 듯 우뚝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동생의 물음에, 아이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낯선 사람이었다.
잿빛이 섞인 금발에 콧수염을 기른, 40은 돼 보일 것 같은 귀족 사내.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는지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묘하게 낯이 익었다.
“…….”
일단 테이블에 있는 술병이 그랬다.
독한 위스키병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섯 개나 쌓여 있었는데, 사내는 그다지 취한 모습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도 한 잔을 따라 구슬픈 표정으로 넘겼다.
자신이 아는 어떤 사람도, 저 정도로 주량이 셌다.
물론 그것만으로 정체를 넘겨짚는 것은 억측이었다.
하지만.
‘오러의 기질이…… 너무 똑같아.’
오러를 보는 눈.
남들에게 없는 아이른만의 능력이 말해 줬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마법에 의한 위장이라고.
저 사내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다…….”
아이른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 듯, 사내는 연신 술을 따라 마셨다.
중간중간 보고 싶다는 말도 섞었는데, 아이른은 그가 보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드르륵, 의자를 뺀 그가 웃는 표정으로 앉았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크게 눈을 뜨는 친구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말했다.
“브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