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부탁 하나 하자 (4)
“후우.”
들판에 누운 아이른 파레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답답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연속적인 대련을 떠올리다 보니, 절로 그때의 분위기가 떠올라 그랬다.
‘대단했지.’
시간을 멈추고 물을 베어 버린 듯했던 이안도 굉장했지만, 쿤의 검술 역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쪼개진 파도가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 또다시 쏘아지는 쾌검이라니.
무시무시한 속도보다도…….
평생토록 한 분야에만 매달려 왔던 그의 고집, 아니 신념이 검에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경악스러웠다.
쿤의 검에만 놀란 게 아니었다.
주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며시 눈을 감은 아이른이 오크의 영역, 두르칼리에서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직전 대련에서의 그녀를 떠올렸다.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불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그로 인한 아픔마저도 기세로 승화시켜 쇄도해 오던 주디스의 모습은…… 자신이 추구하는 불의 마음을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다.
‘대단해.’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지금껏 여러 명 봐 왔다.
샬럿과 빅터가 그랬고, 그레이슨이 그랬다. 증명의 땅에서의 일리아도 그러했다.
모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열등감과 불길을 품었고, 괴로운 나날 속에 검을 휘둘렀다.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고집스럽고 고독하게 말이다.
하나 이상하게도 주디스를 볼 때는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속에 품은 불꽃이 얼마나 강렬하든, 온전히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가능할까?
주디스가 그러했듯.
자신 역시 그런 말도 안 되는 불꽃을 품고, 상대를 멈춰서게 만들 정도 위협적인 기세를 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넌 못 해.”
그런 아이른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했음인가.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쿤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털썩 주저앉은 그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너나 이안 같은 천재는 절대 못 따라 한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또 다른 것도 잘하고…… 익히는 것마다 성취가 나는, 인생이 즐겁고 신나는 녀석들이 이 고독과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냐? 절대 안 되지. 이런 삶이 가능한 건…… 대륙에 오직 두 명이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리고 방향을 바꿔 집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주디스.”
“…….”
“조금만 기다려. 너랑 네 스승, 동시에 패배할 날이 곧 올 테니…….”
“확실히, 제가 따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체를 일으킨 아이른이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진중한 표정, 진중한 눈빛.
상대의 태도를 본 쿤이 약간의 부담을 느꼈다.
그런 그를 앞에 둔 아이른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천재라고 하셨지만,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의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고, 형편없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동기들과 교관님들의 손을 빌렸고, 검을 익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의 가르침과 조언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족하고, 계속 모자라더군요. 아마 평생토록 남에게 배우며,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 같습니다.”
“…….”
“그런 제가, 홀로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나아가는 주디스보다 앞서고 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대단한 검사들, 그들 모두가 견디지 못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가는 주디스의 모습이.
그런데도 위태롭다는 생각 따위 들지 않게 만드는, 그 정도로 단단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는 자신의 친구가.
아이른은 그 누구보다도 대단하게 보였다. 거대하게 보였다.
한발 앞서 그러한 길을 걸어갔던 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그는 검의 대화를 통해 상대의 인생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들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찾고, 나아가듯.
자신 역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힘들 때는 남의 손을 잡기도 하고.
지칠 때는 타인의 보금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면서.
“……한참 모자란 저지만, 그렇게나마 계속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서…… 주디스의 앞에 부족하지 않은 친구로, 맞수로 남고 싶습니다.”
“…….”
말을 마친 젊은 검사의 눈을, 쿤은 한참이나 바라봤다.
투기를 담은 것도 아니었고, 기세를 내뿜고 있지도 않았다. 하나 아이른은 자신의 속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안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검사의 눈은, 요술사의 것보다도 날카로운 것 같아.’
긴장이 된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닌데 부담과 압박이 장난 아니었다.
물론 쿤 역시 아이른을 딱히 해코지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쉴 뿐.
그가 말했다.
“평소에 재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예?”
“많이 듣는구만.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게 무슨…….”
“애늙은이 같은 놈. 젊은 시절 그런 척만 했던 이안하고는 또 다르군. 진짜로 속이 늙었어. 뭐 어디서 30년 정도 나이 더 먹고 온 거 아니야?”
“…….”
“근데 또 마냥 노인 같기만 한 건 아니란 말이지.”
정말로 그랬다.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것을 보면 주디스 또래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진중함과 침착함, 여유가 느껴졌다.
하나 그와 함께 뜨거운 열정도 느껴졌다.
남의 길을 무작정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타인의 손길을 거절하지는 않는…… 조화와 균형.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심술이 난 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간다.”
“어딜…….”
“당연히 내 집이지. 좁으니까 들어올 생각하지 마. 밖에서 시끄럽게 굴지도 말고. 그냥 꺼져.”
“…….”
“왜, 불만 있…….”
“당연히 불만 있죠.”
아이른의 대답이 아니었다. 키릴의 대답이었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말다툼의 기운을 느낀 루루가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릴은 신경 쓰지 않았다.
허리에 손을 올린 그녀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오빠를 인정해 준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맞다.’
동생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쿤, 주디스와의 대련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악마토벌대 건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허, 고것 참.”
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른도 아이른이었지만, 이 키릴이라는 처자도 보통이 아니었다.
웬만한 사람은 자신의 체격만 봐도 감히 말을 못 붙이는데, 심지어 자신의 검술까지 구경했으면서도 아주 당찼다. 겁이라는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능력이야 꽤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능력보다도 성격이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져 줄 생각은 없었다.
쿤은 그런 남자였다. 인생 선배로서의 아량도, 늙은이의 인자함도 없는, 오히려 10대 청소년보다도 더욱 불같은 사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보다도 더 뜨거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아이른하고 얘기 좀 할게요.”
“…….”
“…….”
집에서 나온 주디스가 비틀비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분위기를 시선으로, 온몸으로 뿜어내며.
이를 본 루루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휘리릭-!
저 멀리 날아가는 루루를 보고, 쿤을 보고.
마지막으로 주디스를 쳐다본 키릴 역시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이 또다시 놀랐다.
키릴을 저렇게 얌전하게 만든 사람은 주디스가 처음이었다. 이안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다.
“아니,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아 좀, 그냥 비켜 줘요.”
“허 참, 제자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스승에게 말버릇이…….”
쿤은 다른 둘에 비해 끈질겼다. 으르렁거리는 주디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하나 제자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몇 마디 귓속말을 끝으로 그 역시 집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고, 들판에는 크로노 검술관의 두 검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털썩.
“아이른.”
“응.”
“두르칼리 때보다도 더 세진 거 같은데, 뭔가 일이 많았나 봐?”
“…….”
“스승님께 듣기로는 무슨 악마도 만났다고 하던데…… 나한테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지?”
“……말해 줄게.”
잠시 뜸을 들인 아이른이 대답했다.
이미 대부분의 일을 아는 뉘앙스였다. 딱히 감출 것도 없는 상황에서 말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례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주디스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주디스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고독하고 괴로운 길을 선택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른은 그녀가 조금 더 행복하고 즐겁기를 바랐다. 검만을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삶을 살아가지는 않기를 바랐다.
오지랖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막무가내였던 것은 주디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아이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했던,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이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로부터 느꼈던 모든 생각과 감정마저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대한 주디스의 반응은…….
“흠. 좋네.”
“뭐가?”
“너도 그렇고, 일리아도 그렇고, 이그넷도 그렇고.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천재들이네.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
“이 정도 분노, 딱 좋아. 오늘 들은 이야기만 떠올려도 수련에 도움이 되겠어. 고맙다, 아이른.”
“하아.”
아이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주디스는 주디스였다.
피식 웃음 지은 그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주디스의 입에서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분위기의 말이 튀어나왔다.
“고마워.”
“…….”
“보자마자 욕해 놓고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진짜야. 나도 알아. 내가 얼마나 개 같은 성격이고, 지랄 맞은 녀석인지. 잘못한 것도 없는…… 아니 시발, 잘못은 개뿔. 오히려 나 도와주려고 어떻게든 고생하는 너한테 만날 때마다 이러는 거, 미안하다. 다음에 안 그럴 거란 약속은 못 하겠는데…… 아무튼 미안해.”
“어, 어어…… 그래.”
주디스의 진심 어린 사과에 아이른이 당황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녀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오히려 이런 모습이 더 어색했다.
하지만 계속 어색한 모습으로 있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주디스도 진지할 땐 진지했지.’
아이른이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크로노 검술관의 최종 평가에서.
대륙 서부의 5년 만의 재회에서.
증명의 땅에서, 그리고 그 밖의 몇몇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보였던 속마음은 마냥 거칠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스했지.’
검사로서의 주디스가 아닌, 절친한 친구로서의 주디스를 마주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밝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주디스도 웃으며 말했다.
“시발, 웃기는.”
“아니, 갑자기 욕은 왜…….”
“내가 욕하는 거 하루 이틀 봐? 하, 그래도 줄이긴 해야 되는데. 사부가 관주님 욕하는 거 옆에서 듣고 있는데, 되게 없어 보이더라. 나도 그랬겠지?”
“어…….”
“야, 됐어. 말하지 마.”
“미안.”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
고리눈을 떠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한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아이른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뭘까. 자신을 위해 뭔가 준비한 거라도 있나?
물론 아니었다.
“너, 여기 다음에 어디 갈 거야?”
“어?”
“아니다. 어차피 왔다 갔다 하는데 얼마 안 걸리지? 저 뭐야 그…… 그리핀? 그거 타고 다니면 빠를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왜?”
“그러면, 부탁 하나 하자.”
여기까지 말한 주디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후우 숨을 내쉬며 무언가를 건넸다.
정성스레 밀봉된 편지 봉투였다.
멍한 표정을 짓는 아이른을 보며, 그녀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이드 가문 좀 들러서, 브랫한테 편지 한 통만 보내 줘.”
“…….”
“싫, 싫으면 말고.”
“아니, 괜찮아.”
편지를 받아 든 아이른 파레이라가 미소 지었다.
다행이었다.
자신의 걱정과는 달리, 주디스의 삶은 앞으로도 고독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