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부탁 하나 하자 (3)
바람이 불었다.
그리 강하지 않은, 달구어진 분위기를 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람이 아이른 파레이라와 쿤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허나 대련은 곧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저벅저벅, 키릴 파레이라가 두 검사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표정에 두려움과 긴장감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살짝 황당해진 쿤이 그녀에게 물었다.
“뭐냐?”
“주디스 언니 좀 보려고요.”
“내가 괜찮다고…….”
“괜찮다고 해서 치료하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요? 잠깐 기다리시죠. 방에 눕히고, 간단한 처치라도 하고 올 테니까.”
“치료사라도 되나? 아니면 사제?”
“요술사예요. 하지만 간단한 치료 정도는 가능해요.”
“…….”
“아, 먼저 시작하지 마세요. 오빠가 싸우는 모습, 동생으로서 꼭 보고 싶으니까.”
“…….”
“알겠어요?”
“허, 이것 참.”
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동생이기 때문일까?
그녀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다니,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겼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빨리 끝내고 나오도록.”
“예. 루루, 도와줘.”
“응.”
뾰로롱
요술소녀로 변신한 루루가 요술봉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주디스가 편안한 자세로 허공에 떠올랐다.
키릴을 비롯한 이들이 집으로 들어선 뒤, 이를 끝까지 지켜보던 쿤이 아이른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랑 성격이 꽤 달라 보이는군.”
“맞습니다.”
“주디스와 네 동생도 서로 아는 사이였나?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꽤 신경 써 주는 모습이구나.”
“초면입니다.”
아이른이 웃으며 말했다.
동생의 행동이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냥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주디스를, 주디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잠시 후,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시금 고양이로 돌아온 루루, 그리고 도도한 표정의 키릴이 쿤을 쳐다봤다.
그녀가 말했다.
“시작하세요.”
“하…… 내가 누구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닌데 말이지…….”
쿤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하긴, 예부터 자기 동생은 평범한 사람보다 특이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긴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갖췄다.
그가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좋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눈빛을 교환한 서로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현된 오러 소드가 황금색으로, 백색으로 빛났다.
놀랍게도 길이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물론 쿤이 전력을 다한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대륙 최고로 평가받는 그의 오러 소드가 자신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아이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허나 진짜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아무런 기미도 없이, 쿤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슉
콰앙!
“크흣…….”
순식간에 찔러 들어오는 검을 튕겨 내며, 아이른이 신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단박에 패배할 뻔했다.
쿤의 검은 그 정도로 빨랐다.
발을 움직여 거리를 좁히면서 검을 코앞으로 내지를 때까지, 자신이 한 행동이라고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검을 들어 올린 것밖에 없었다.
펑!
퍼엉!
펑-!
쿤의 찌르기가 연속해서 쏟아졌다.
아이른은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이에 맞섰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막아 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부로부터 용솟음친 무쇠의 기운이 아이른을 더욱 단단하게, 무겁게 만들었다.
반격의 때를 찾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허사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쿤의 검격을 받아 내며, 아이른은 대륙 3대 검수와 자신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를 깨달았다.
‘중검의 묘를 전혀 살릴 수가 없어.’
무거운 검은 느린 검이 아니다.
단단하고 육중하게 나아가며 자신의 공간을 차지하고, 상대의 자유를 제한하는 압박 위주의 검이다.
허나 그것이 시작부터 막혔다.
나아가고자 하는 위치에는 언제나 쿤이 있었다.
점령하고자 하는 공간에 항상 상대의 검이 존재했다.
단순히 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자세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가 존재했다.
제아무리 정면충돌에서 밀리지 않는 중검이라곤 하나, 몇 수나 빨리 대비하는 상대로부터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지.’
아이른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상했다.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라바트에서 알칸트라로 향하던 때의 자신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떻게든 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뜻깊은 한 수를 보여 주기 위해 무리한 움직임을 보였을 터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몰랐지만, 어느새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물의 검이 그에게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부여하고 있었다.
물론, 마냥 침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른은 젊은 검사였다.
세상 대부분의 것을 경험하고 느껴 본 늙은 검사와 달리,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물은 그것을 조율할 뿐, 결코 꺼지지 않게 만들었다.
터어엉!
그가 오행신공 중 금(金)의 기운을 끌어올려 상대의 검을 막아 냈다.
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묵직한 감각이 손에서 느껴졌다.
그 잠깐의 틈을 노리고 아이른이 반격을 취했다.
강철에 불꽃이 더해진다.
대장간의 철괴처럼 살벌하게 달구어진 검이 쿤의 명치를 향해 쏘아졌다.
‘상상 이상이다.’
쿤의 눈에 서린 흥미가 더욱 진해졌다.
솔직히 감탄했다. 거북이처럼 마냥 방어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선 공세로 돌아서다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검도 아니었다.
단단한 의지, 거기에 더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뜨겁고도 사나운 기세가 한 수에 담겨 있었다.
동급의 상대였다면 일순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
물론 쿤은 아이른보다 몇 수는 위의 고수였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더욱 템포를 높였다. 근력을, 오러를, 마음을 극한의 극한까지 가속했다.
어느새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된 대검호의 검이, 거칠게 짓쳐 드는 상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카앙-!
떨어져 내렸다.
카아앙-!
계속해서,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일곱 번의 공격을 쏟아 낸 쿤이 여유로운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말했다.
“꽤 괜찮았다.”
“…….”
아이른은 그런 그의 뒤를 쫓지 못했다.
자신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쏟아져 내린 상대의 공격이, 그로 인해 휘몰아친 바람이, 어느새 검에 담았던 열기를 날려 버렸다.
식어 버린 강철만으로는 도저히 상대에게 닿을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뒤늦게 쿤을 향해 말했다.
“저기…….”
“쿤 씨라고 편하게 불러도 된다. 나는 딱히 격식을 따지지 않으니까.”
“……쿤 님. 죄송하지만, 잠깐의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쿤이 아이른을 지그시 쳐다봤다.
평소라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상대의 기다림이 필요한 수가 실전에서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더 악착같이 달려들어 보라고 거세게 호통쳤을 터였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이안이 자신의 검을 이해할 수 없듯이.
자신 역시 이안의 검을 쫓아갈 수 없다.
후배들도 똑같을 터였다. 주디스를 가르치듯 아이른을 대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도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언제나 맞수와의 싸움만을 전제로 수련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던 사람이 쿤이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느새 스승의 마음가짐으로 아이른을 대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그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스승이라 하긴 그렇고…… 선배로서 약간의 아량을 베푸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지도.
여기까지 생각한 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 역시 묘했다.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불꽃처럼 뜨거운, 그러면서도 침착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젊은 소드마스터.
이안을 닮았다.
허나 이안과 똑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쿤이 관심을 보이는 사이, 아이른의 기운이 완성되었다.
“후우…….”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날숨.
아이른의 기세도 그와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발밑까지 차오른, 느릿하면서도 장중하게 흘러온 상대의 오러를 느끼며 쿤이 눈을 빛냈다.
‘마치 물과 같구나.’
아니, 단순히 물에만 비유할 수는 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밋밋하고 심심하게만 느껴졌던 기세가 어느 시점부터 격렬하게 변했다.
해일이었다. 격랑이었다. 거칠게 밀려오는 아이른의 기세는 단순한 물이라고만 하기엔 더없이 뜨거웠다.
즈우우우웅……!
거기에, 강철의 기세가 더해졌다.
거대하고 무겁게 자신을 향해 무너져 내리는 상대의 공세를 보며,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으로 웃었고, 눈으로 웃었다.
너의 검, 잘 봤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의 선택은, 직전 아이른의 공세를 막았던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콰앙!
검을 내지른다.
콰아앙!
또다시 검을 내지른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앙!
콰앙!
콰아아아아앙-!
빠르게, 더 빠르게, 더더욱 빠르게 검을 내지른다. 그야말로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미친 듯이 검을 내지른다.
촤아아아아악-!
쿤은 이안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대륙 최고의 재능도, 찬란한 가능성도 없었다.
여러 방면에서 놀라운 성취를 발휘했던 라이벌과는 달리, 그의 손에는 오직 하나의 무기만이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물을 베는 검?
당연히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 따위가 없어도, 들이닥치는 파도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
아이른이 번쩍- 하고 눈을 빛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쿤의 검격이 자신의 파도에 닿았다.
이안처럼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선보인 건 아니었지만, 강력하고 재빠른 검이 수도 없이 쏟아지자 장중하게 흘러가던 해일 역시 기세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물이 옆으로 밀려난다.
물이기에 결국 다시 제자리를 찾아 뭉치겠지만, 그전에 내리꽂힌 검이 또다시 물을 옆으로 밀어낸다.
그것이 수없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마주한 결과는, 아주 잠깐이나마 저 멀리, 양쪽으로 쪼개져 버린 해일.
그리고 그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젊고 유망한 검사.
그 정도의 틈이면 충분했다.
피식 웃은 쿤이 마지막 공격을 뻗었고,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대의 목에 검이 스치듯 지나갔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
“…….”
대련을 지켜보던 키릴과 루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을 찍어 누른 상대를 보며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배우긴 개뿔, 넌 따라 하지도 못해.”
쩝, 검을 거둔 쿤이 아이른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흘깃 쳐다본 그가 주디스를 떠올렸다.
‘가능성이 없다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나보다도 더 힘든 길을 걷게 생겼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